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BR Case Study : 버버리의 디지털 혁명
Article at a Glance 영국을 대표하는 럭셔리 브랜드 버버리는 한때 지나친 라이선스 남발과 브랜드 전략의 부족으로 위기를 겪었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최고임원진은 디지털이라는 도구를 채택했다. 디지털로의 전환은 자연스레 밀레니얼세대를 최전선에서 공략하는 효과를 낳았다. 이들은 지금까지 경쟁자들이 상대적으로 소홀히 대했던 럭셔리 고객군 내의 ‘블루오션’이었다. 현재 버버리는 업의 본질이 ‘디지털 미디어 컴퍼니’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디지털은 태양이고, 이를 중심으로 회사의 모든 일을 결정한다. 160년 전통의 ‘올드컴퍼니’에서 밀레니얼세대에 가장 소구하는 ‘영 컴퍼니’로 거듭난 버버리의 경영 비결은 아래와 같다.
1) 브랜드 구조의 단순 집중화를 통한 정체성 강화 2) 아이코닉 제품 부활을 통한 브랜드 특유의 기운 창출 3) 자기 브랜드에 몰입된 직원들을 브랜드 앰버서더로 활용 4) 밀레니얼 타기팅을 통해 전통 명가에 젊음의 코드를 주입 |
편집자주
이 기사의 제작에는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인턴연구원 손지현(이화여대 경영학과 4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기사에 인용된 사진은 모두 버버리가 제공했습니다.
2012년 4월26일. 기자는 대만 타이페이 신인프라자에서 열린 디지털쇼, ‘버버리 월드 라이브’에 초대됐다. 아시아 전역에서 초대된 기자들과 VIP들은 행사 관계자들의 안내에 따라 어둠상자처럼 생긴 쇼장 안으로 들어섰다. 쇼장 안의 풍경은 기존 패션쇼와는 사뭇 달랐다. 캣워크를 따라 그 주변에 쇼를 감상할 수 있는 의자들이 나란히 배치되는 전형적인 모습이 아니었다. 일단 무대가 없었다. 대신 고개를 조금 들어 올려다봐야 하는 각도의 벽면에 360도로 빙 둘러 대형 스크린이 설치됐다. 의자도 없었다. 쇼 참가자들은 오로지 두 발로 서서 벽면 속 영상을 지켜보며 서서히 분위기에 압도되기 시작했다. 드디어 가슴을 뛰게 할 만큼 커다란 음악이 흐르고, 버버리의 트렌치코트와 우산, 그리고 최신 컬렉션을 입은 모델들이 몽환적인 이미지로 연출된 스크린 위로 하나둘 등장했다.
빠른 비트의 음악 때문인지, 모델들의 활기찬 워킹 때문인지, 가상현실을 체험하는 듯한 묘한 기분 때문인지 판단할 새도 없이 쇼는 스피디하게 진행됐다. 클라이맥스에 다다르자 단풍잎 모양의 금박지가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스크린 안에서도 금박지가 쏟아져 내렸기에 이것이 스크린 속 장면인지, 실제 내 머리 위로 떨어지는 것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당시 기사는 이렇게 기록됐다.
“피지컬(physical)과 디지털(digital)을 교란하는 것은 버버리가 의도한 오감만족도의 취지다. 정보기술(IT)의 진화와 동행하는 버버리에서 실제와 가상의 구분은 더는 의미가 없어 보였다.”1
버버리는 그 후 4년이 흐르는 동안 이미 다른 경쟁자들보다 좀 더 잰걸음으로 디지털 세계로 진입했다. 사이트 및 온라인 판매 강화뿐 아니라 브랜드 철학에까지 디지털 시대의 문법에 발을 맞추고 있다. 최근에는 약 6개월 뒤에 소비자들에게 판매할 옷을 미리 선보이는 패션위크의 룰을 깨고 패션쇼와 동시에 캣워크의 모델들이 입은 옷을 바로 구입할 수 있게 하는 혁신적인 시도를 시작했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글로벌 SNS 플랫폼뿐 아니라 카카오톡, 위챗 등 각 국가별로 활성화된 채널을 통해 활발한 디지털 마케팅을 벌인 덕에 20대 이하 젊은 소비자들에 가장 소구하는 브랜드라는 평가도 받고 있다. 태생적으로 배타적인 특성 탓에 여러 산업군 중에서도 IT와 관련된 혁신과는 가장 거리가 멀어 보이는 럭셔리 업계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혁신기업’이 탄생한 셈이다. 160년 전통의 역사 속에서 다양한 풍파를 겪는 동안 올드(old)한 브랜드란 이미지가 굳혀졌던 브랜드가 명품 업계가 주목하는 최첨단 브랜드로 거듭난 배경을 DBR이 분석했다.
버버리의 아이코닉 제품, 트렌치코트를 만드는 장인의 모습
브랜드를 재정립하다
2006년 7월, 버버리의 최고경영자(CEO)로 취임한 안젤라 아렌츠 전 사장2 은 첫 임원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전 세계에서 몰려든 임원들의 옷차림을 보자마자 뭔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습하고 으슬으슬해 트렌치코트를 입기에 딱 좋은 날씨였는데도 60여 명의 임원 중 이 코트를 입고 나타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직원 할인 혜택으로 좀 더 쉽게 살 수 있는 옷을 임원들마저 입지 않는 마당에 어떻게 고객들에게 트렌치코트를 팔 것인가. 이것이 그가 품게 된 고민의 출발점이 됐다.3
당시 명품 시장은 너도나도 전 세계적으로 매장을 확대하면서 빠른 성장세를 기록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버버리는 매년 평균 2%씩 성장하는 거북이걸음을 이어가는 데 그쳤다. 각 대륙으로의 영토 확장에 힘입어 글로벌 인지도는 높아졌지만 이 과정에서 23개의 라이선스가 남발됐다.
매출 비중이 높은 일부 국가에선 해당 국가에서 잘 팔리는 제품을 자체 생산해 판매할 수 있게 했기에 브랜드 간 통일성을 느낄 수 없었다. 즉 미국인이 느끼는 버버리의 이미지와 중국인이 느끼는 버버리에 대한 인식이 달랐다. 또 남성복과 여성복 등 카테고리별로 각기 다른 총괄 디자인 책임자가 있고 홍콩에는 아시아인을 위한 디자인 사무실이 따로 있었다. 럭셔리 브랜드의 기본인 ‘통일된 아이덴티티’가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버버리는 이전 CEO인 또 한 명의 미국 여성, 로즈 마리 브라보4 에 의해 럭셔리 브랜드로서의 위상을 그나마 많이 회복한 상황이었다. 1997년 취임해 2006년까지 만 10년을 근무하면서 브라보는 각 국가별로 남발한 라이선스를 정리하고 시장별 디자인, 가격 격차를 줄이기 위해 노력했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2000년 2억3000만 파운드였던 매출이 2006년 7억4000만 파운드로 3배 이상 늘었다. 수익 개선에 힘입어 2002년 7월, 영국 증권시장에서 성공적으로 기업공개(IPO)를 단행할 수 있었다.5
제품군 역시 지나치게 다양했다. 예컨대 런던 본드스트리트에 있는 매장에서는 킬트(kilt)6 를 팔았고 애견 산책용 목줄도 팔았다. 제품군이 다양한 것은 좋았지만 뚜렷한 타깃 고객군을 설정하지 않은 탓에 브랜드 특유의 배타성(exclusiveness)이 희석돼 있었다.
이 브랜드의 핵심 제품이라 할 수 있는 버버리 코트는 미국 뉴저지와 이탈리아, 독일 등의 공장에서 영국 내 소비자 가격의 절반에 판매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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