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회원가입|고객센터
Top
검색버튼 메뉴버튼

Fable Mangement

“내가 다 안다” 혁신 막는 꼰대 리더십

박영규 | 302호 (2020년 8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장자를 혁신적으로 만든 건 ‘유지(有知)’가 아니라 ‘무지(無知)’였다. 우주의 신비를 몰랐기 때문에 대붕을 상상했고, 인간과 사물의 본질을 몰랐기 때문에 호접몽을 떠올렸다. 무지의 혁명은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적용된다. 특히 무지에는 개개인의 신념과 생각을 내려놓는 행위뿐만 아니라 집단을 둘러싼 문화적, 학문적, 정치적 편견과 편향으로부터의 탈피도 포함된다. 조직을 이끄는 리더 가운데 가장 위험한 사람은 “옛날에 내가 해봐서 다 안다”며 조직원들의 말을 가로막고 나서는 꼰대 스타일의 리더다. 장자의 말처럼 나의 지식과 견해, 신념을 모두 내려놓고 제로베이스로 만들어야 조직원들의 혁신적 사고를 이끌어낼 수 있다.



107


유발 하라리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문제적 지식인 중 한 사람이다. 그의 대표작인 『사피엔스』와 『호모 데우스』의 골간을 지탱하고 있는 사상적 기반은 다윈의 진화론이다. 신(God)을 뜻하는 그리스어 데우스(Deus)를 책 제목에 사용하고 있지만 초월적 존재인 신(神)이 아니라 호모 사피엔스에서 진화한 신(新)인류를 가리키는 말이다.

7만 년 전까지만 해도 인간은 다른 동물과 구별이 안 되는 평범한 존재였다. 신체적 여건으로만 보면 사자나 코끼리, 하마와 같은 덩치 큰 동물들보다 생존 경쟁에서 불리했다. 그랬던 인간이 다른 종(種)들을 모두 제압하고 그들 위에 군림할 수 있게 된 요인은 뭘까?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와 『호모 데우스』는 문명사적인 관점에서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추적하고 있다.

그가 제시하는 몇 가지 답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혁신이라는 키워드다. 한때 호모 사피엔스와 주도권을 놓고 경쟁했던 네안데르탈인과 비교하면 쉽게 이해된다. 네안데르탈인은 혁신에 실패했다. 네안데르탈인이 사용했던 도구는 그들이 문명사에 등장했던 10만 년 전이나, 그 무대에서 퇴출됐던 4만 년 전이나 변한 것이 없었다. 투박한 돌도끼 수준의 도구는 전혀 진전된 게 없었다. 네안데르탈인은 6만 년 동안 제자리걸음을 했다.

이에 비해 호모 사피엔스는 뛰어난 혁신 능력을 선보였다. 사냥감을 포획하기 위해 호모 사피엔스가 이용한 도구는 뾰족한 돌도끼, 작살, 창, 낚시 바늘 등으로 품종이 다양화됐고 성능도 계속 업그레이드됐다. 호모 사피엔스의 혁신 능력은 농업혁명과 문자의 발견으로 이어졌고, 근대 과학혁명으로 그 정점을 찍었다.

유발 하라리는 근대 과학혁명을 무지(無知)의 혁명이라고 표현한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인간의 고백이 바로 근대 과학혁명을 탄생시킨 원동력이라고 말한다. 뉴턴이 우주의 이치를 알았더라면, 다윈이 생명의 기원을 알았더라면 근대 과학혁명은 태어나지 못했다. 몰랐기 때문에 그들은 관찰했고, 탐험했다.

장자의 혁신적 사고도 무지에서 출발한다. ‘응제왕’ 편의 다음 우화를 보자.

“어느 날 설결이 세상사의 이치에 대해 왕예에게 물었다. 왕예는 모른다고 답했다. 설결은 또다시 물었다. 이번에도 왕예는 모른다고 답했다. 설결은 세 번, 네 번 거듭해서 물었다. 그렇지만 왕예는 여전히 모른다고 말했다. 왕예의 대답을 들은 후 설결은 크게 기뻐했다. (齧缺問於王倪(설결문어왕예), 四問而四不知(사문이사부지), 齧缺因躍而大喜(설결인약이대희)”

- 『장자』 ‘응제왕’ 편

설결이 물었을 때 왕예가 주저리주저리 대답을 했더라면 설결은 크게 기뻐하지(大喜)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아는 것이 병”이라며 핀잔을 줬을지도 모른다. 유교에서 말하는 인의(仁義)나 예지(禮智) 따위의 기성 지식을 들먹이면서 자신을 과시하는 행위는 혁신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장자의 생각이다. 장자는 세상 이치를 다 아는 것처럼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는 것을 “모기로 하여금 산을 지게 하는 것(使蚊負山, 사문부산)”과 같은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지식이 자신의 주인 노릇을 하지 않게 하라(無爲知主, 무위지주)”고 경고한다.

사물의 본질뿐만 아니라 우주의 기원에 대해서도 장자는 기본적으로 모른다는 관점을 견지한다.

“운장이 홍몽(鴻濛, 우주 탄생 이전의 혼돈상태를 의인화한 것)에게 물었다. 홍몽은 ‘나는 모른다(吾不知)’ ‘나는 모른다(吾不知)’며 거듭 손사래를 쳤다.”

- 『장자』 ‘재유’ 편

왕예나 홍몽은 『장자』의 우화 속에 등장하는 신인(神人)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유발 하라리식 용어로 바꾸면 무지의 혁명을 선도한 전사들이다.

장자는 혁신의 아이콘이다. 상식을 뒤집는 혁신적 사고로 빅데이터와 우주선에 해당하는 대붕(大鵬)을 창조했고, 쓸모없어 버림받았던 큰 박을 초호화 유람선으로 개조했다. 나비의 꿈으로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융합혁명, 양자혁명을 예견했고, 좌망(坐忘) 사상으로 캄테크(Calm-Tech)가 만들어낼 미래의 낙원을 일찌감치 내다봤다. 장자를 혁신적으로 만든 건 ‘유지(有知)’가 아니라 ‘무지(無知)’였다. 우주의 신비를 몰랐기 때문에 대붕을 상상했고, 인간과 사물의 본질을 몰랐기 때문에 호접몽을 떠올렸다. 기성 지식에 얽매였더라면 큰 박의 용도 변경이라는 신사고가 머리를 스쳐 갈 수 없었을 것이다. 장자에게 좌망(坐忘)은 지식을 쌓기 위한 수양이 아니라 그것을 버리고 비우기 위한 수양이었다.

무지의 혁명은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적용된다. 유발 하라리는 호모 사피엔스에게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머릿속에 든 지식과 정보를 모두 내려놓으라고 말한다. 그리고 데이터에 최종적인 의사결정을 맡기라고 권유한다. 그렇게 무지를 인정하고 데이터를 종교처럼 신봉하면 신과 같은 수준의 인간, 즉 호모 데우스로 업그레이드될 것이라고 말한다. 미래의 인류는 데이터교를 떠받드는 호모 데우스와 자신을 믿는 기존의 호모 사피엔스로 분화된다는 것이 유발 하라리의 진단이다.

경쟁의 결과는 뻔하다. 유발 하라리는 영화 ‘스타트렉’의 데이터 소령을 예로 든다. 미지의 문명을 찾아 우주를 항해하는 엔터프라이즈호의 안전을 위해 가장 필요한 존재는 생물학적 인간인 커크 함장이 아니라 인공지능인 데이터 소령이다. 승무원들은 데이터 소령의 판단을 금과옥조처럼 믿고 따른다. 그의 존재감은 인간 승무원들의 존재감을 훌쩍 뛰어넘는다.

인간들은 데이터 소령을 분해해서 설계도를 면밀하게 검토한 후 그와 똑같은 사람(인공지능)을 하나 더 만들어야 한다고 아우성을 친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데이터는 인간의 종교이자 우상이다. 유발 하라리의 주장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대목도 없지 않다. 하지만 4차 산업혁명의 도도한 흐름 속에 내재돼 있는 힘을 감안하면 그의 주장을 무작정 내치기도 어렵다. 아직은 제대로 알 수 없고 제대로 볼 수 없지만 데이터를 신으로 떠받들면서 사는 세상이 단순한 공상과학 영화 속 이야기만은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미래를 살아가는 호모 데우스들의 기도문 앞줄에는 “오! 신이시여”가 아니라 “오! 데이터시여”가 붙을 수도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는 지식과 정보의 발견, 축적, 폐기 속도가 그 어느 때보다 빨라진다. 양자컴퓨터가 상용화되면 그 속도가 번개처럼 빨라질 수도 있다. 이런 속도에 적응하려면 조직의 의사결정 패러다임을 혁신적으로 바꿔야 한다. 장자는 집단의 구성원들이 다 같이 무지하다는 전제에서 출발할 때 혁신이 가능하다며 의사결정 과정에서는 사고 체계를 최대한 단순화시키라고 말한다.

“너와 나, 우리들 모두가 모른다고 해야 참된 덕이 떠나지 않으니 이를 일러 단순명쾌함이라 한다. (同乎無知(동호무지), 其德不離(기덕불리), 是謂素樸(시위소박)”

- 『장자』 ‘마제’ 편

모두의 무지(無知)에는 개개인의 신념과 생각을 내려놓는 행위뿐만 아니라 집단을 둘러싼 문화적, 학문적, 정치적 편견과 편향으로부터의 탈피도 포함된다. 조직을 이끄는 리더 가운데 가장 위험한 사람은 “옛날에 내가 해봐서 다 안다”며 조직원들의 말을 가로막고 나서는 꼰대 스타일의 리더다. 장자의 말처럼 나의 지식과 견해, 신념을 모두 내려놓고 제로베이스로 만들어야 조직원들의 혁신적 사고를 이끌어낼 수 있다.

『장자』 ‘재유’편에는 “많이 아는 것은 실패의 지름길이다(多知爲敗, 다지위패)”라는 구절이 나온다. 지식과 정보가 홍수를 이루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기업을 이끄는 최고경영자(CEO)들이 각별히 새겨야 할 금언이다. 모래를 가득 채운 항아리에는 굵은 돌을 넣을 수 없듯이 자잘한 지식으로 가득 찬 머릿속에는 큰 생각이 들어올 수 없다.
  • 박영규 | 인문학자

    필자는 서울대 사회교육학과와 동 대학원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중앙대에서 정치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승강기대 총장과 한서대 대우 교수, 중부대 초빙 교수 등을 지냈다. 동서양의 고전을 현대적 감각과 트렌드에 맞게 재해석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다. 저서에 『다시, 논어』 『욕심이 차오를 때 노자를 만나다』 『존재의 제자리 찾기; 청춘을 위한 현상학 강의』 『그리스, 인문학의 옴파로스』 『주역으로 조선왕조실록을 읽다』 『실리콘밸리로 간 노자』 등이 있다.
    chamnet21@hanmail.net
    이 필자의 다른 기사 보기
인기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