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리버 턴어라운드
Article at a Glance – 전략, 혁신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MP3플레이어로 ‘국민가전’ 신화를 쓴 아이리버는 아이폰을 필두로 한 추격자들에 밀려 한동안 존재감을 잃었다. 새 경영진과 함께 ‘아이리버의 DNA’를 떠올리던 아이리버는 소리에서 업의 본질을 찾기로 했다. 이때부터 디지털 기술을 뛰어넘는 아날로그적 사고의 전환이 시작됐고, 음악을 듣고 눈물을 흘릴 만큼 감동을 일으키고자 한 ‘티어드랍(teardrop)’ 프로젝트는 불과 3년 만에 ‘고음질 포터블 오디오’로 결실을 맺었다.
성공요인 및 시사점 1. 어렵고 힘든 상황일수록 경쟁자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창조적 혁신의 기회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 2. 아날로그+디지털에 인간 중심의 창조적 사고를 더하는 등 정반대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두 가지를 결합하는 창조적 사고를 한다. 3. 쉽게 도달할 수 없는 목표를 설정해 기존 프로세스를 바꿀 수 있는 혁신의 발판을 마련한다. 4. 세계 최고의 기업들과 적극적인 개방적 협력관계를 유지, 활용한다. |
편집자주
이 기사의 제작에는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인턴연구원 손혜령(다트머스대 경제학과 4학년) 씨와 유준수(서강대 경영학과 4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보스턴에서 싹튼 새 기적
2011년 5월, 구글북스 개발팀 본부가 자리 잡은 미국 보스턴 메사추세츠공대(MIT) 인근의 한 호텔. 정석원 마케팅실장(상무)을 비롯한 40여 명의 아이리버 직원들의 침소는 오늘도 객실이 아닌 호텔 1층 콘퍼런스룸이었다.
일주일에 3번은 기본. 두 달 남짓 계속된 밤샘 투혼 끝에 영혼은 날로 피폐해져갔다. 호텔에서 조금만 걸어 나가면 보스턴 중심을 가로지르는 찰스 강을 만날 수 있었다. 이맘때 쯤 찰스 강은 봄볕에 반짝이며 맑은 물결소리를 낼 터였다. 그러나 당시 아이리버 직원들에게 낭만 따위는 즐길 틈조차 없었다. 매일 새벽, 물끄러미 고개를 들면 만날 수 있던 새벽별이 오히려 친구처럼 느껴졌다. 보스턴은 이들에게 ‘달콤한 낭만’이 아닌 ‘매서운 현실’의 도시로 기억됐다.
1년여를 시도한 끝에 마침 내 뚫은 구글의 빗장 앞에서 사운(社運)을 건 도전을 시도하던 때였다. 아이리버는 ‘스토리’라는 전자책 단말기를 제작하면서 구글과 함께 일할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막상 시제품을 제작해 구글북스 관계자 앞에 들이민 순간, 이들은 갑자기 난색을 표하기 시작했다. 구글이 기대했던 스펙이 당시 ‘스토리’의 개발 수준과 차이가 컸던 탓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출장길에 올랐던 정 상무의 마음이 무겁게 짓눌리기 시작했다. 곧바로 서울에 SOS를 쳤다.
“당장 현지에서 개발 보완작업을 진행해야 할 것 같습니다. 최대한 가능한 직원들을 끌어모아 보스턴으로 보내주세요.”
이렇게 서울 서초구 아이리버 본사에서 근무하던 엔지니어들과 아이리버와 LG디스플레이의 합작회사인 ‘L&I 일렉트로닉 테크놀로지’1 의 엔지니어 등 총 40여 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구글의 주문은 “전자책 서비스 내용을 보완해 제품 출시 예정일인 7월17일까지 적용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겠노라고 약속하고 돌아섰지만 사실상 쉽지 않은 과제임이 분명해보였다. 콘퍼런스룸 한 구석에 의자를 붙여놓고 쪽잠을 자던 엔지니어들은 하나둘 지쳐가기 시작했다. 신경이 날카로워지자 소리에 민감해졌다. 같은 테이블 옆자리에 앉은 동료가 치는 타자 소리, 볼펜 굴리는 소리마저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 무렵 헤드폰을 끼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방해받지 않고 자기 일에만 몰두하겠다는 무언의 시위였다. 그때 노트북으로 작업을 하던 한 엔지니어가 헤드폰을 바로 노트북에 연결하지 않고 손바닥만 한 기계에 꽂은 뒤 음악을 듣는 장면이 포착됐다.
정 상무가 물었다. “이 물건이 무엇이기에 굳이 연결해서 듣는 거지?”
그 엔지니어는 “노트북에 탑재된 사운드 카드가 좋지 않아 디지털 사운드를 아날로그로 전환시키는 PC용 DAC(Digital to Analogue Converter)을 따로 구입해 연결해서 듣고 있다”고 답했다. 그는 “이렇게 음악을 들으니 힐링이 되는 것 같다”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의 체험을 전해들은 엔지니어들이 삼삼오오 몰려들며 청음을 요청했다. 정 상무가 듣기에도 확실히 그냥 노트북에 연결해 듣는 디지털 음원과는 음질 자체가 달랐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면서 똑같은 제품을 주문하는 사람이 늘었다.
마침 한국에선 ‘나는 가수다’라는 음악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던 때였다. 업무에 지친 이들은 당대 최고의 가창력을 자랑하는 국내 가수들의 노래를 다운받아 이 기기를 통해 들었다. 현장에 실제로 있는 것만큼은 아니어도 그에 준하는 감동이 밀려왔다. 정 상무는 이 제품의 정체가 갑자기 궁금해졌다. 중국산에, 디자인 역시 볼품이 없었는데도 40만 원을 호가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이 제품의 ‘속살’에 호기심이 생긴 것은 다른 직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한번 뜯어보자”고 제안했다. 조심스레 ‘속살’을 열어본 결과, 구조는 깜짝 놀랄 정도로 단순하기 짝이 없었다. 실망스럽다는 탄식이 곳곳에서 들려왔다. “에이, 수십만 원짜리 제품인데 이게 다야? 우리도 만들 수 있겠다.”
사실 ‘궁극의 소리’에 대한 욕구는 아이리버의 DNA에 깊이 새겨져 있는 그 무엇이었다. 아이리버의 창업자인 양덕준 전(前) 레인콤2 사장은 늘 “궁극의 뮤직플레이어를 만들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기술적 한계로 휴대용 기기에서 하이파이 음을 구현하기는 어려웠고 아이디어를 구체화하지 못한 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음악을 통해 위로를 받으며 프로젝트는 속도를 내기 시작했고 그렇게 약속된 7월17일이 왔다. 미국 전역의 대형마트 타깃에서 ‘스토리HD’가 발매됐다. 책 300만 권을 무료로 볼 수 있는 놀라운 전자책이었다. 그러나 ‘스토리HD’는 아마존 ‘킨들’에 밀려 큰 빛을 보지 못했다. 킨들보다 해상도가 월등하게 좋은 제품이었지만 소비자는 기술력만으로 제품을 선택하진 않았다. 또 구글북스팀이 구글플레이팀으로 통합되면서 전자잉크 기반의 단말기보다는 영화, 음악 등을 재생할 수 있는 컬러화면 기반 태블릿으로 무게중심이 옮겨갔다. ‘제2의 기적’을 바랐던 아이리버 직원들은 크게 실망했다. 일부 직원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채 회사를 떠났다.
그때는 몰랐다. 진정한 ‘제2의 기적’을 시도할 다른 영역이 있었다는 사실을…. 새벽 밤을 환하게 밝혔던 보스턴 호텔 콘퍼런스홀 한 구석에서 그들도 몰랐던 새로운 싹이 움트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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