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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R3. 관행 파괴한 현대무용가 안은미

작품 형식, 가치관, 전통, 관객과의 소통. 모든 것을 깨고 현대무용의 전설이 되다

임수빈,이미영 | 236호 (2017년 11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안은미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파격적인 무용가로 꼽힌다. 그는 작품의 형식은 물론 작품 세계, 그리고 예술가와 관객이 맺는 관계까지 기존 관행을 모두 파괴하고 새로움을 시도했다. 그의 예술 활동은 새로운 기회에 도전하고 기존에 없었던 시장을 창출해 내는 일종의 ‘창업가 정신’과 맞닿아 있다. 새로운 장르의 현대무용을 끊임없이 시도했으며 글로벌 무대에서 동양인 여성 안무가로서 새로운 입지를 구축했다. 또 예술가의 근엄함과 신비주의 대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인터뷰 등을 통해 관객들을 적극적으로 찾아가며 현대무용의 진입장벽을 낮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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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와 조롱 사이에서

검은 테이프를 그물처럼 몸에 칭칭 감은 십수 명의 댄서들이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춤을 췄다. 마치 근육이 마비된 양 어색하게 팔과 다리를 움직였다. 배경음악은 현대무용에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이른바 ‘뽕짝’이었다. 기괴했다.

현대무용의 진지함과 무용수의 아름다운 선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예술에 조예가 깊다고 자부하는 관객들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객석에서 웅성거림이 들리기 시작했다. 몇몇은 이내 자리를 떴다. 눈살을 찌푸리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일부는 자리에서 뜨지 못했다. 이들은 충격을 받았다. 감탄을 비명처럼 내뱉는 관객들도 있었다. ‘극과 극’. 그렇게 그날 공연의 평가는 엇갈렸다. 1992년 30세 신인 무용가 안은미가 ‘아리랄 알라리오’를 발표하던 그날 서울 호암아트홀의 장면이다.

그날 이후 한국 무용계는 논란에 휩싸였다. 말 그대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보수적인 한국 현대 무용계 인사들은 “안은미가 한국 무용을 망치고 있다”며 맹비난했다. 천편일률적인 작품만 내놓는 한국 무용계에 지친 일부 사람들은 안은미가 “한국 현대무용의 정체기에 일침을 가했다”며 극찬했다. 그럼에도 그는 ‘모난 돌’이었다. 안은미를 바라보는 한국 무용계의 시선은 전반적으로 곱지 않았다. 그럴수록 안은미는 더 파격적인 작품으로 화답했다. ‘내가 걸어가는 이 길이 맞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그의 파격에 비난도 커졌지만 지지자와 팬 층도 늘어갔다. 그는 사람들의 다툼이나 비난, 지지와 찬사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오직 ‘무엇을 파괴하고 무엇을 새롭게 창조할 것인가’에만 몰두했다. 그리고 2017년 현재 안은미는 한국 무용계의 악동에서 대모로 거듭났다.

30년 넘게 안은미는 한국 현대무용계를 이끌었다. 그가 단지 남들과 다른 독창적인 작품만을 추구했던 것은 아니다. 대중들에게 즐거움도 선사했다. 안은미는 누구보다 두터운 팬층을 확보하고 있는 예술가다. 예술계에서도 불모지에 가까운 게 한국 현대무용 시장이다. 난해한 춤 동작과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세계 때문에 대중이 외면한 장르가 된 지 오래다. 그런데 사람들은 안은미의 공연을 보기 위해 기꺼이 돈을 지불한다. 안은미의 공연은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매진 사례를 기록할 만큼 인기가 높다. 그의 최신작인 ‘땐쓰 3부작’ 발표 후 안은미와 안은미무용단은 한국에 머문 시간이 해외에 체류한 시간보다 더 짧을 정도다.

DBR은 안은미가 창의성과 대중성을 모두 잡은 성공한 예술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을 분석했다.

 

서양 무용 따라 하기의 한계를 넘어서다

현대무용은 서양에서 나온 춤이다. 발레에서 파생된 새로운 춤의 형식이다. 움직임의 기본형은 같지만 큰 차이가 있다. 발레는 표현하는 방식이 정해져 있다. 정해진 몸의 움직임을 통해 기교를 부리고 무용수가 그 안에 감정을 넣는다. 현대무용은 비교적 규칙에서 자유롭다. 보다 더 자유로운 몸의 움직임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다. 때론 더 과장되게, 때론 더 축소해 몸을 움직이면서 극적인 효과를 낸다. 그래서 현대무용에선 무용수의 표현력과 창의성이 핵심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현대무용은 자유로움과 거리가 멀다. 비슷비슷한 형식과 틀에 맞춘 작품들이 대부분이란 평가다. 특히 한국 현대무용은 1950년대 해방 이후부터 시작돼 역사가 짧다. 대부분 일부 대학교를 중심으로 발전했다. 학문적 이론, 이미 서구에서 구축한 현대무용 방법론에 더 치중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형성됐다.

1980∼90년대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현대무용은 트렌드가 생명인데 그 트렌드를 따라갈 수 있는 정보망이 많지 않았다. 또 현대무용은 서구의 무용이며, 이들의 문화를 수용해야 한다는 강박도 존재했다. 따라서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하기보다 서구의 무용 기술이나 기법을 따라가는 데 급급했다. 정해진 규칙과 틀 안에서 무용계가 움직이다 보니 새로운 작품이나 시도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한국 무용계가 정체 상태라는 비판적 시각을 가진 전문가들도 적지 않았다.

안은미는 누구보다 이 현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1986년부터 한국현대무용단에 들어가 뛰어난 기량으로 군무를 주도하며 리더로 활약했다. 그러나 남들이 추는 춤을 똑같이 재현하는 것은 그가 생각하는 현대무용의 본질과 거리가 멀었다. 그는 춤꾼의 개성과 고민이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절대로 ‘복사기가 돼선 안 된다’고 판단했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안은미는 1988년부터 자신이 활동하고 있는 현대무용단과는 별개로 매회 개인발표회를 열었다. 이때 발표한 ‘메아리’라는 작품에서는 예술고등학교 학생들을 대거 섭외해 춤을 췄다. 이들은 몸이 자유자재로 움직이지 않고, 팔과 다리가 고정된 줄에 묶여 있는 듯한 모습을 연출했다. 목적 없이 사는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속박을 표현한 것이다.

안은미는 이 작품을 통해 대학을 중심으로 정형화된 춤의 세계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내면의 고통이나 슬픔 등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아름다운 몸짓만 강조하던 관행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다.

1992년 발표한 ‘아리랄 알라리오’를 통해 그는 한층 더 파격적인 시도를 이어갔다. 성인가요에 맞춰 기괴한 형태로 몸을 흔드는 게 핵심이었다. 예술성만 강조해 일반 대중들이 다가가기 힘든 현대무용은 결국 소수의 전유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메시지를 담았다.

이후에도 안은미는 연극과 무용을 접목한 현대무용의 한 장르인 ‘탄츠테아터(Tanztheater)’를 한국 전통문화와 결합해 최초로 무대에 올렸다. 또 실제 인물의 이야기를 관객들에게 그대로 보여주는 ‘포스트 드라마틱 시어터(Post Dramatic Theatre)’도 처음 국내에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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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미(美) ‘오리엔탈리즘’의 재해석

“보통 서구에선 동양에 대해서 ‘신비롭다’는 이미지를 많이 떠올려요. 조용하면서 뭔가 감추고 있는 듯한 여성의 이미지죠. 실제로 아시아인이 연출한 작품은 서구인들이 이미 규정해 놓은 오리엔탈리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그건 안은미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아시아 출신 여성 무용가의 작품은 어때야 할까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기 시작했죠.”

안은미는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을 정립한다. 동양인의 신체적 불리함을 장점으로 승화시킨 안무가 대표적인 예다. 아시아 무용수들은 서양 무용수보다 다리와 팔이 짧다. 이런 신체적 특징은 춤을 추는 데 단점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안은미는 단점을 극복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오히려 짧은 팔다리를 최대한 많이 사용하면서 동양인만이 표현할 수 있는 아름다운 움직임을 만들었다.

‘하늘고추’라는 작품에서 이 특징이 두드러진다. 여성 무용수 10여 명이 땅에 허리를 대고 팔은 땅을 짚은 채 발을 회전하며 무대를 가로지른다. 상대적으로 다리 길이가 짧아도 얼마든지 소박하면서 여유로운 움직임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평단에서는 파워를 중시하는 서양의 무용인들에게서 보기 힘든 동양인만의 독특한 유연성과 여유를 느낄 수 있다는 평가를 내렸다.

한국의 전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한 것도 안은미식 춤을 완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안은미는 보통의 한국 예술가들처럼 한국의 정체성을 ‘한’이라고 보지 않았다. 오히려 유쾌함과 경쾌함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나무를 뿌리째 뽑아 비뚤어지고 울퉁불퉁한 형태 그대로 집의 기둥으로 사용하는 우리나라의 건축 양식에선 여유로움이 느껴진다”며 “우리나라의 회식 문화나 음주 문화만 봐도 넘치는 에너지와 끼를 접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신춘향(2006)’ ‘바리공주-이승 편(2007)’ 등은 한국의 전통을 안은미식으로 재해석한 점이 돋보인다는 평가다. 두 작품 모두 한국 전통 이야기를 모티브로 하지만 원작과 전혀 다른 스토리가 전개된다. 신춘향에는 10대 소녀가 등장하지 않는다. 정절을 지키려고 하지도 않는다. 산전수전 다 겪은 40대 노처녀 춘향이 20대 이몽룡을 유혹한다. 안은미는 가슴을 드러낸 당당한 춘향을 연기한다. 붉게 물든 무대와 무용수들이 입은 형형색색의 치마는 춘향의 정열과 강인함을 나타낸다. 공연 막바지에는 안은미가 길게 땋아 내린 가발을 벗고 안은미의 상징과도 같은 민머리를 드러낸다. 이 장면이 연출하는 풍자와 해학에 사람들은 또 한 번 감탄한다.

바리공주도 마찬가지다. 그는 바리공주를 부모에게 버림받은 비련의 여주인공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버려진 후에도 강인한 생명력을 이어가고, 자신을 버린 부모를 끝내 용서하는 포용력을 중심으로 바리공주를 바라본다. 안은미가 바리공주 무대에서 보여준 의상에서도 이런 특징이 잘 드러난다. 그는 발목 위로 올라오는 짧은 치마와 소매를 걷어 올린 저고리를 입고 나와 바리공주의 적극성과 활동성을 강조했다.

이 독특한 이야기들은 글로벌 무대에서도 통했다. 전통적인 요소에 현대적인 메시지가 더해져 그동안 보지 못했던 새로운 매력을 보여준 것이다. 프랑스의 한 언론은 “현재와 과거의 절묘한 조화”라며 극찬했다.

신춘향은 2006년 세계음악극축제에 초청받아 네덜란드를 포함한 유럽 4개국에서 공연했다. 사람들은 몽환적이면서 화려하고 익살맞은 이 무대에 열광했다. 바리공주는 2011년 에든버러프린지페스티벌(EIF)에 초청돼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2900석 규모의 에든버러 플레이하우스 극장에서 세계 각지에서 온 관객들이 환호했다.

 


프로페셔널과 아마추어의 경계를 파괴하다

“이게 무슨 춤이야….”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안은미의 무대를 차지한 건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보는 아저씨와 어머니들이었다. 어색하고 어설픈 중년 아줌마의 몸짓에 대중가요가 입혀졌다. 몸뻬 바지에 트레이닝복, 뽀글뽀글한 파마머리 등 촌스러움이 가득 묻어났다. 무대 위에는 반짝거리는 ‘미러볼’까지 등장했다. 세련되고 진지한 예술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흡사 관광버스에서나 볼 법한 광경이다. 안은미가 2011년 두산아트센터 상주단체로 들어가 선보인 작품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다.

처음에 이 무대를 접한 관객들은 어리둥절했다. “아줌마의 막춤이 예술이냐”며 공개적으로 불쾌함을 표시하는 관객도 있었다. 그런데 관객 한두 명이 박자에 맞춰 박수를 치더니 이 무대에 몰입했다. 중간에 노부부가 느린 템포의 음악에 맞춰 손을 맞잡고 추는 장면에선 가슴 찡한 감정을 느끼는 관객들도 있었다. 피날레 장면에서는 모두가 함께 웃으며 무대에 오른 아마추어 춤꾼들을 응원했다. 일부는 무대에 올라 손을 맞잡고 춤을 췄다. 아줌마는 더 이상 아줌마가 아니었다. 관객에게 감동을 주는 예술가가 됐다.

이 작품은 ‘포스트 드라마틱 시어터’로 분류된다. 실제 인물을 올려 실제 상황을 그대로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해외에서는 많은 공연이 이 형식을 빌려 이뤄지고 있었지만 우리나라에선 안은미가 처음이었다. 다시 한번 국내에 새로운 장르를 창조해 냈다. 그는 객석에서 예술가의 공연을 수동적으로 바라보던 관행이 이어지면서 춤이 일부 사람들의 전유물이 됐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몸짓은 사라져갔다. 안은미는 우리의 삶에서 우러나오는 몸짓이 잊히기 전에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안은미 특유의 ‘마이너리티 감수성’도 이 작품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안은미는 누구보다 소수자의 삶에 주목한다. 그것이 안은미가 말하는 춤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안은미는 자신의 작품을 “사람들에게 춤을 돌려주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의 아픔에 집중했다. 안은미는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으로 사람들을 위로하고, 그것을 통해 사람들과 함께 세상을 바꿔나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작품을 준비하기에 앞서 3년 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며 할머니와 할아버지, 아저씨들을 만났다. 시골 마을, 장터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춤 한 번 춰 달라”고 요청했다. 사람들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자연스럽게 추는 춤을 카메라에 담았다.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기 위해 고무신을 신고 다녔는데 많은 곳을 돌아다니다 보니 헤진 고무신만 200여 켤레라고 한다. 안은미는 이들의 춤을 있는 그대로 무대에 올렸다. 우리 시대의 어머니들 외에도 산업화 시대를 온몸으로 겪으며 외로운 존재가 된 아저씨들, 학업에 지친 고등학생들도 무대에 등장했다.

그는 이후 왜소증 장애인과 시각장애인을 주인공으로 발탁한 작품도 선보였다. 특별한 무대 연출도, 안무도 없었다. 이들은 음악에 몸을 맡긴 체 마구 몸을 흔들었다. 이 작품들은 ‘땐스 3부작’ 시리즈로 관객들을 만났다.

이 무대는 2015년 한불 수교 100주년을 맞아 프랑스 파리의 대표 극장인 테아트르 드 라 빌(Theatre de la Ville)에 초대되면서 더 큰 반향을 일으켰다. 프랑스 4개 도시에서 열린 8개 공연이 매진 행렬을 이어갔다. 해외 평단은 안은미가 사람이 늙어가는 것, 외로움, 소외라는 문제를 익살맞게 표현해 냈다며 높이 평가했다.

그 뒤로 안은미와 이 아마추어 댄서들의 삶은 180도 바뀌었다. 그들은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글로벌 댄서로 거듭났다. 소외된 우리 주변의 이웃은 세계 무대의 주인공이 됐다. 2016년 한 해 동안 10여 개 도시에서 20회 해외 공연을 이어갔다. 안은미의 실험 정신은 이제 현대무용의 중심에서도 인정하는 ‘최신 트렌드’가 됐다.

 

찾아가는 예술가…

반백의 안은미는 여전히 젊은 감각을 유지하며 무용계의 트렌드를 선도하고 있다.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지속적으로 실행한 것 외에 안은미의 적극적인 마케팅 능력도 무용계의 리더십을 유지하는 데 한몫했다.

안은미가 1992년 뉴욕에서 활동했던 당시, 그는 적극적인 ‘셀프 마케팅’으로 당당히 뉴욕 현대무용계 ‘이너서클’로 들어갔다. 당시 뉴욕 무용계는 백인 남성이 주도해 보수적인 측면이 강했다. 이름도 모르는 동양 여성 무용가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또 뉴욕 무용계에서 성장하기 위해선 오랜 시간이 걸린다. 대학교나 소극장에서 하는 작은 공연부터 차근차근 경력을 쌓아야 한다. 그중에서 실력이 좋은 사람만이 대형 극장이나 유명 스튜디오에서 초청하는 개인전을 열 수 있다. 초청된 개인전에서도 꾸준히 좋은 평가를 받아야 뉴욕 무용계에서 입지를 구축할 수 있다. 적게는 5년, 길게는 10년이 넘게 걸리는 과정이다.

안은미는 고민 끝에 새로운 방식을 택했다. ‘사람들이 나를 초청하지 않는다면 내가 사람들을 초청하면 된다’는 역발상으로 접근한 것이다. 그는 뉴욕대 석사 과정을 마칠 무렵인 1995년, 갖고 있던 전 재산을 털어 뉴욕의 유명한 공연장인 머스커닝햄스튜디오를 빌려 개인 창작 작품인 ‘달 시리즈(Moon Series)’를 발표했다. 일종의 ‘셀프 프로덕션(Self Production)’ 방식으로 푸시 마케팅(Push Marketing)을 시도한 것이다.

무모한 도전은 성공적이었다. 뉴욕 무용계가 안은미의 파격적인 무대에 주목했다. 민머리를 한 작은 동양계 여성이 가슴을 훤히 드러내고 추는 자유로운 춤사위에 빠져들었다. 작품 메시지에 걸맞은 과장된 분장과 화려한 의상도 큰 화제가 됐다. 당시 뉴욕 무용수들은 대체로 디자인이 없는 간단한 의상을 입었고, 무대도 화려한 조명을 배제한 채 흑백으로 연출했다. 무용수들의 춤사위에 집중하기 위한 설정이었다. 여기에 익숙했던 뉴욕 무용계 인사들이 안은미의 무대를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안은미는 “그렇게 다양한 사람이 많은 뉴욕에서도 나를 굉장히 독특하고 개성 있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며 “나와 협업하는 외국 무용수들도 내가 만든 화려한 의상을 입는 것을 매우 즐거워했다”고 회고했다.

안은미는 뉴욕 무용계에서 파란을 일으키며 3년 후인 1998년엔 뉴욕 아트 파운데이션(New York Art Foundation) 안무가상을 수상하는 등 입지를 공고히 했다.

안은미는 또 미디어를 활용할 줄 아는 영민한 예술가다. 안은미는 작품을 발표하기 전 멋진 작품 소개 사진과 함께 보도자료를 배포한다. 안은미가 신인 무용가 때부터 습관적으로 해 온 일이다. 이 때문에 안은미의 과거 공연 정보를 신문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사실, 당시 현대무용계의 상황을 보면 이는 굉장히 낯선 풍경이다. 당대 무용가들은 예술가로서의 ‘신분’에 매몰돼 있었다. 먼저 대중에게 다가가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고 대중이 먼저 자신들의 가치를 알아봐주기 바랐다. 누가 요청하지 않아도 사진을 찍고, 그것을 언론사에 먼저 제공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그는 이런 관행을 깨고 먼저 대중들을 찾아간 것이다.

여기에는 안은미의 숨은 의도가 있다. 1990년대 초부터 현대무용이 어려운 장르로 변질되고 있었다. 현대무용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은 빠르게 줄어들었다. 그는 대중들에게 현대무용이 그런 춤이 아니라는 걸 적극적으로 알리고 싶었다. 대중들과의 소통 창구를 놓지 않기 위한 그의 노력이었던 셈이다.

최근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페이스북에는 안은미의 공연소식과 근황이 실시간으로 공지된다. 여기서 자신의 공연에 참여할 자원봉사자들이나 출연할 일반인들을 모집한다. 2015년 파리를 방문할 때 크라우드펀딩도 시도해봤다. 당시 공연 무대를 설치하기 위해 500만 원을 목표로 시작했는데 마감일 전에 750만 원이 모였다. 다양한 방식으로 안은미를 알리고 그것을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 그것이 안은미라는 브랜드가 오랫동안 유지되는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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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 요인 분석 및 시사점

1. 퍼스트 무버가 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

안은미는 매번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안은미는 자신이 만드는 작품의 형식이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끝까지 고수하지 않았다. 그 작품을 해체하고 분석해 또 다른 형식의 작품을 내놨다. 그저 그런 비슷한 작품을 내놓으며 자기복제에 갇힌 예술가들과 달랐다. ‘이게 같은 사람의 작품일까?’라는 의심을 들 정도로 작품의 진폭이 크다. 스스로 창조한 것마저 과감히 파괴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개인전을 넘어 대형 종합예술에 버금가는 탄츠테아터와 여러 대중들이 참여하는 포스트 모던 시어터 형식의 무대를 국내에 소개한 것이 대표적 예다. 안은미가 현대무용에 성인가요를 접목하고 춘향을 40대 노처녀로 변신시키는 과정에서도 잘 드러난다.

경영학의 대두인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는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 tion)’를 통해 혁신이 이뤄진다고 했다.1  안은미도 마찬가지로 ‘기본 틀의 밖을 생각해(Think outside the box)’ 기존 패러다임을 깨는 일련의 창작활동은 현대무용의 혁신을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루틴하게 돌아가는 현대무용계에 자신을 편입시키지 않았다. 현재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그것을 타파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무용계 평단의 끊임없는 공격에도 불구하고 문제작들을 내놓을 수 있는 안은미의 배포를 높이 평가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는 안은미가 유행을 창조하고 트렌드를 이끌어 나가는 퍼스트 무버(First Mover)가 되길 원하는 열망을 반영한 것이다. 그는 그저 그런 최신 유행 트렌드를 베끼는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2. 진정성을 바탕으로 하는 창조정신

안은미는 내러티브(Narrative)를 중요하게 여긴다. 상대방에게 자신의 생각을 설득할 수 있을 때 그 작품이 비로소 완성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단지 새로운 장치나 형식만으론 관객과 진심으로 호흡할 수 없다. 대중이 내 춤을 이해해야 하고 그 춤을 통해 공감해야 한다. 안은미는 이렇게 자신이 추구하는 명확한 방향성을 가지고 새로움에 도전한다. 우리 일상 속에 내재된 사회 문제점을 끊임없이 화두로 던지고 춤이 이 안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을 고민한다.

이 같은 안은미의 예술철학은 하버드대의 창조성 연구의 권위자인 아마빌 교수의 이론을 대입해 설명하고 있다. 창조성은 단지 새로움이나 전에 없던 존재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아마빌 교수는 창조성에는 참신함을 추구하는 독창성(novelty)뿐만 아니라 목표 고객이 인지하는 가치성을 추구하는 의미성(meaningfulness)도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2


안은미는 독창성을 강조해 관객에게 새로운 자극으로 호기심을 유발하면서도 진정성과 방향성을 가지고 관객이 무언가 느끼고 생각할 수 있도록 의미성을 부여했다. 순수예술가들은 자칫 난해한 작품세계와 현실과 동떨어진 기획으로 대중들로부터 외면을 받곤 한다. ‘예술성’을 강조하면서 대중과 멀어져가는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예술가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극장으로 관객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그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감동이나 재미 같은 요소가 그것이다. 관객들이 시간과 돈을 들여 현대무용을 감상할 수 있는 충분한 유인책이 필요하다. 안은미는 쉽고 간단한 스토리 라인과 현대인의 삶과 밀착된 주제를 반영한 작품을 통해 ‘창의적인 예술이 가져오는 예술가와 관객의 분리’라는 문제를 극복했다. 관객 없는 예술가, 대중으로부터 박수받지 못하는 예술가는 존재해서 안 되고, 존재할 수도 없다는 그의 생각을 몸소 실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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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창업가 정신을 접목한 노련한 예술가

안은미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진화하려는 예술과 사업철학은 예술인뿐만 아니라 기업경영자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안은미는 어려운 환경을 이겨내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창업가에게 필요한 덕목3 을 두루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그는 기존 틀을 깨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단순히 틀만 깬 것이 아니라 ‘창의적인 사고(Creative Thinking)’를 바탕으로 새로운 대안을 제시했다. 이와 관련해서 크게 두 단계로 설명이 가능하다. 우선 그는 대중들의 삶과 음악을 활용한 새로운 방식의 춤을 소개해 한국 무용계에 영향을 끼쳤다. 이후에는 한국 전통을 재해석해 오리엔탈리즘에 갇혀 있는 서구 무용계의 고정관념을 뒤집었다. 경쾌하고 밝은 무대와 메시지, 그리고 현대인의 고민을 접목한 전통 무대를 꾸며 독보적인 동양인 예술가로 성장했다.

둘째, 그는 ‘위험의 감수(risk taking)’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가 뉴욕 머스커닝햄스튜디오를 빌려 개인 발표회를 연 것이 대표적이다. 안은미는 자신을 알리기 위해 자신의 자원을 아낌없이 투자했다. 당시는 평단의 인정을 받지 않은 무용가가 스스로 개인전을 여는 것이 보편적이지 않은 시기였다. 실패할 경우 자신에게 쏟아질 뉴욕 무용계의 조롱과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신의 시간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고,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더 크다고 봤기 때문이다. 결국 안은미의 도전은 성공적인 결과로 이어졌고, 그가 뉴욕에서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는 발판이 됐다.

셋째, ‘적극성의 능력(proactive)’이다. 그는 대중들을 상대로 끊임없이 작품을 알리는 활동을 했다. 그의 작품을 알건, 알지 못하건 자신을 노출해 안은미를 알리고, 안은미의 작품을 알렸다. 일종의 ‘푸시 마케팅’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푸시 마케팅은 시장이 형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고객을 설득해 새로운 니즈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안은미의 이 같은 노력은 특히 ‘땐스 3부작’ 시리즈에서 빛을 발한다. 그는 현대무용과 거리가 먼 할머니, 할아버지, 아저씨, 학생들을 무대로 끌어들였다. 이들은 현대무용에 대해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안은미는 이들에게 춤이 주는 의미와 중요성을 강조했고 결국 이들을 설득해 무대에 올렸다. 현대무용은 특정 집단의 전유물이 아닌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예술이라는 메시지를 던졌다. 그러는 사이 더 많은 대중들은 관심을 보였고, 안은미의 작품을 자발적으로 찾아보기 시작했다. 척박한 현대무용이라는 시장에서 대중을 설득해 현대무용을 즐길 줄 아는 팬으로 만든 안은미의 마케팅 능력은 탁월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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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은미의 작품 세계

사실 안은미는 현대무용계에서 꽤 잘나가는 무용수였다. 국내 대학원 재학 시절인 1988년 서울올림픽 매스게임 감독 자리도 차지했다. 각종 무용제에 나가면 상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하지만 안은미는 자신의 작품에 만족하지 않았다. 자신의 상상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무대가 필요했다. 한국 무용계는 여전히 좁게 느껴졌다. 안은미는 현대무용의 중심지인 뉴욕에서는 어떠한 창작활동이 이뤄지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렇게 안은미는 1992년 뉴욕대 석사과정에 합격하면서 미국으로 건너갔다.

실제로 뉴욕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에게 가장 자극이 된 건 성소수자와 여성 무용수들이었다. 그들과 직접 만나 어울리면서 이들이 아름다움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 배울 수 있었다. 무엇보다 새로운 무용 트렌드를 직접 보고 경험한 것이 그에게 큰 자산이 됐다. 이 과정을 거쳐 안은미는 자신만의 견고한 작품세계를 구축했다. 그가 뉴욕에서 발표한 ‘무덤 시리즈’는 여성이 느끼는 사회적 억압, 성 역할의 고정관념에 대한 문제를 제기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두 번째 변화는 대구에서 시작했다. 2000년 안은미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이번엔 공무원 신분이 돼 있었다. 그토록 자유로운 예술가가 공무원이라니. 다들 의아했다. 안은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가 대구시립무용단장으로 들어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안정적인 생활에 조금 끌린 것도 사실이다. 매달 월급이 나왔고, 45명의 단원들과 함께 작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때가 되면 대구시의 예산 지원을 받아 작품을 만들 수 있었다. 자그마치 5000만 원이었다. 경제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은 예술가에게 더할 수 없는 축복이었다.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대구를 선택한 것은 그가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안은미는 이전에 개인전 위주로 작품을 해왔다. 대규모 프로젝트를 시도해보고 싶었고, 대구시립무용단장이 되면 그런 시도를 원 없이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대구에서 자유로운 작품 활동 덕에 연극과 춤을 접목한 ‘탄츠테아터’를 한국 최초로 무대에 올렸다. 이 경험이 2000년 중반에 발표한 ‘신춘향’과 ‘바리공주’에 큰 영향을 줬다. 이 작품들은 말 그대로 종합예술이다. 단순히 이야기만 녹여낸 것이 아니다. 국악과 현대음악의 조화, 오색찬란한 화려한 의상 등이 무대를 꽉 채운다. 특히 몽환적이면서 화려한 무대, 동서양을 오가는 초현실적 분위기가 높은 평가를 받았다.

안은미는 “나를 어느 한 군데 가두지 않고 여러 환경에 노출시킬수록 뇌가 자극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며 “새로운 변화, 도전을 찾아가고, 그 안에서 나를 강인하게 테스트하는 과정을 통해 계속해서 발전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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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영 기자 mylee03@donga.com
임수빈 연세대 경영대 교수 ktgprofim@gmail.com

임수빈 교수는 연세대 건축공학과 학사를 거쳐 미국 뉴욕 주립대(State University of New York)에서 MBA 학위를 받은 후 노스캐롤라이나대(University of North Carolina)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난 2013년 AMA(American Marketing Association) 학회에서 우수혁신 논문상을 수상하는 등 마케팅 분야에서 권위 있는 학자다. 주요 관심 분야는 신제품 개발, 창의성, 혁신 전략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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