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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종 지방 헤어숍 화미주인터내셔날의 경쟁전략

공짜쿠폰•사랑인사•스타직원•가격홍보… “나는 상인이다” 미용실에 혁신 바람

이유종 | 160호 (2014년 9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 전략, HR, 마케팅

화미주인터내셔날의 성공요인

1. 중앙집중식 관리 시스템을 구축했다.

2. 엄격한 자체 교육, 승급 시스템을 운영했다.

3. 끊임없이 고객지향형 마케팅을 실시했다.

 

 

화미주인터내셔날은 부산과 울산, 경남 지역에서 미용실 39곳을 운영하는 미용 전문기업이다. 1983 11월 부산 중구 광복동에파리미용실이라는 간판으로 70평짜리 매장에서 직원 12명으로 출발했다. 하지만 파리미용실은 설립 초창기부터 적자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부산의 명동인 광복동은 임대료가 비쌌다. 직원 12명의 급여도 적지 않았다. 반경 400m 이내에는 미용실만 수십 개나 있었다. 경쟁이 매우 치열했다.

 

김영기 화미주인터내셔날 대표(54) 1986년 파리미용실에 총무로 합류하면서 상황이 돌변했다. 그는 전단지 배포, 할인 쿠폰 발행, 고객불만 사항 접수 등 마케팅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당시 미용실들은 적극적인 마케팅을 하지 않았다. 마케팅 덕에 미용실 매출액은 늘기 시작했다. 1991 10월 광복동 미용실의 면적을 이전보다 2배 이상 늘어난 200평으로 넓혔다. 당시 부산에서 미용실 규모가 가장 컸다. 1995 8월에는 부산 서면에 2호점을 시작으로 지점을 개설하기 시작했다. 2002 3월에는 자체 직원 교육시설인 화미주아카데미(104평 규모)를 열었다. 2004 6월에는 울산에도 진출했다. 2006 4 10호점을 돌파했고 매년 매장을 늘려 현재 부산, 울산, 경남 지역에서 39개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2008 12월에는 중소기업청에서 경영혁신형 중소기업으로 인증을 받았다. 지방 미용실에서 어엿한 성장형 중소기업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화미주는 전국적 브랜드를 갖춘 대형 미용실과 끈끈한 인간관계와 가격 경쟁력을 바탕으로 생존하고 있는 동네 미용실과의 경쟁에서 자칫 중간에 낀 어정쩡한 상태의 기업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을 극복하고 성공적으로 브랜드를 확장했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대부분의 업종에서 지방 시장은 서울에서 출발한 전국구 브랜드가 잠식하고 있다. 지역 브랜드는 어느 정도 성장을 하다 전국구 브랜드에 인수되는 사례도 많다. 소주, 백화점 등의 사례가 여기에 해당된다. 미용업계에서는 박승철헤어스투디오, 준오헤어, 박준뷰티랩, 이가자헤어비스 등 전국구 브랜드가 널리 알려져 있다. 또 동네마다 오랫동안 주민들과 함께 호흡하며 생존해온 동네 미용실도 여전히 강한 생명력을 갖고 있다. 하지만 부산, 울산, 경남(부울경)지역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부울경 지역에서는토종 프랜차이즈브랜드인 화미주가 여성 사이에서 브랜드 파워가 가장 강하다. 매장도 가장 많다. 그렇다고 해서 부울경 지역에 전국구 브랜드가 매장을 개설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전국구 브랜드는 인구 800만 명을 웃도는 부울경 지역을 꾸준하게 공략하고 있다. 하지만 화미주는 이런 치열한 경쟁에서도 독특한 생존방식으로 매년 20∼30%씩 성장하고 있다. 화미주의 전체 직원은 900여 명으로 지난해 400억 원 정도의 매출액을 기록했다. 현재 1년 이상 운영한 매장 중에서 적자를 내는 곳은 없다.

 

커피숍 주인에서 미용실 총무로

김영기 대표는 헤어디자이너 출신이 아니다. 그는 전형적인 상인이다.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17세부터 생활전선에 뛰어들었고 노점상, 냉동사, 농기계 수금원, 고추 중매인 등 30여 가지의 직업을 거치며 장사의 기본기를 몸으로 배웠다. 현장에서 익힌 상술을 미용실에 접목했고 미용 전문기업으로 키웠다. 김 대표는 1980년대 중반 부산의 명동인 광복동 일대에서 커피숍을 운영했다. 커피숍 운영은 쏠쏠했다. 그는 돈을 많이 제법 벌었다는 생각에 여기저기 자신의 성과를 자랑하고 다녔다. 그런데 한 지인으로부터당신이 하루에 버는 돈을 파마 몇 명만 하면 벌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화미주 광복본점 앞에선 김영기 대표

 

당시 커피숍 운영에는 한계가 있었다. 사람들이 밖에서 줄을 서서 기다릴 정도로 늘 고객으로 붐볐으나 사람들은 커피 한 잔을 마셔도 한두 시간 정도는 커피숍에서 머물렀다. 테이블 회전이 쉽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매출액이 늘지 않았다. 커피 값이 한잔에 700원 정도였는데 하루 200잔을 팔아야 봐야 매출은 15만 원 정도에 불과했다. 김 대표는 마케팅에 적극적이지 않은 미용실에 다양한 방법을 적용하면 승산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지인을 통해 적자에 시달리던 광복동의 파리미용실 원장을 만났고 자신의 커피숍을 정리한 뒤 1986 6월 미용실 총무로 입사했다. 그의 임무는 매출 증대였다. 원장은 매출액을 현재보다 10배 이상 늘리면 미용실을 넘겨준다고 약속했다. 그는 미용실 경영을 맡은 뒤 먼저 상호를 바꿨다. ‘파리미용실이라는 이름은 어감이 좋지 않았다. ‘파리가 날린다는 의미를 떠올릴 수도 있다. 파리미용실의 개업 초기 상호는빠리미용실이었다. 하지만 1984년 국어순화 정책에 따라빠리미용실의 간판이 표준어인파리미용실로 바뀌었다. ‘파리로 바뀐 상호는 어감이 제대로 살지 않았다. 김 대표는간판의 힘이 매우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흔한 이름보다는 세련된 이름이 장기적으로 상호에 적합하다고 여겼다. 파리미용실은아름다움이 고을로 퍼져 나간다는 뜻의화미주(和美州)’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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