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BR Case Study : 휴맥스 운영 혁신
편집자주
※ 이 기사의 제작에는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인턴연구원 박소연(서강대 사학과 4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디지털 셋톱박스 전문 업체인 휴맥스는 지난 2010년 매출액 1조 원(연결 재무제표 기준)을 돌파한 ‘벤처 1세대’ 기업이다. 사업 초창기부터 해외 시장을 겨냥한 결과, 현재 전 세계 80여 개 국에 ‘휴맥스’라는 고유 브랜드로 제품을 공급하고 있다. 심지어 북한에도 필립스를 통해 휴맥스 제품이 들어갈 정도다. 1989년 2월, 서울대 제어계측과 박사과정을 갓 졸업한 변대규 대표가 대학원 동료 및 후배 6명과 함께 서울시 봉천동 낙성대 입구에 작은 사무실을 얻어 창업(옛 건인시스템)한 지 21년 만에 이룬 결과다. 1990년대 벤처 붐을 주도했던 1세대 벤처기업 중 지금까지 생존해 있는 기업 자체가 얼마 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눈부신 성과다.
지금은 어엿한 중견기업으로 성장한 휴맥스지만 그간 수차례 위기도 많았다. 사업 초기 2년간 공들여 개발한 장비는 시장성이 없어 그대로 폐기 처분해야 했다. 우연찮게 노래방 기계에 자막을 넣어주는 기술로 돈을 벌어 셋톱박스 개발에 나섰지만 수출 대상 방송국이던 유럽의 대형 방송사가 합병당해 하루아침에 시장을 잃은 적도 있다. 철저하게 기술력에 집중하고 해외시장 공략에 매진해 1997년 이후 승승장구하나 싶더니 곧이어 성장 정체의 벽에 갇혀버렸다. 2001년 이후 내리 4년간 매출액 3000억 원대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제자리걸음을 쳤다. 2001년 무려 1000억 원이 넘던 영업이익은 2004년 42억 원으로 곤두박질치기까지 했다. 하지만 휴맥스는 혁신실을 설치하고 전사적인 프로세스 개선에 나서는 등 각고의 노력 끝에 성장 정체의 늪에서 빠져 나와 1조 벤처기업의 신화를 이룩했다. 중소기업에서 중견기업으로의 도약을 위한 ‘성장통’을 성공적으로 극복해 낸 휴맥스의 운영 혁신 사례에 대해 DBR이 집중 분석했다.
혁신만 전담하는 조직을 세우다
“바빠 죽겠는데 또 무슨 혁신이야?”
2004년 12월 휴맥스에 혁신실이 생겼을 때 대부분 직원들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당시 회사는 4년째 계속된 매출 정체에서 벗어나기 위한 다양한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었다. 특히 계속 추락해가는 영업이익을 높이기 위해 여러 비용절감 프로젝트를 추진하다 보니 직원들, 특히 개발자들의 스트레스와 피로도는 극도로 높아져 있는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아예 혁신만 전담하는 조직을 만든다고 하니, 쓸데없이 가외 업무만 늘어나는 건 아닌지 걱정하는 직원들이 많았다. 가뜩이나 일도 많아 힘든 마당에 프로그램을 짜고 제품을 개발할 인력을 한 사람이라도 충원해주지는 못할 망정 손에 잘 잡히지도 않는 ‘혁신’을 추진하겠다며 전담 인원을 4명이나 배치한 회사의 결정에 못마땅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변대규 대표의 생각은 달랐다. 무엇이든 중요한 일을 하기 위해선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오직 그것만 맡아 고민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혁신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휴맥스는 1997년 142억 원에 불과했던 매출액(개별 재무제표 기준)이 1998년 284억 원, 1999년 541억 원, 2000년 1426억 원, 2001년 3151억 원을 기록하는 등 해마다 약 두 배 이상씩 가파르게 성장했다. 하지만 몸집이 커진 것에 비해 내부 운영 수준은 사업 초창기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자재 결품, 생산 계획 변경, 생산 도중 불량 발생 등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공장이 멈춰 섰다. 자재를 잘못 발주해 재고 과잉이 되기 다반사였다. 장부에 기록된 부품 재고는 1000개인데 실제로는 100개밖에 없어 기계가 돌아가려는 찰나 생산 계획을 바꾸는 일도 허다했다. 누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프로젝트의 진행 상황은 어떤지, 제때 납품은 가능한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창업 초기에 가졌던 열정과 패기만으로는 조직을 운영하기 힘들 정도로 회사가 커졌지만 그에 걸맞은 내부 시스템을 체계화하지 못해 발생한 문제들이었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회사 전반적으로 퍼져 있는 안이한 대처 의식이었다. 뭔가 잘못돼 가고 있다는 걸 모두가 인식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일이 터지면 “바빠서 그랬다”는 핑계가 통했다. 즉, 실수를 해 놓고도 “바빠서 그만…”이라고 하면 “그래, 바빠서 그랬으니 어쩔 수 없지”라며 양해해 줬다. 회사는 문제가 발생한 원인을 제대로 분석하지 않았고 잘못을 저지른 사람도 자신의 실수에 대한 반성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당장 자신의 코앞에 닥친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으로도 바빴기 때문에 업무 방식의 체계적 개선을 통해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다행히 매출이 워낙 좋아 수십억 원의 손실쯤은 쉽게 묻혀졌다. 혁신실을 설치한 이듬해인 2005년엔 ‘마의 벽’인 3000억 원대 매출액을 돌파해 6495억 원의 매출액(연결 재무제표 기준)을 올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건 순전히 시장이 호황을 이뤘기 때문이었다. 내부 비효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해 당시 한 해 불용 재고로 버리는 돈만 100억 원을 넘어서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시장 매출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회사는 재기 불능 상태로 치달을 수도 있다는 게 변 대표의 판단이었다. 매출로 비효율의 비용을 충당하며 영업이익을 깎아먹던 시절, 운영의 효율성을 어떻게 확보하느냐에 따라 장차 회사의 운명이 갈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혁신만 전담할 부서를 따로 설치한 배경이기도 했다.
회원 가입만 해도, DBR 월정액 서비스 첫 달 무료!
15,000여 건의 DBR 콘텐츠를 무제한으로 이용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