승계계획 실행 솔루션
2009년 뱅크오브아메리카(BOA·Bank of America)의 최고경영자(CEO) 켄 루이스(Ken Lewis)의 사무실 한쪽 벽면에 있던 화이트보드엔 “내가 여기서 일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Lewis’ days are numbered)”라고 큼지막하게 손으로 쓴 글씨가 적혀 있었다. 급변하는 경영환경과 이로 인한 압박으로 당초 임기인 2010년 말보다 빨리 회사를 떠날 결심을 굳히고 있었던 루이스가 자신이 임기보다 일찍 퇴임할 수 있으니 회사는 하루라도 빨리 자신의 후임을 찾아 임명해야 함을 자신의 사무실을 방문하는 모든 이들에게 알리고 싶은 마음에서 쓴 글이다. 이사회에 6인의 전문가로 구성된 ‘CEO 선임위원회(CEO Search Committee)’는 물론 ‘CEO 승계절차 및 기준(CEO Succession Planning Process)’까지 갖추고 있던 BOA는 과연 루이스의 조기퇴임에 적절히 대응했을까?
승계계획은 일회성 이벤트가 아닌 상시 운용이 필요한 제도
루이스가 조기 퇴임을 공개적으로 선언했건 하지 않았건 BOA는 켄 루이스가 CEO 자리에 오름과 동시에 적어도 차세대 CEO 승계 후보군을 선정, 이들을 관찰하고 육성해 왔어야 했다. 아무리 좋은 제도와 운영 조직이 있다 해도 상시적으로 늘 후계자 후보군을 선정하고 육성하는 작업을 하지 않는다면 예상치 못한 공백에 대비하기 힘들다.
루이스는 취임 초반부터 이른바 ‘스타 CEO’로 각광을 받아왔다. 글로벌 금융산업에서도 조직의 후광 때문만이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매우 영향력이 큰 유명 인사였다. 특히 2009년 닥친 글로벌 금융위기와 관련돼 업계의 입장을 대변하고 정부에 대응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런 그가 2010년 말까지 보장된 임기를 수행할 것으로 짐작한 BOA 이사회는 안 그래도 가뜩이나 심기가 불편했던 루이스를 불편하지 않게 하기 위해 승계 후보자들을 찾고 키우려는 노력을 시급한 우선순위로 생각지 않았다. 심지어 루이스의 조기 사퇴 시사에도 불구하고 승계프로세스의 속도를 올리지 않았다.
승계 후보자군을 발굴해 놓지도 않은 상황에서, 즉 승계프로세스를 상시적으로 운영하고 있지도 않은 상황에서 루이스가 임기보다 10개월이나 일찍 사임하고 나서야 부랴부랴 승계 후보자를 찾기 시작했지만 세계 최대 금융기관의 수장을 짧은 시간 내에 찾아 임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더구나 당시 찾아온 금융위기로 인해 조직 내·외부를 막론하고 유능하다고 판단되는 인재들이 권한보다는 책임과 위험이 커 보이는 금융기관의 CEO 자리를 선뜻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 결과 BOA는 무려 10개월이나 수장자리가 공석이 된 초유의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이로 인해 주가하락은 물론 투자자와 고객들로부터 신뢰와 능력을 의심받게 된 것은 물론이다. 특히 이사회에 대한 투자자들의 신뢰 하락은 전반적인 BOA의 전략과 조직역량에 대한 회의, 나아가 이들에 의해 새롭게 임명된 CEO인 브레인 모이니한(Brain Moynihan)의 적합성에 대한 의구심으로까지 이어지며 이후 최고경영진과 이사회가 내리는 주요 의사결정의 적절성 여부에 대해 투자자들과 고객들로부터 많은 도전에 직면하게 됐다. 한마디로 무능한 이사회가 지배하는 무능한 조직이라는 인식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승계 계획에 대한 투자자의 인식 여부가 누가 승계 후보자냐보다 중요
사실 승계계획의 힘은 예상치 못한 공석이 생겼을 때 발휘된다. 계획된 퇴임 또는 퇴진이라면 평소 승계 후보자군이 없더라도 후보자를 찾기 위한 시간이 충분하고 후보자의 기준도 보다 구체적이고 명확할 수 있다. 물론 최종 후보자의 역량에 따라 경영 리스크, 특히 CEO가 누구냐에 따라 조직의 성패가 좌우되는 CEO 리스크가 발생하기도 한다. 그러나 예상되고 계획된 공석이 가져오는 CEO 리스크는 그리 크지 않은 편이다. 최소한 CEO직 수행을 위해 약간이라도 준비기간을 가질 수 있을 뿐 아니라 투자자 및 고객에게도 모든 게 사전 계획에 따라 움직인다는 인식을 심어주기 때문에 새로운 승계자가 CEO로 적응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벌어줄 수 있다.
반대로 예상치 못한 공석은 때로 엄청난 경영 리스크를 초래한다. 특히 CEO 1인의 경영능력이나 영업 네트워크에 과하게 의존했던 조직, CEO가 핵심 경영 노하우, 기술 및 특허 등에 관련된 지식을 온전히 아는 유일한 인물인 경우 CEO의 카리스마와 리더십 스타일에 의해 조직이 통제되고 조직문화가 형성된 조직일수록 그 리스크가 매우 크다. 다시 말해 CEO 개인이 조직과 동일시되는 경우일수록, 그리고 제도와 체계보다는 리더 개인의 역량과 스타일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조직일수록 리스크가 크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CEO 포지션 공백 리스크를 더 많이 가지는 조직일수록 우수한 제도와 시스템, 뛰어난 구성원과 중간관리자 풀을 기반으로 승계 후보자를 발굴·육성하고 있음을 적극적으로 알려야 한다. 스티브 잡스(Steve Jobs)라는 유일무이한 스타에 의존해온 애플(Apple)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애플의 주가는 잡스의 건강 악화가 회자된 2011년 6∼7월께 주가가 300달러 정도까지 하락했지만 그해 8월에 팀 쿡(Tim Cook)을 후계자로 임명하고 잡스가 사임한 후 오히려 안정적으로 상승해 420달러에 이르고 있다. 조직과 동일시되던, 일종의 ‘애플의 신’이었던 잡스의 사임과 그 이후로도 애플이 안정적 주가를 유지하고 있는 비결은 △신속한 승계 후보자의 임명 △투자자와 관련 업계의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안정적 후계자 선정 △ 준비된 절차에 따라 체계적으로 잡스 이후를 대비하고 있다는 인식을 적극적으로 투자자와 언론에 심기 위해 노력한 데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후계자인 팀 쿡의 능력과 역량에 대한 다양한 견해와 상관없이 승계계획 자체가 작동되고 있어 CEO 포지션의 공백 없이 영속성 있는 기업활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게 기업 입장에서 매우 중요한 승계계획의 수립 및 운영의 일차적 목표라 할 수 있다.
머서(Mercer)가 전 세계 주요 다국적기업 중 2010년 기준으로 과거 3년 전 CEO 교체가 있었던 10여 개 기업의 이익변동 추이를 분석한 결과 교체 당해 년도에는 평균적으로 이익이 전년 대비 약 2% 정도 감소하는 반면 교체 이후 2년간은 8∼10%로 성장한 것으로 나타났다. 즉 CEO 교체기의 실적하락은 어느 정도 피치 못할 상황일 수 있음으로 어떻게든 CEO 교체기와 그로 인한 과도기를 단축하는 게 기업성과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따라서 상시 승계계획과 운영을 통해서 CEO 포지션 공백을 방지하고 후보자의 준비도를 높여 적응기간을 단축시키는 것은 실질적으로 CEO 교체기를 단축시키는 효과를 줄 것이다. 이는 기업의 영속적 성장이나 후퇴 없는 성장에 필수적인 요소다.
승계계획의 출발 - 직무 및 자격·역량 정의
승계계획의 초점은 ‘누구’를 임명할 것인지가 아니라 어떤 ‘포지션’에 공백이 발생하는가에 우선적으로 맞춰져야 한다. 해당 포지션의 향후 주요 목표와 임무가 현재와 같은지, 혹은 지금과 달라져야 하는지에 대한 판단도 매우 중요하다. 중간관리자 포지션이 아니라 상위직급, 특히 CEO 포지션에 대한 승계계획의 경우 현재와 다른 차세대 포지션 프로파일(position profile)을 명확히 준비하는 게 필수적이다. 상위직급일수록 일상적으로 동일한 업무를 반복하기보다는 조직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전략적 의사결정에 깊이 관여한다.
2010년 미국 스탠퍼드대의 기업지배구조센터(Rock Center for Corporate Governance) 연구팀이 전 세계 140개 글로벌 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CEO 승계계획 현황 조사 결과, CEO 승계계획 과정에서 현 CEO와 다르게 차세대 CEO의 역할 및 요구 역량·요건을 규정한 다국적기업의 비중이 무려 70%로 나타났다. 특히 요구 역량·요건에 있어 리더십 스타일, 대인관계 및 과거 이력 측면에서 현재 CEO와 차세대 CEO 간의 차이를 두고 있는 기업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그림 1)
따라서 경영환경의 변화를 예측해 이에 대응하고 선도하는 데 필요한 새로운 업무영역을 예상한 후 해당 업무의 성공적 수행을 위한 구체적 목표 기준을 체계적으로 문서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문서화된 기준은 공백이 발생할 포지션에 적합한 인재를 선별(screening)하는 데 쓰이게 된다. 승계계획의 핵심은 단순히 우수한 인재 (outstanding talent)를 발굴하고 임명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공백이 생길 해당 포지션에 가장 적합한 인재(right talent)를 육성해 적시에 배치하는 것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의료진단기기 개발업체인 퀘스트다이어그노스틱스(Quest Diagnostics)는 뛰어난 재무적 지식과 경영관리 능력을 바탕으로 인수합병을 통한 기업체질개선에 수완이 있는 CEO 케네스 프리먼(Kenneth Freeman) 덕에 1996년 이래 수차례의 인수합병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며 성장일로에 있었다. 하지만 조직이 일정 규모에 이른 2000년께 프리먼은 의료진단장비산업의 미래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는 인수합병에 의한 성장보다는 경쟁사보다 한발 앞선 R&D 투자와 신기술 개발이 향후 지속성장의 핵심이라고 결론 내렸다. 이에 따라 미래의 CEO는 자신과는 다른, 즉 재무나 기업 인수합병 전문가보다는 의료진단기술 및 제품개발과 관련해 통찰력을 가지고 시장을 리드할 수 있는 전문가여야 한다고 판단, 이에 적합한 인재를 발굴하기 위한 기준을 만들어 이사회와 공유했다. 이후 일정기간의 보완을 거쳐 2002년 말 당시 최고운영책임자(COO)였던 수르야 모하파트라(Surya N. Mohapatra) 박사를 후계자로 잠정 선정해 여러 중책을 맡기며 육성과정을 거친 후 2004년 CEO로 선임한다. 당시 프리먼은 53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향후 차세대 CEO 직무요건에 인수합병 전문가인 자신보다는 진단기기 관련 기술 및 시장전문가인 모하파트라가 더 적합하다고 판단해 과감하게 모든 경영상의 기득권과 권한을 포기하고 차세대 CEO로서 적합한 후계자에게 위임한 것이다. 모하파트라 박사는 여전히 CEO로서 퀘스트다이어그노스틱스를 안정적으로 성장시키고 있으며 경쟁사보다 한 세대 앞선 경영진 변화로 여전히 의료진단기기 및 관련 정보서비스 업계를 리드하고 있다.
도이치뱅크(Deutsche Bank)의 경우 2010년까지는 모든 주요 포지션의 승계자를 내부에서 우선 발탁해왔다. 이는 ‘어떤 포지션이냐’보다는 ‘누구냐’의 관점에서 승계계획을 운영해 왔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2011년 CEO 조셉 아커만(Josef Ackermann)은 이를 구태의연한 방식(old way)이라고 규정하고 차세대 CEO는 CEO에게 요구되는 사명과 역할이 어떠한가에 따라 내·외부, 금융·비금융에 관계 없이 가장 적합한 인물을 복수로 선정해 충분히 개발하고 검증할 프로세스를 거치며 승계자를 결정하는 새로운 방식(new way)를 도입할 것임을 선언한 바 있다. 이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을 생각하기 이전에 차세대 CEO에게 요구되는 사항은 무엇이며 이에 가장 잠재적으로 적합한 사람은 누구인가를 파악하는 데 주력하겠다는 뜻이다.
위 사례들과 조사결과에서 보듯 승계계획은 단순히 현재 리더의 건강악화나 사임에 대한 대비라는 수동적 의미를 넘어선, 미래 경영 및 경쟁환경 변화에 대한 선제적 대응이라는 적극적인 경영수단으로 쓰일 수 있다. 승계계획을 선제적 대응으로 확대 활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차세대 전략의 방향에 맞춰진 차세대 주요 포지션 리스트를 준비해 둬야 한다. 또한 현 주요 포지션의 주요 직무목표와 역할이 차세대에도 유효할지, 또한 달라지는 점은 무엇인지를 명확히 파악하고 정의해 둬야 한다. 이사회 내 CEO임명위원회처럼 승계계획을 운영하거나 후보자를 결정하는 기구나 사람들이 차세대 환경하에서 수행하게 될 포지션과 잠재 후보자 간의 적합성을 알아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객관적이고 투명한 절차와 방법들을 세밀하게 짜서 운영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조직에 전략적으로 공헌할 수 있는 승계계획을 위한 첫걸음이다.
회원 가입만 해도, DBR 월정액 서비스 첫 달 무료!
15,000여 건의 DBR 콘텐츠를 무제한으로 이용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