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일본 도쿄 시부야에 문을 연 한국 패션 플랫폼 ‘무신사’의 팝업 스토어에 방문객들이 입장하고 있다. 평일임에도 사전 예약을 하고 1시간 정도 기다려야 입장이 가능했다. 도쿄=황인찬 특파원 hic@donga.com
황인찬 도쿄 특파원
《일본 도쿄의 ‘쇼핑 1번지’인 시부야. 이곳에서도 가장 사람들로 붐비는 ‘시부야 스크램블’ 교차로는 평일에도 인산인해였다. 이달 14일 이 교차로에서 5분을 걸어가니 한국의 패션 플랫폼 ‘무신사’가 시부야 중심에 연 3층짜리 팝업 스토어가 보였다.》
입장을 하려면 사전 예약이 필요했다. 안내받은 ‘큐알 코드’를 따라 무신사의 일본 ‘라인(LINE)’ 계정에 들어갔다. 평일 오후 2시 반이었지만 한 시간 뒤에야 입장이 가능했다. 입구에는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여기서 만난 20대 일본 여성은 “이 팝업 스토어가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라며 “친구와 함께 보려고 며칠 전 예약했다”고 말했다.
● ‘성수’ ‘한남’ ‘홍대’ ‘명동’ 스타일, 시부야에 전시 시부야에서 만난 일본 소비자, 직원들과 한국의 패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거의 빠지지 않고 언급됐던 건 ‘성수동’이었다. 이들이 생각하는 K패션의 중심지는 성수동이며, 한국 여행 때 구입했던 한국 브랜드가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그렇게 성수동 등 대표 쇼핑 거리에서 외국인 관광객을 상대로 인지도를 키운 K브랜드들이 이제 역으로 일본의 패선 성지인 시부야 공략에 나서고 있다.
이날 찾은 무신사의 팝업 스토어는 한국 분위기가 물씬 났다. 서울의 대표적 패션을 스타일링해 전시했는데, 이름이 각각 ‘성수’ ‘한남’ ‘홍대’ ‘강남’ ‘동대문’ ‘명동’이었다. 한소희 등 한국 연예인의 대형 사진도 옥내외에 설치돼 있다. 도넛 가게인 ‘아임 도넛?’은 팝업 스토어 내에서 한국식 김을 뿌린 신상 도넛을 선보이고 있었다. 마치 성수동에 있는 팝업 스토어를 시부야에 그대로 옮겨놓은 듯했다.
매장 안은 옷을 고르는 사람들을 피해서 게걸음으로 이동해야 할 정도 붐볐다. 이달 3일 처음 문을 연 후 일주일 만에 방문객 2만 명을 넘겼다. 평일 약 3000명, 주말에는 약 4000명이 찾고 있다. 이렇게 붐비는 까닭에 피팅룸을 이용할 때도 모바일 사전 예약이 필요하다.
● K패션에 지갑 여는 日 젊은이들
14일 일본 도쿄 시부야 파르코 백화점 4층에 현대백화점이 마련한 정규 매장. 여기 입점한 K패션 브랜드 ‘트리밍버드’의 안내판에 3만 엔 이상 구입할 경우 선물로 주는 ‘고양이 키링’이 소진됐다는 문구가 있다. 도쿄=황인찬 특파원 hic@donga.com
무신사의 팝업 스토어 바로 옆 건물인 파르코 백화점의 4층에도 한국 패션 브랜드가 진출해 있다. 현대백화점은 지난달 19일부터 ‘더현대 글로벌’의 첫 정규 리테일숍을 열었다. 현대백화점이 일본에 정규 매장을 연 건 처음. 이 매장은 한국 브랜드를 바꿔 가면서 일정 기간 판매를 하는데 기자가 찾아간 날은 ‘트리밍버드’ 차례였다.
시부야는 인근 하라주쿠와 함께 10, 20대들이 특히 많이 찾는 쇼핑거리다. 하지만 백화점에 전시된 한국 브랜드의 가격은 젊은 세대들이 사기엔 다소 고가로 보였다. 상의 셔츠는 대략 2만 엔(약 19만 원)부터였고, 재킷은 5만 엔(약 47만 원)을 넘겼다.
아이돌 그룹 ‘엔하이픈’의 희승을 좋아하며 올해 스무 살이라는 한 일본 여성은 “케이팝을 좋아하다가 한국 패션도 좋아하게 됐다”며 “일본에는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느낌이 있어 사고 싶지만 가격이 약간 비싸다”고 했다. 하지만 오픈 기념으로 3만 엔(약 28만 원) 이상을 구입하면 무료로 제공됐던 ‘고양이 키링’은 모두 소진돼 있었다. 가격대가 있음에도 지갑을 연 일본 젊은이가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트리밍버드’의 현지 매장 직원은 “성수동에 가서 K패션의 매력에 빠진 사람들이 적지 않다. 직접 한국행 여행 경비를 내지 않고 옷을 살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면서 “온라인으로도 한국 옷을 살 순 있지만 ‘프리 사이즈’ 제품이 많다. 직접 입어봐야 느낌을 알 수 있기에 오프라인 매장을 찾는 고객이 많다”고 했다.
14일 일본 도쿄 시부야 파르코 백화점 4층에 위치한 한국 가방 브랜드 ‘오소이’의 단독 매장. 대형 거울 가운데에 ‘오소이’란 한글이 적혀 있다. 도쿄=황인찬 특파원 hic@donga.com
파르코 백화점에는 한국의 가방 브랜드인 ‘오소이’도 입점해 있다. 한국 브랜드가 일본에 단독 매장을 연 것은 이례적으로, 이곳 시부야 외에도 신주쿠에 매장이 있다. 현지 매장 직원은 “성수동 매장에 간 적이 있다면서 이곳을 찾는 고객이 많고, 일본인뿐만 아니라 중국인, 미국인도 오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 드라마나 영화에서 본 가방 사진을 들고 와서 이것하고 비슷한 것이 있냐고 묻는 손님도 있다”고 덧붙였다. 이 매장의 작은 클러치백은 4만 엔(약 38만 원) 전후로 10, 20대에겐 다소 부담스러운 가격이다. 이에 1만 엔(약 9만 원)가량인 액세서리만 사서 갖고 있던 가방에 다는 고객도 많다고 직원은 귀띔했다.
● 코로나19 팬데믹 거치며 폭발 성장한 ‘4차 한류’ K패션의 인기가 높아진 것은 단연 한류의 영향이 크다. 아이돌이 입은 옷이나 액세서리 등은 금세 매출이 훌쩍 뛴다. 지난해 3월부터 그룹 ‘아이브’가 착용한 ‘사각형 안경’은 일본 젊은이들의 관심을 끌었다. 안경전문점 JINS의 해당 제품은 지난해 5월 한 달 매출이 전년에 비해 3배 넘게 뛰었다고 니혼게이자이(닛케이)신문은 전했다.
일본 중고 쇼핑몰 사이트인 라쿠텐 라쿠마가 2023년 실시한 ‘패션을 참고하는 나라’와 관련된 설문에선 10∼40대와 60대 이상 여성에서 모두 한국이 1위로 꼽혔다. 특히 10대 여성에선 2016년 이후 8년 연속 한국이 1위였다.
일본에선 ‘4차 한류’가 이어지고 있다. 드라마 ‘겨울소나타’로 시작된 1차 한류, 소녀시대와 카라로 대표되는 2차 K팝 열풍, BTS로 상징되는 3차 한류를 지나 영화 ‘기생충’과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유행해 한국의 소비재 상품까지 각광받는 4차 한류 열기가 뜨겁다는 것. 특히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급성장한 넷플릭스 같은 주문형 콘텐츠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한류는 더욱 확산되고 있다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 신인 디자이너의 해외 진출도 탄력 일본 패션 시장은 한국의 2배 규모다. 이에 국내 시장에서 지속적인 성장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K패션 브랜드들이 일본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스태티스타는 일본 패션 시장 규모가 올해 506억3000만 달러(약 72조 원)에서 2030년 828억4000만 달러(약 118조 원)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KOTRA 일본지역본부에 따르면 일본 패션 시장에 진출한 한국의 신규 법인은 2023년 19개, 2024년 25개에서 올 상반기에만 29개로 늘었다. 특히 일본은 지리적으로 가까워 물류 비용이 적게 들고, 동남아보다 의류 단가가 높다는 장점도 크다.
무신사 같은 패션 플랫폼뿐만 아니라 현대백화점 등 국내 백화점들이 한국의 신진 브랜드를 앞세워 일본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고 있는 배경 중 하나로 꼽힌다. 한류를 앞세운 K패션의 성장 가능성이 높게 평가받자 지난해 여성 패션플랫폼 ‘에이블리’는 중국 알리바바그룹으로부터 1000억 원을 투자받기도 했다. 대형 플랫폼이 해외 투자를 받아 신진 브랜드를 해외에 진출시키는 새로운 구조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한국의 신인 디자이너들에게도 기회가 되고 있다.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인정받는다면 브랜드 론칭은 물론이고 해외 진출까지 돕는 유통 구조가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홍익대 섬유미술패션디자인과 재학 시절인 2022년 무신사의 지원 프로그램을 수료하고, 지난해 독자 브랜드인 ‘히에타’를 론칭한 주희연 디렉터(25)는 20대 중반에 일본 진출까지 이뤘다. 주 디렉터는 “통관, 현지 물류망 구촉, 반품 등의 문제 때문에 개인 브랜드는 독자적으로 해외 판매가 어려웠는데 무신사 같은 한국 플랫폼들이 해외 시장에 진출하며 신인 디자이너들에게 새로운 기회가 열리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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