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기에 접어든 글로벌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만년 2위’ SK하이닉스는 어떻게 ‘부동의 1위’ 삼성전자를 따라잡는 역사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었을까. 1차적으로 보면 고대역폭메모리(HBM)라는 혁신 기술에 빠르게 적응한 덕분이다. 하지만 이면엔 조직 내부에서 이뤄진 다양한 혁신과 노력이 있었다. 지난 10여 년간 SK하이닉스 초고성과의 기초를 닦은 ‘톱팀(C레벨 부문장)’의 일원, 현순엽 전 SK하이닉스 기업문화센터장은 신뢰에 기반한 협업 문화가 핵심이었다고 강조한다. 본원적 경쟁력을 끌어올릴 핵심 인재는 당연히 중요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초고성과는 서로를 믿고 치열하게 협업하는 조직을 통해서만 창출할 수 있다는 게 이유다. AI가 조직 구성원 모두의 능력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리는 시대, 이제 조직 구성원 모두가 잠재적 초고성과자다. 한두 명의 천재가 아니라 호기심과 실행력을 갖춘 수백 명의 인재가 협업으로 만드는 집단적 성과를 극대화하는 구조를 설계해야 한다.
2025년 국내 산업계는 물론 글로벌 반도체 업계를 뒤흔든 일대 사건이 일어났다. 글로벌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만년 2위였던 SK하이닉스가 ‘부동의 1위’ 삼성전자를 제치고 1위 자리에 오른 것이다. 1분기엔 D램 분야, 2분기엔 낸드 플래시를 비롯한 전체 메모리 분야에서 사상 처음으로 매출 1위를 기록하면서 영원할 것 같았던 순위표를 단숨에 고쳐 썼다.11글로벌 시장조사업체 카운터포인트리서치에 따르면 SK하이닉스는 지난 1분기 D램 시장에서 매출액 기준 점유율 36%로 삼성전자(34%)를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2024년 1분기만 해도 삼성전자 41%, SK하이닉스 30%로 10% 이상 격차가 벌어져 있었지만 차츰 차이를 좁히다 올해 1분기 역전됐다. 2분기에는 D램은 물론 낸드 플래시 등을 포함한 전체 메모리 분야에서 양사가 동일하게 매출 155억 달러를 기록해 공동 1위로 이름을 올렸다.닫기 주역은 단연 고대역폭메모리(HBM)다. 인공지능(AI) 기술의 발전과 함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HBM 시장을 사실상 석권하면서 SK하이닉스는 대역전극을 완성했다. 3분기 들어 전체 메모리 분야에선 삼성전자에 단독 1위(매출 194억 달러)를 내줬지만 D램 시장에선 여전히 1위를 지키며 치열한 ‘왕좌의 게임’에 돌입했다.
2012년 적자의 늪을 헤매던 하이닉스가 SK의 품에 안길 때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이다. 수조 원대 투자에도 불구하고 기술력도, 인재도, 투자도, 심지어 조직문화조차도 ‘삼성전자 쫓아가기’에 바쁘다는 평가를 받았던 SK하이닉스다. 성숙기에 접어든 산업, 그것도 투자 기간과 규모의 차이가 고스란히 경쟁력 격차로 이어지는 반도체 분야에서 2위 업체가 한참 앞서가던 1위 업체를 따라잡은 것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꿔놓은 수준의 ‘초고성과’라 할 수 있다.
SK하이닉스의 파격적인 성과 보상 체계 혁신도 화제가 됐다. 노사 합의를 통해 기본급 1000% 수준으로 묶여 있던 성과공유제(PS)의 상한을 없애고 영업이익의 10%를 성과급 재원으로 활용한다. 업계에선 올해 SK하이닉스의 영업이익이 약 37조 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한다. 이 경우 직원 1인당 1억 원 이상의 성과급을 받을 수 있을 전망이다. 이익을 낸 만큼 구성원들 모두가 더 큰 보상을 가져갈 수 있다는 원칙을 분명히 하면서 국내 기업들의 보상 체계에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