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R3. 세종의 '혁신'과 국가 R&D

유교 존중하며 과학 기술로 부국강병
세종은 우리에게 환경 탓 말라 하네

254호 (2018년 8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우리가 쉽게 오해하는 것과 달리 ‘유학과 혁신’ ‘유교와 과학기술’은 친화성이 없는 개념이 아니다. 중요한 건 국가 건립 이념이 무엇이었느냐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 국가 건립의 이념과 매칭하면서 당대의 과제를 해결하고, 혁신과 기술 발전을 정당화하며, R&D 전략을 짤 수 있는 리더의 의지다. 그런 면에서 세종은 혁신의 의지를 가진 리더였다. 세종은 조선에서 ‘수성기의 임금’으로 치세를 시작한 최초의 왕이었다. 그의 앞에는 ‘부국강병’이라는 지상과제가 놓여 있었다. ‘부국’의 핵심은 ‘농업 진흥’이었고 이는 농사기술 개발과 보급 이외에 농업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기후의 예측과 날짜 계산을 위한 역법과 천문학의 발달을 필요로 했다. 그것도 중국의 시간과 중국의 기후와는 다른 조선의 시간과 조선의 기후를 바탕으로 한 학문이어야 했다. 세종은 바로 이걸 추진했고 성공했다. 또한 ‘강병’의 핵심 전략으로 ‘무기 체계 개편과 화약총포 개발/개량’을 내걸었고 이를 강력하게 추진했다. 정확한 문제 인식, 엄밀한 목표 설정, 철저한 사후 관리까지 해냈다.

‘유학과 혁신’ 혹은 ‘유교와 과학’이라는 어색한(?) 조합
‘옛 성현’의 말씀을 지침으로 삼아 정신을 수양하고, 자신과 가정을 돌보며, 국가와 백성을 올바르게 이끄는 ‘유학’의 특성과 ‘과학기술 혁신’은 쉽게 연결되지 않을 수도 있다. 자연과의 조화와 질서를 중시하는 유교에서 자연을 ‘개척’하고 ‘변용’하는 과학기술의 발전도 ‘찰떡궁합’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분명 유학에 정통한 신진 사대부와 그들만큼, 혹은 그 이상 유교 경전에 능통했던 세종 시대에 조선 최고의 혁신과 과학기술 발전이 이뤄졌다. 천문기술, 무기기술, 농업기술이 발달했고 훈민정음이 창제됐다. 그렇다면 유학과 혁신, 유교와 과학기술에는 최소한 ‘선택적 친화성’이 존재했다고 봐야 한다. 도대체 어떤 친화성이 있었고, 세종 시대의 조선은 왜 혁신해야 했고, 과학기술을 발전시켜야 했을까? 그리고 어떻게 했을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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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이 집권했던 당시는 아직 조선이 건국된 지 30여 년밖에 되지 않았던 때로, 여전히 ‘조선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갈 수 있을 것인가’가 화두였을 정도로 불안한 상황이었다. 태종 이방원이 어느 정도 왕권을 강하게 확립해놓긴 했지만 대외적인 정세 불안과 기근으로 인한 식량 부족, 고려 말부터 이어진 사회 혼란상 등 해결해야 할 수많은 난제가 세종과 신하들 앞에 놓여 있었다. 당시 서운관 2 에서 올린 문헌을 보면 국가를 안정화하기 위한 조건으로 국가재정의 확충과 군대의 정비를 통한 ‘부국강병’을 지상과제로 내걸고 있다. 당시 부국의 핵심 산업은 당연히 ‘농업’이 될 수밖에 없었고, 농업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농사기술을 정리하고 농사 도구와 기술을 발전시켜야 했다. 기후와 날씨 영향을 크게 받는 농업 특성상 다양한 천문현상을 예측하고 정확하게 절기 변화를 인식해야 했기에 천문학과 역법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노동력을 질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의료체계 개선이 필요했기에 의학서적을 출간해야 했고, 노동력의 손실을 최소화하면서 당시 원·명 교체기의 불안정한 정세와 여진족과 왜적 약탈에 대비해야 했기에 ‘무기 제조와 개발’에 투자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조선에 주어진 조건 자체가 다양한 종류의 ‘과학과 기술 혁신’을 강제하고 있었다는 의미다. 아무리 주변 여건이 국가 차원의 혁신과 R&D를 요구하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국가의 설립이념의 토대가 되는 유학과 주자학이 이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하지 않았다면 이를 쉽게 추진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분명 유학과 주자학에서는 ‘경천근민(하늘을 공경하고 삼가 백성들의 일에 힘쓴다)’의 이념이 중심에 존재했고 이는 ‘역법과 천문학 연구, 농사기술과 과학기술 발전’을 추구하는 것을 정당화했다.

이처럼 흔히 오해하듯 ‘유학과 혁신’ ‘유교와 과학기술’은 친화성이 없는 개념이 아니었다. 중요한 건 실제 국가 건립의 이념이 무엇이었느냐가 아니라 그 국가 건립의 이념과 매칭하면서 당대의 과제를 해결하고, 혁신과 기술 발전을 정당화하며, R&D 전략을 짤 수 있는 리더의 의지다. 그런 면에서 세종은 대내외적 어려움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혁신과 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해 극복 가능한 그 무엇으로 봤다. 기업인들이 모든 것이 급변하고 있는 지금 세종의 혁신, 세종의 R&D 전략을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다.

조선과 중국의 과학기술 분야를 연구한 세계적인 학자인 영국의 조지프 니덤은 그의 저서 『조선의 서운관: 조선의 천문의기와 시계에 관한 기록』에서 “세종은 문화와 학문의 후원자였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과학과 기술에 대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고 강조한다. 심지어 새로운 천문의기를 제작하라고 명령만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연구에 관여했다고 주장한다. 사실 수많은 자연과학과 기술 분야는 물론 훈민정음의 창제에도 세종대왕이 직접 참여한 것은 너무나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조지프 니덤은 천문학을 중국으로부터 배우고 중국을 능가했던 동아시아 국가는 조선뿐이라고 설명한다. 그만큼 세종 때의 천문학 수준이 높았다는 뜻이다. 천문학뿐만 아니라 인쇄술과 군사기술도 세계적인 수준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이러한 세종 시대의 과학발전과 혁신에 대해서는 철저한 고증으로 유명한 역사 기반 시뮬레이션 게임에서도 세종을 ‘과학 덕후’ 군주로 다뤘는데, 얼마나 능력치를 높게 줬는지 세종의 ‘과학 능력’을 잘 활용하면 르네상스 시대에 다른 문명과 달리 폭격기를 만들 수 있을 정도다. (DBR minibox: ‘게임 속의 세종’ 참고.)

DBR minibox I : 게임 속의 세종

한국에서 가장 인기 높은 왕, 현재의 민족 정체성에 한글 창제라는 업적을 바탕으로 가장 큰 기여를 이룩한 왕. 이런 세종의 이야기는 그러나 의외로 현대 매체에서 자주 다뤄지는 소재는 아니다. 이는 일종의 아이러니인데 워낙 강력하고 안정적인 치세를 구가했던 세종이었기에 조선시대를 다루는 사극에서도 별다른 암투를 그려내거나 대단한 권력 갈등을 나타내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냥 ‘세종이 잘했다’ 정도로밖에 요약되지 않는 그의 치세는 드라마틱한 맛은 없기에 사극과 같은 영역에서는 자주 채택되지 않는 편이다. ‘뿌리 깊은 나무’처럼 한글 창제에 얽힌 찬반 비화를 바탕으로 한 픽션 사극 정도가 그나마 이름을 알리는 정도다.

별다른 갈등 요소가 없는 천재적인 학구파 군주의 업적이 유의미하게 드러나는 매체로는 오히려 게임을 꼽을 수 있다. 단지 조선이라는 동아시아사의 틀 안을 벗어나 좀 더 국제적인 입장을 다루게 되는 게임 속의 군주들 중에서 세종의 업적은 세계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슈퍼 히어로들이 총출동하는 영화 ‘어벤저스’처럼 세계 각국의 위대한 군주들이 총출동하는 몇몇 역사 기반의 게임 속에서 특히 세종은 한국을 대표하는 군주로 자주 등장하며, 또 그 안에서도 결코 빛이 바래지 않는 위엄을 자랑하곤 한다.

과학군주의 위엄 – 도미네이션즈, 유로파 유니버설리스
모바일 네트워크 게임 ‘도미네이션즈’는 플레이어가 각각 자신의 국가를 선택한 뒤 해당 국가를 석기시대부터 시작해 천천히 진보시켜 나가면서 영토를 관리하고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전략 게임이다. 천천히 레벨업을 해나가다 보면 대학 건물을 지을 수 있게 되는데 대학이 완공되면 그 안에서 실제 역사 속에 존재했던 여러 인물을 영입하고 능력치를 개발해 자신의 영토에 반영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세종은 게임 안에서 주로 과학, 학문, 연구 계통의 어드밴티지를 제공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각종 기술을 연구 개발하는 도서관에서 군사기술 연구에 들어가는 자원이 상대적으로 줄어드는 보너스와 기술연구에 필요한 투입 인력을 줄여주는 보너스 등이 해당한다. 실제 세종 대에 이뤄진 여러 군사 기술의 진보와 함께 세종 대의 아이덴티티인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학문 정진을 반영한 연구 중심의 인물로 세종은 모습을 드러낸다.

전 세계의 정치 세력들이 세계 지도 안에서 경합하는 대전략 게임 ‘유로파 유니버설리스’ 시리즈에 등장하는 세종은 약간의 부침을 겪기도 했다. 게임 제목부터 유럽 중심의 세계 제패 게임임이 묻어나는 ‘유로파 유니버설리스’는 3편부터는 비유럽권 국가들도 비중을 높여가며 플레이 가능한 세력이 되는데 조선의 경우 워낙 좁은 영토와 빈약한 생산력 덕에 늘 플레이가 쉽지 않은 세력으로 등장한다. 3편의 조선 군주로 등장하는 세종은 우리의 기대와 달리 그리 좋은 캐릭터 능력치를 갖고 있지 못한데 유럽을 다루던 게임이 아시아로 무대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고증이 부족했다는 평가를 받는 지점이었다.

그러나 시리즈 4편에서 조선 플레이는 여전히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오직 단 한 명의 군주, 조선 플레이의 시작 군주인 세종(‘이도’라는 본명으로 등장한다)의 존재만으로 상당한 어드밴티지를 갖게 된다. 주요 군주의 능력치인 행정, 외교, 군사 능력이 6점 만점 기준인 게임에서 세종은 각각 6 / 5 / 5라는 톱클래스의 능력치를 부여받은 채 등장하기 때문이다. 게임 내에서 군주 능력치만으로는 전 세계 군주 중 1~2위를 다투는 수준으로 빈약한 영토와 불리한 위치를 오직 군주 본인의 능력치만으로 커버해 내며 세계 정복을 꿈꿔볼 수 있는 수준을 만드는 기틀로 세종은 게임 속에서 자리한다. 조선왕조의 역대 다른 군주들이 ‘인조 0/0/0’인 것처럼 전반적으로 낮게 설정된 가운데 사실상 독보적인 ‘나 혼자 다 해내는’ 군주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며 게임은 우리가 아는 바로 그 세종의 모습을 그려낸다.

문명 5 – ‘세종패왕’이라 불린 진정한 과학 군주
하지만 무엇보다도 세종이 등장하는 게임 중 전 세계적으로 대중성이 가장 높았던 게임은 역시 ‘문명 5’일 것이다. 꽤나 대중적인 게임으로 발돋움한 ‘문명 5’ 속의 한국 문명 군주로 등장한 세종은 전 세계 모든 문명 플레이어에게 자신의 존재가 역사 속에서 어떠했는지를 똑똑히 보여주며 그 이름을 드높인 바 있었다.

전 세계의 수많은 문명이 총출동해 군사, 외교, 문화, 과학 등에서의 업적 달성을 통해 최종 승리를 노리는 ‘문명 5’ 게임 안에서 세종의 한국은 패왕급의 강력한 문명으로 등장한다. 바빌론, 쇼숀, 폴란드와 함께 ‘문명 5’ 4대 패왕으로 불리는 세종의 한국은 어지간한 고난도 싱글 플레이에서도 수많은 AI를 손쉽게 밀어낼 정도로 강하며, 멀티 플레이 게임에서도 어마어마한 위력을 뽐내는 최상위권 문명의 위용을 자랑한다.

게임 속 한국의 특수 유닛으로 등장하는 화차와 거북선은 비록 그 위용은 강력하지만 게임 안에서 전세를 뒤집을 만큼의 ‘결정병기’급 역할을 맡지는 못한다. 화차는 르네상스 시대의 공성병기인 트레뷰셋을 대체하는 한국 고유 무기이지만 높은 공격력을 갖고 있는 대신 도시 포격력이 크게 떨어지는 바람에 공격적인 전장에서의 활용이 어렵고, 거북선은 그 강력함에도 불구하고 연안 항해만 가능해 대양을 넘나들어야 하는 게임 속 해군으로는 기동성이 크게 제한받는 편이다. ‘문명 5’ 속의 한국이 패왕 취급을 받는 이유는 그래서 군사적인 특성으로부터 기인하지 않는다.

핵심은 역시 세종다운 이미지 그대로 무지막지한 과학 분야에서의 어드밴티지다. 게임은 도시별로 배정된 전문가들이 자신의 분야가 만들어내는 생산량을 늘리는데 기술자는 도시의 공업력을, 상인은 상업 수익을, 과학자는 연구력을 늘리는 방식이다. 그런데 한국 문명의 경우 각각의 전문가들이 자신의 분야 외에 모두 과학 연구 생산에 추가 보너스를 받는다. 다시 말해 무슨 전문가 유닛(게임 캐릭터)을 뽑든지에 상관없이 전문가 수만큼 과학연구가 그만큼 빨라진다는 것이다. 이 특성의 게임상 명칭은 무려 ‘집현전의 학자들’이다.

그렇기에 한국 문명은 르네상스 시대 근처에 진입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늘어나는 전문가들로부터 시작되는 과학 폭발로 비약적인 기술 발전을 거듭하기 시작하는 특성을 갖는다. 다른 문명들이 열심히 석궁 만들어 쏘고 있을 때 한국은 비행기 띄워 폭격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을 정도다. 너무 빠른 과학 발전 덕분에 문명 고유 무기인 화차나 거북선이 쓸모가 없는데, 화차를 한 대 뽑고 나면 이미 기술이 발전해 대포를 생산하는 시기가 도래할 정도이기 때문이다. 서기 1500년대에 이미 공장이 돌고 현대 보병이 돌아다니는 한국 문명이 그리 어색하지 않은 게임이 ‘문명 5’다.

폭발하는 과학력으로 빠르게 우주 정복에 도전해 과학 승리를 달성할 수도, 핵무기 개발을 서둘러 문명마다 핵을 터뜨려 준 뒤 군사 정복 승리를 달성할 수도 있는 사실상 5편 최강의 문명으로 한국 문명은 자리한다. 그 지도자인 세종의 별명이 ‘세종패왕’으로 불릴 만큼 강력한 과학 중심 문명으로 한국이 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실제 역사 속에서도 과학 덕후, 연구 마니아로 불러도 과언이 아닐 세종의 업적이 자리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객관적으로 봐도 두드러지는 게임 속 세종의 위대한 성취들
세종의 업적을 바라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세종의 업적만을 바라보기보다는 그 업적이 비슷한 시대의 다른 군주들의 업적과 어떻게 차이를 보이는가를 살피는 방법일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게임은 역사 속 여러 군주들이 함께 등장하고, 같은 규칙 안에서 각자의 특성을 비교해볼 수 있는 좋은 사례가 되며, 실제 여러 역사 중심 게임에서 세종은 한결같은 모습으로 표현된다. 과학의 최강자, 연구의 달인이라는 모습이 그것이다.

한 개의 게임에서가 아니라 한국이 등장하는 적지 않은 게임 속에서 ‘한국 = 과학’의 개념이 반영될 수 있었던 배경은 당연하게도 세종 대에 이룩한 빛나는 과학 업적으로부터였다. 이는 단지 우리 민족의 영민한 군주였다는 민족주의적 감성을 넘어 전 세계가 공통으로 즐기는 여러 게임 안에서도 동일하게 과학의 달인으로 세종이 표현되고 있다는 점을 알려준다. ‘유로파 유니버설리스’의 독보적인 능력치, ‘문명 5’에서의 압도적인 패왕문명 군주로서 등장하는 세종의 위엄은 비단 한국인들뿐 아니라 전 세계 게이머들이 함께 공감하는 위대한 군주의 발자취를 증명하고 있다.

이경혁 게임칼럼니스트 grolmarsh@gmail.com
*이경혁 칼럼니스트는 고려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대기업 등에서 일하다 퇴사한 후, 현재 연세대 커뮤니케이션 대학원에서 게임문화 연구를 전공하고 있는 게임연구자다. DBR에 ‘게임과 경영’을 연재하고 있다.

세종 시대에 천문, 물리, 의학, 인쇄, 군사기술 등 다양한 분야의 과학기술이 높은 수준으로 발전한 것은 세종이 앞장서서 해당 분야에 지원을 많이 했기 때문인 동시에 세종 스스로도 과학기술자의 재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하지만 세종이 어떤 재능을 얼마만큼 갖고 있었든지 왕이 혼자만의 재능으로 과학 발전을 이끌 수는 없었을 것이다. ‘국가 혁신’에 대한 아이디어와 ‘R&D’ 전략 차원에서 세종 시대의 혁신과 과학 발전을 돌아볼 때, 지금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시사점과 교훈이 도출될 것이다.

세종 시대의 혁신의 중심: 천문학과 자체 역법
절기와 시간을 정확하게 아는 것, 또 일식과 월식이 일어나는 때를 정확히 예측하는 것은 전통왕조 국가에서 그 자체로 무척 중요한 일이었다. 일식과 월식은 전통국가에서는 국가나 왕에게 생길 수도 있는 재앙이나 사고에 대한 일종의 예고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식이 일어나는 때에는 왕과 신하들이 소복을 하고 궁에 모여서 의례를 지내는데 일식이 시작하기 1시간15분 전에는 신하들이 모여서 준비를 했고 왕은 시작되기 45분 전부터 끝날 때까지 참석했다. 일식에 진행되는 동안에는 북을 쳐서 알렸다. 이와 같이 왕을 비롯해서 높은 지위의 신하들이 참석하는 중요한 의례이기 때문에 예정된 시간에 일식이 시작되지 않으면 이것은 중대한 사고였다. 실제로 태종 6년 6월6일에는 일식을 정확하게 예측하지 못해 담당자를 동래에 유배 보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세종 초기부터 북경에 알맞도록 돼 있는 중국의 역법(曆法)을 한양에 알맞도록 교정(校正)해왔고 이 분야의 연구에 많은 지원을 했다. 물론 이는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그리 순탄하지만도 않았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이러한 절기와 일월의 운행, 천문에 대한 국가적 관심과 의례는 ‘경천근민’의 이념에 기반하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세종 시대에 천문과 역법의 혁신이 필요했던 실용적인 이유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어쩌면 그게 더 절박한 혁신 동력이었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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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종, 관행과 두려움을 깨고 ‘조선의 하늘과 시간’을 얻다
드디어 ‘수성기의 임금’이 된 세종 앞에는 ‘부국강병’이라는 지상 과제가 놓여 있었고, ‘부국’의 핵심은 당연히 농업생산력 증대였다. 농업만큼 날씨와 기후의 영향을 받는 산업도 없다. 정확한 절기와 날짜 계산, 시간 계산, 천문 관측을 통한 기후 예측은 ‘부국’의 기반이 되는 과학이자 학문이 될 수밖에 없다. ‘하늘을 섬기는’ 게 유학의 근본이념이기도 하지만 세종이 “나라의 근간은 백성이고 백성은 밥을 하늘로 삼는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걸3 보면 그 이념은 결국 백성을 잘 먹이고 국가재정을 튼튼히 하기 위한 나름의 학문적이고 이론적인 근거로 활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럼 이제 당시 연구 개발된 천문 관측기구를 살펴보자. 일성정시의, 백각환, 소일성정시의, 간의, 소간의, 규표와 영부, 혼의, 혼상, 현주일구, 천평일구, 정남일구 등이 세종 시대에 연구개발됐는데 이 전부가 하늘을 관측하고 그 별의 운행을 정확하게 보기 위한 기구들이다. 시간을 재는 설비나 기기는 해시계인 앙부일구와 일종의 물시계인 옥루, 자격루가 있었다. 천문 관측기구는 대부분 중국의 것을 모방해서 제작했지만 옥루와 자격루는 중국의 것을 모방하되 세종과 장영실의 아이디어가 더해져 중국 것보다 정밀하고 더 많이 자동화됐다.

‘운용하는 방법도 (중국의 것은) 사람의 손을 빌린 것이 많았는데 지금 이 흠경각(옥루)에는 하늘과 해의 돗수와 날빛과 누수 시각이며, 또는 사신(四神)·십이신(十二神)·고인(鼓人)·종인(鍾人)·사신(司辰)·옥녀(玉女) 등 여러 가지 기구를 차례대로 다 만들어서,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저절로 치고 저절로 운행하는 것이 마치 귀신이 시키는 듯하여 보는 사람마다 놀라고 이상하게 여겨서 그 연유를 측량하지 못하며, 위로는 하늘 돗수와 털끝만큼도 어긋남이 없으니 이를 만든 계교가 참으로 기묘하다 하겠다’. -『세종실록』 20년 1월7일

안타깝게도 세종 시대에 개발된 다양한 천문 관측기구와 시간을 재는 기구들 중 현재까지 남아 있는 유물은 거의 없지만 실록에는 설명이 남아 있다. 당시에 편찬한 국내의 환경에 맞는 최초의 역법서인 『칠정산』(내편과 외편)에는 특히 많은 기록이 남아 있어 당시 조선의 천문학 관련 과학기술 수준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문제는 조선에서 이러한 자신만의 역법을 갖고 자체적으로 천문을 연구하는 것은 ‘중화질서에의 순응’과 이념적으로 배치되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한참 후대의 일이지만 선조가 한 말을 보자.

“중국 조정에서 정삭(正朔, 책력 혹은 달력)을 팔방에 반포하는데, 제후 나라에서 어찌 두 가지 역서가 있을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에서 개별적으로 역서를 만드는 것은 매우 떳떳하지 못한 일이다. 중국 조정에서 알고 힐문하여 죄를 가한다면 답변할 말이 없을 것이다. … 예로부터 천하의 각 지방은 동서(東西)의 멀고 가까운 것이 같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 나라마다 시각의 숫자를 고칠 수 있겠는가?” -『선조실록』 31년 12월22일

선조의 이 발언은 굉장히 ‘사대주의적’이고 자존심도 없는 발언처럼 들리지만 전 세계의 중심에 중국을 놓고 그 가장 존중받는 제후국으로서 조선을 위치시키던 당시 사상과 사고 체계를 너무도 잘 드러내는 발언이다. 또 조선의 리더들과 학자들의 ‘중화질서로부터의 배제’와 그로 인한 ‘오랑캐화’가 주는 공포를 잘 보여준다.

독자적인 달력 제작에 대한 거부감이 가득한 발언이어서 현재 기준으로는 쉽게 이해가 가지 않지만 당시 조선의 통념에 따르면 달력은 ‘중국의 천자’만이 만들 수 있는 것‘이었다. 시간을 지배하는 것은 하늘의 아들인 천자뿐이라는 관념은 당시에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세종의 아들이었던 세조조차도 기본적인 생각은 비슷했던 것으로 보인다. 세조는 세종이 만든 역법을 사용하긴 했지만 명나라 사신이 지나가는 군현에 당력(唐曆, 당나라라는 의미는 아니고 중국에서 만든 책력을 가리킨다)을 나눠줬다. 4 조선 자체의 역법과 그것으로 만든 책력을 사용하는 것을 중국에 들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5

어쨌든 조선 역사 전반에 흐르는 이런 뿌리 깊은 인식과 외교적 위험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우리만의 역법을 도입하고 자체 책력을 만들었다. 그 역법이 집약 정리된 책이 앞서도 잠시 언급한 『칠정산』이다. 『칠정산』 「내편」은 날짜, 24절기, 한양의 일출 ‧ 일몰시각 등을 계산하는 용도였고, 「외편」은 일식 ‧ 월식을 예보하는 데 사용하는 용도였다.

2) 명분을 갖고 시작했고 장기 과제로 삼아 지속적으로 지원했다
세종이 그 시대의 통념을 깨고 신하들의 반대 목소리를 잠재우고 일사불란하게 천문과 역법 연구를 지휘할 수 있었던 것은 글의 서두에서도 언급한 바 있는 ‘경천근민’ 이념의 적극적 해석 덕분이었다. 단순히 공중에 떠 있는 추상적인 유교 정치나 주자학의 ‘표어’가 아니라 실천적인 미션으로 가져옴으로써 혁신의 동력으로 삼은 것이다.
다음은 세종이 농사와 관련해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내용이다.

“지금의 수령들은 예전의 상습에 익숙해져서 파종해야 할 때가 왔는데도 말하기를 ‘망종(芒種)이 아직 멀었다’라며 농지에 관계되는 소송을 즉시 처결하지 않고, 종자곡식을 빌려주는 일 등의 사무를 빨리 처리하지 아니하여 번번이 시기를 놓쳐버리곤 한다. .… 어떤 수령은 농경의 적절한 시의를 알지 못하고 한갓 농사를 권장한다는 평가를 듣기만 꾀하여 너무 일찍 심기를 독려하기 때문에 곡식 싹이 살지 못하여 도리어 농사를 해치는 자가 있다. 또 어떤 이는 절기의 이르고 늦은 것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의 계획이 어설퍼서 일이 시기를 잃게 하는 자도 있다.” -『세종실록』 26년 윤7월 25일

세종은 국가에서 정확한 절기, 시점을 알려줌으로써 이를 어기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판단했고, 이렇게 하늘의 이치에 맞는 제대로 된 농사로 백성을 위하는 것이 ‘경천근민’이며 이를 위해 역법과 천문을 연구해야 한다고 명분을 만든 셈이다.

또한 부수적으로는 시간을 백성에게 알려줌으로써 삶의 질을 높이는 효과도 가져오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도성문이 열리는 시간, 닫히는 시간, 순찰을 도는 시간 등에 오차가 없도록 하고 싶었다는 뜻이다. 세종이 ‘털끝만큼도 틀리지 않는’ 물시계를 만들어 이를 사용하게 했고 6 주간에는 해의 움직임을 관측하고 야간에는 별의 움직임을 관측해 시간을 파악하는, 주야간이 모두 가능한 시계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를 만든 이유다. 이러한 시계들은 국경 병영에 나눠주어 군사 작전에도 사용할 수 있었다.

역법 연구가 하나의 바퀴라면 천문기구 개발과 천문 관측은 ‘시간’을 제대로 알기 위한 또 다른 바퀴다. 두 개의 과학은 사실 따로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다.

구만옥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세종 대에 만들어진 다양한 천문의기 제작 시점 자체는 분명하지 않으나 세종 19년(1437) 4월 일성정시의가 완성됐을 때를 전후에 전술한 여러 천문의기가 완성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7 이후 1년 안에 추가로 몇 개의 천문의기가 완성됐다는 기록이 나온다. 세종이 본격적으로 ‘의상’과 ‘구루’로 표현되는 각종 천문의기 제작사업을 지휘한 게 세종 14년(1432)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약 7년간의 프로젝트로 천문 연구를 위한 각종 과학기기 개발·제작 사업이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우선 세종은 재위 14년 7월 정인지에게 “우리 동방이 멀리 바다 밖에 있어서 무릇 시설한 바가 한결같이 중화의 제도를 따르고 있으나 다만 하늘을 관찰하는 부분에는 부족함이 있다”고 말한다. 조선이 위치, 천문 상황 등이 중국과 다르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천문을 관측해야 한다는 인식이 보인다. 이에 세종은 “천문을 살펴 계산하는 일은 전심전력을 다해야 그 묘리를 구할 수 있다”며 “일식과 월식, 천문을 관측한 결과가 잘못됐더라도(실패한 것이라도) 모두 기록해 바치라”고 지시한다. 그렇게 데이터를 계속 축적했고 각종 관측기구를 제작해 서울과 지방의 주요 지역에서 북극성을 중심으로 별의 위치를 모두 측정하게 했다. 고금의 천문도를 비교 분석했고, 역대 중국의 역법을 비교 연구하게 했다. 이런 노력 끝에 우리만의 역법을 완성했고, 이를 책으로 집약 정리하게 했다.

‘조선의 하늘’과 ‘조선의 시간’을 갖게 되는 시점, 즉 정확한 천문 관측 도구와 조선의 역법이 만들어지는 때에 세종은 “우리나라가 추보(推步, 천체의 운행을 관측함)하는 법에 정밀하지 못했으나 역법을 교정한 이후 일식과 월식, 절기(節氣, 24절기)의 일정함이 중국에서 반포한 일력과 비교할 때 털끝만큼도 틀리지 않으니 매우 기쁘다”고 말한다.

이처럼 세종 시대에 혁신의 중심에 있던 천문학과 역법 발전은 기존의 윤리, 관습, 선입관에서 벗어나 ‘중화질서로부터의 배제’라는 공포와 그에 기반한 반대 기류를 거슬러 이뤄낸 쾌거였다. 이러한 혁신 성공에 현대 기업인들이 주목해야 할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혁신 반대 세력’을 충분히 제압할 만한 ‘명분’이다. 유학자들의 마음속에 있는 ‘중화질서’에 대한 추앙과 관념을 유학의 또 다른 근간인 ‘경천근민’의 적극적 해석을 통해 압도하면서 혁신을 지휘하고 추동했다. 또 하루아침에 결과가 나오지 않아도 학자들을 크게 질책하기보다는 격려하면서 자신감을 잃지 않도록 했는데 이는 R&D 부서장이나 R&D 전략을 고민하는 CEO라면 반드시 교훈을 얻어야 할 부분이다. 세종 연구자인 박현모 교수에 따르면 세종이 본격적으로 조선의 자체 역법을 갖기 위해 10여 년간 정초, 김빈 등의 뛰어난 학자들을 중국에까지 보내며 지원하지만 완벽한 역법의 원리는 밝혀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그때까지 쌓인 실패를 기반으로 정인지가 다시 한번 도전해 결국 성공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8

이러한 신뢰와 지속적인 지원은 그 자체의 성공도 성공이지만 조선의 관료사회, 특히 과학기술자 및 연구자 집단에 ‘실패해도 괜찮다. 왜 실패했는지 연구하고 다시 시작하자. 할 수 있다’는 의지와 생각을 퍼뜨렸다. 그 밖에도 알게 모르게 불필요한 혹은 다소 과한 규제와 관례를 왕의 명령으로 해제해 연구에 전념할 수 있게 했다. 역법을 담당한 관원의 직급을 파격적으로 올려주는 조치를 취했고, 역법 담당 관원은 통상적으로 돌아가면서 하게 돼 있는 지방 근무에서도 빠져 오직 역법연구에만 매진할 수 있도록 했다. 또 다른 중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심지어 상중(喪中)에도 금세 복귀해 일할 수 있도록 도왔다. 왕이 명분을 만들어 장기적인 비전을 갖고 지속적으로 믿고 지원하는 것, 이게 세종의 혁신 성공 비결이었다.

세종 시대 국방 기술, 동아시아 강소국가로 약진하다
앞서 언급했듯 세종은 ‘부국강병’이라는 국가적 과제를 풀어야 하는 입장이었다. ‘부국’의 차원에서 농업 중흥을 위해 천문과 역법 연구를 지휘했다. 그렇다면 강병은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시대에는 ‘병사의 수’가 많은 것도 분명 ‘군사력이 강한 국가’의 요건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농경국가인 조선에서 많은 병사 수 확보는 곧바로 농업에서의 노동력 손실로 이어진다는 문제가 있었다. 그렇다고 군사력을 신경 쓰지 않기엔 국제정세가 불안했고 위협요소도 많았다. 원·명 교체기의 불안은 아직 가시지 않았으며 북쪽의 여진족과 남쪽의 왜구가 지속적인 침탈을 해오는 상황이었다. 세종은 이 상황을 바로 ‘과학기술 투자’를 통한 ‘첨단무기 개발’을 통해 풀어냈다.

1) ‘무기 덕후’ 세종
세종은 왕자 시절부터 화약무기 개발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왕에 즉위하면서부터 화약무기의 중요성을 알고 새로운 화약무기의 개발에 힘을 많이 쏟았다. 화약무기의 개량과 새로운 개발 작업은 최무선의 아들인 최해산을 등용해 진행했다. 세종은 평소에도 화약무기 연구 현장에 쉽게 가보기 위해 군기감의 대장간을 궁궐 옆에 짓게 했다. 세종의 전폭적인 지원을 보여주는 사례가 하나 있는데 바로 화약무기 개발 중 폭발사고가 발생했을 때였다. 그 어떤 음모론도 용납하지 않고, 어떤 쓸데없는 책임 추궁도 하지 않고, 그저 부상자들을 잘 치료하도록 보살폈으며 오히려 연구개발에 매진한 것을 높이 사 연구진에게 상을 내리기도 했다. 화약무기 개발자들, 과학자들의 사기가 오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무기 덕후’ 세종은 재위 27년(1445년) 3월30일, 그동안 진행된 화약무기의 개발 과정과 성과를 직접 발표하기도 한다. (표 1)

“내가 즉시 군기감에 명하여 대장간을 행궁(行宮) 옆에다 설치하고 화포를 다시 만들어서 멀리 쏘는 기술을 연구하게 하였더니 전의 천자화포(天字火砲)는 400보, 500보를 넘지 못하였는데 이번에 만든 것은 화약이 극히 적게 들고도 화살은 1300여 보를 가고, 한 번에 화살 4개를 쏘매 다 1000보까지 가며, 전의 지자화포는 500보를 넘지 못했는데, 이번 것은 화약은 같이 들어도 화살이 800, 900보를 가고, 한 번에 화살 4개를 쏘매 다 600, 700보를 가며, 전의 황자화포는 500보를 넘지 못했는데, 이번 것은 화약은 같이 들어도 화살이 800보를 가고, 한 번에 화살 4개를 쏘매 다 500보에 이르며, 전의 가자화포는 200, 300보도 못 갔는데, 이번 것은 화약은 같이 들어도 화살이 600보를 가고, 한 번에 화살 4개를 쏘매 다 400보를 가며, 전의 세화포는 200보를 넘지 못했는데, 이번 것은 화약은 같이 들어도 화살이 500보에 미치게 되었으며, 전의 여러 화포는 화살이 빗나가서 수십 보 안에서 떨어지는 것이 태반이었는데, 이번 것들은 화살 하나도 빗나가는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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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1]을 보면 세종 때 새로이 개발된 총포는 개량 전보다 적거나 같은 양의 화약을 사용하면서 사정거리, 즉 성능은 2배 이상 향상된 것을 알 수 있다. 즉 세계 최고 수준의 총포를 개발했던 것이다. 세종 때의 총포는 고려 말부터 사용하던 총포의 내부 구조를 창의적으로 개량해 적은 양의 화약을 사용하지만 화약의 폭발 압력을 높임으로써 발사물을 더 멀리 날아가게 하고 한 번에 여러 발을 발사하게 개발한 것으로, 이러한 총포의 내부 구조는 세종 때 처음 개발된 우리의 독창적인 방식으로 조선 말기까지 계속 사용된다. 세종은 이때 발표한 새 화약무기를 3년 동안 좀 더 연구시킨 뒤 세종 30년(1448년) 9월 『총통등록』이라는 책에 담아 발행한다. ‘무기 덕후’이자 ‘책 덕후’인 세종다운 일이었다. 안타깝게도 『총통등록』 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지 않지만 천만다행으로 1474년에 편찬된 『국조오례서례』의 ’병기도설‘에 세종 때 개발된 모든 화약무기의 자세한 규격이 전해지고 있다. (DBR minibox: ’세종 시대 개발/개량된 무기들‘를 참고.)

한 가지 무기만 따로 언급해보면 그 개발 과정이 영화화되기도 했던 ’신기전‘은 ’무기 덕후‘인 세종의 집착에 가까운 투자가 아니었으면 탄생하지 못했을 가공할 신무기였다. 신기전이라는 이름은 고려 말 최무선이 개발한 주화(走火, 달리는 불)를 대대적으로 개량해 개명까지 한 것으로 세종 29년(1447년) 가을부터 겨울까지 모두 3만3000발 제작돼 압록강과 두만강변의 4군6진에서 여진족에게 사용됐다. 이 무기가 조선의 북쪽 경계선을 압록강과 두만강까지로 넓히는 데 큰 공을 세운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2) 정확한 문제 인식, 엄밀한 목표 설정, 철저한 사후관리의 모범
예나 지금이나 ’군사력‘에 대한 관리와 통솔은 국가 리더의 가장 중요한 업무다. 경제 문제가 ’먹고사는‘ 문제라면 안보 문제는 ’죽고 사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기업의 경우로 보자면 마치 ’핵심 경쟁력‘ 혹은 ’당장 고객에게 팔아야 할 그 무엇‘과 같은 것이어서 그 경쟁력이 사라지면 곧 망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세종의 무기와 관련된 지휘와 개발과정 개입은 간략하게나마 살펴보면서 교훈을 얻기에 매우 좋은 사례다. 우선 큰 틀에서 ’강병‘을 위해, 특히 북방의 여진족의 침범과 약탈로부터 백성을 보호하고 나아가 4군6진 개척을 통한 국토 확정과 정리가 필요하다는 전략적 목표를 갖고 그 일환으로 ’무기 체계 강화‘라는 목표로 내걸었다. 이게 출발점이다. 그리고 다시 디테일로 들어가는데 많은 업무를 신하들에게 위임하는 세종도 이 부분만큼은 직접 챙겼던 것으로 보인다. 본인이 무기에 관심이 많았던 탓도 있지만 조선에서 ’기술‘의 영역에 해당하는 분야는 왕이 직접 나서지 않으면 홀대를 받기 쉽고 따라서 일의 진행이 느릴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을 가능성이 크다. 9

세종은 당시 조선의 주력 화포가 ’크고 무겁다‘고 판단했고 ’소형화‘가 필요하다고 봤다. 문제는 소형화할 경우 사거리가 급격히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기술자들에게 이러한 문제 해결을 제시했고, 화약의 소모량을 줄이거나 유지하면서도 사거리를 늘릴 방법을 찾도록 했다. 이 문제가 해결되자 ’일발다전‘, 즉 한 번에 많은 화살을 쏠 수 있는 무기를 개발하도록 독려했다. 개발자들이 사력을 다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관심을 보이며 지원하고 어느 정도 성과가 나면 쌀과 말을 하사하면서 포상했다. 세종은 직접 무기 개발 과정의 논쟁에도 참여하면서 앞서 잠시 소개한 바 있듯 직접 무기의 사거리를 논하며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지 기술자들과 함께 머리를 맞댄다. 아예 대군들도 직접 화포 주조에 참여시키면서 사거리와 1회에 발사할 수 있는 화살의 개수를 늘리되 화약량과 무게는 줄이는, 즉 아주 구체적이고 명확한 목표를 정해놓고 매진하도록 만든다. 또 군기감 제조들이 대부분 늙고 근력이 쇠약해져서 부지런히 일하기 힘들다고 판단되자 대호군 박강을 뽑아 그로 하여금 ’젊은 피‘를 수혈해 일하도록 만든다. 화포 주조에는 금속이 많이 들기에 이의 원활한 수급도 지원했다. 세종이 진정 세종다웠던 것은 사실 그 이후다. 이렇게 성공적인 화포 개발과 무기 개량이 끝나고 나서 곧바로 축배를 든 게 아니라 ’새로운 화포 사용법‘을 병사들이 숙지할 수 있도록 챙겼다. 새로 개발된 총통을 들고 다니는 부대를 어떻게 편성하며, 어떻게 병사들을 훈련할 것인지, 심지어 연습할 때 안전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고민했다. 무기 개발/개량과 관련해 세종은 큰 틀에서의 전략적 목표를 설정하고 적절한 개입을 통해 주요 어젠다로 사업을 추진했으며, 실패를 용인해주면서 연구 담당자들에게 힘을 실어줬고 실전 배치를 위한 사후 관리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으로 개입하며 성과를 창출했다.
DBR miniboxII: 세종 시대 개발/개량된 무기들

세종 때 개발된 화약무기는 종류가 모두 23종이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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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나눠 보면 총포류가 10종, 폭탄류가 8종, 로켓화기가 5종이다. 총포류는 큰 포에서 작은 권총에 해당하는 것인데 가장 큰 것은 장군화통(將軍火筒), 총통완구(銃筒碗口), 일총통(一銃筒), 이총통(二銃筒), 삼총통(三銃筒), 8전총통(八箭銃筒), 4전총통(四箭銃筒), 4전장총통(四箭長銃筒, 세총통(細銃筒), 철신포(鐵信砲) 등 10종이다. 현재의 상식은 ‘포(砲)는 총(銃)보다 크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종 때에는 제일 큰 포는 ‘장군화통’이라 이름 붙었고 한 번에 1발씩 발사물을 발사하는 총은 큰 것부터 1, 2, 3 총통이라 이름 붙였다. 한 번에 세전(細箭)을 몇 개씩 넣고 발사하느냐에 따라 이름을 정했다. 즉 ‘사전총통’은 세전 4발을 한 번에 발사할 수 있는 총이라는 뜻이며 ‘8전총통’은 세전 8발을 넣고 쏘는 총이다.

(1) 장군화통
세종 시대의 가장 큰 포는 ‘장군화통’이다.(그림 B) 포신의 길이가 90㎝, 최대 지름 16.6㎝, 구경 10㎝이며 무게는 104근10량(46.17㎏)이었다, 무게 4근8냥(1986g)짜리 철촉이 달려있는 길이 1m90㎝의 ‘대전(大箭)’을 1300보까지 날려 보낼 수 있는 성능이다. 1300보(步)는 대략 1.3㎞ 이상이다. 당시로는 엄청난 성능이다. 임진왜란 때는 이 포가 ‘지자총통(地字銃筒)’으로 거북선과 판옥선에서 사용됐다. 최근 필자(채연석)의 연구 결과 지자총통은 거북선의 2층 전면 좌우에 설치돼 왜군의 함선을 파괴하는 데 사용됐다. 그뿐만 아니라 지자총통은 1555년 규모를 확대해 천자총통으로 개량 발전되고 거북선에 장착돼 큰 위력을 발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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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총통완구(銃筒碗口)
‘총통완구’는 큰 돌을 발사할 수 있는 포다. 일반적으로 총포는 총의 내경보다 작은 탄환이나 화살을 넣고 발사한다. 그런데 완구는 총의 구경보다 큰 것을 발사하는 총통이다. 총통완구는 직경 33.5㎝, 무게 32.6㎏짜리 석환 1개를 쏠 수 있는 포다. 이 포는 무게가 무거워서 석환을 담는 상부와 화약을 넣고 폭발시키는 하부로 구성돼 있는데 발사할 때는 상부와 하부를 밧줄로 묶어 하나로 조립해 사용했다. 상부는 최대 외경이 42.5㎝이고 길이가 34㎝, 무게는 45.9㎏이다. 하부는 최대 외경 20㎝, 길이 41㎝인데 무게는 44㎏이다. 장군화통보다도 훨씬 무거운 포다. 발사할 때 화약을 30냥(828g)을 넣고 발사하면 370보 정도를 날아갔다. 즉 185m에서 370m를 날아간 셈이다. 유럽에서 적의 함선을 파괴할 수 있는 철환의 무게가 10.9㎏(24파운드)인 것과 비교된다. 유럽에서는 10.9㎏짜리 철환으로 100m 거리에서 약 1m 두께의 단단한 선체를 관통할 수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총통완구의 석환(石丸)도 일본 배를 충분히 파괴할 수 있는 무게였다.

(3) ‘세총통과 철흠자’
세종 시대에 개발한 총 중 가장 작은 것은 길이 14㎝, 무게 3량5전(106.5g)의 ‘세총통‘이다.
『세종실록』 77권, 19년(147년) 6월27일자 기록에 보면 세종대왕이 평안도 절제사에게 이르기를 "군기감에서 만든 세총통을 시험해보니 갖고 다니기와 쏘기에 모두 편리했다. 비록 정탐꾼이 쓰기에는 적당하지 못할지라도 적과 서로 마주해 싸울 적에 말(馬) 위에서 많이 가지고 각자가 쏘면 매우 편리하고 유익하며 위급할 때에는 어린이와 여자라도 가지고 쏠 수 있기 때문에, 이제 세총통 150개와 피령전(皮翎箭) 1000개, 철전(鐵箭) 1500개를 보내니, 마땅한 대로 쓰고, 피령전은 모방하여 만드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세총통은 위급할 때에는 어린이와 부녀자도 쏠 수 있기 때문에…'라는 기록에서 보듯이 세종 19년인 1437년 군기감에서 개발한 세총통은 어린이와 여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최초의 권총이었던 셈이다. 세총통은 손으로 쥐고 발사하기에는 너무 작은 문제가 있었고, 또한 청동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발사하고 나면 곧 뜨거워지는 문제점도 갖고 있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철흠자(鐵欠子)라는 이름의 집게를 철로 만들어서 세총통의 중간 부분을 집어서 사용하도록 했다.

(4) 신기전
신기전의 종류는 소, 중, 대, 산화신기전 등 총 4개였는데(그림 C) 가장 큰 대신기전의 경우에 안정막대로 길이가 5.5m짜리 대나무를 사용했고 추진제를 채운 약통의 크기는 길이 70㎝, 직경 10㎝인데 최대 3㎏ 정도의 흑색화약을 채울 수 있었다. 약통 앞부분에는 길이 23cm, 직경 7.5cm의 폭탄인 ‘대신기전발화통’을 장착했다. 이 폭탄은 대신기전이 400~450m 정도 날아간 후 큰 폭음을 내며 폭발해 목표물을 불태우고 철가루를 사방에 뿌렸다. 신기전이 떨어진 주변에 적들이 있었으면 신무기의 성능에 놀라 줄행랑을 쳤을 것이다. 산화신기전은 대신기전 약통 윗부분에 소형로켓인 지화통에 소형폭탄인 소발화통 묶어 3발 넣은 것이다. 산화신기전이 목표에 도착하면 지화에 불이 붙어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소발화가 폭발한다. 대신기전이 1단 로켓 역할을 하고 지화가 2단 로켓 역할을 해서 2단 로켓 추진 시스템을 갖춘 세계 최초의 2단 로켓인 셈이다. 중신기전은 화살길이 145㎝에 길이 20㎝, 직경 2.8㎝의 약통이 달려 있고 앞부분에 소발화통 1개가 달려있으며, 사정거리는 200m 정도다. 소신기전은 화살대 길이 115㎝에 길이 14.7㎝, 직경 2.2㎝의 약통이 달려 있고 폭탄은 달려 있지 않다. 사정거리는 150m 정도다. 소신기전과 중신기전은 문종 때 화차에서 한 번에 100발씩 발사됐다.
소신기전을 제외한 중신기전, 대신기전, 산화신기전은 당시로는 폭탄인 발화통을 멀리 날려 보내고 폭발시킬 수 있는 유일한 화약무기였다. 중신기전은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 근처의 전투에서 사용됐고 거북선에서는 신호용으로도 사용됐다. 신기전은 성능이 뛰어난 신무기여서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적이 숨어 있을 것 같은 곳에 발사를 하면 적이 겁을 먹고 스스로 항복했다’고 한다.

결론을 대신해: 혁신이라기보다는 혁명, 글자의 창제
대한민국 국민이 ’세종‘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건 누가 뭐래도 훈민정음, 지금 이 아티클이 작성되고 있는 바로 그 글자인 한글의 창제다. 사실 훈민정음 창제 뒷이야기와 신하들과의 논쟁 등은 너무도 많은 책과 영화와 드라마 등을 통해 약간의 허구가 보태지기는 했어도 비교적 정확하게 전달됐고 더군다나 이 글을 읽을 정도의 독자층이라면 더 깊게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세종의 ’혁신‘을 논하면서 ’훈민정음 창제‘라는 혁명적 사건을 빼고 지나가기도 어렵다. 따라서 본 아티클에서는 간단하게 창제의 배경이 되는 두 사건을 설명하고, 신하들과의 논쟁을 실록에 기반해 간단히 정리하면서 이 아티클 전체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훈민정음 창제의 직접적인 배경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중요한 전제가 되는 두 사건부터 알아보자. 우선, 진주 사람 김화가 아버지를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지는데, 효와 충이 핵심 가치였던 조선사회에서 이건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10 큰 충격을 받은 세종은 자신의 부덕함을 자책하고, 백성들이 인간으로서의 윤리의식을 깨닫고 올바른 성품을 가꿔갈 수 있도록 돕는 교과서인 『삼강행실도』를 편찬하도록 지시한다. 그런데 이 책을 전국에 보급하도록 하자 곧바로 하나의 문제가 발견됐다. 백성들 다수가 글자를 모른다는 점이었다. 다음은 세종의 한탄이다.

“백성들이 문자를 알지 못하니, 비록 책을 나눠주더라도 남이 가르쳐주지 아니하면 어찌 그 뜻을 알아서 감동하고 착한 마음을 불러일으킬 수 있겠는가?” -『세종실록』 16년 4월27일

세종은 그래서 이해가 쉽도록 책에 그림을 많이 그려 넣도록 하고,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책의 내용을 알려주도록 지시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두 번째로 훈민정음 창제에 영향을 미친 사건은 ’법률의 번역‘이었다. 세종은 조선의 법전이 법을 담당하는 관리들이 읽기에도 어렵다며 이를 쉽게 이두로 번역해 백성들에게 반포하라고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비록 사리를 아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율문(律文, 법조문)에 의거하여 판단이 선 뒤에야 죄의 무겁고 가벼움을 알게 된다. 하물며 어리석은 백성이야 어찌 자신이 저지른 죄의 크고 작음을 알아서 스스로 고치겠는가? 백성으로 하여금 율문을 모두 알게 할 수는 없겠으나 따로 큰 죄의 조항만이라도 뽑아 적고, 이를 이두문으로 번역하여 민간에게 반포함으로써 평범한 백성들도 범죄를 피할 줄 알게 함이 어떻겠는가?” -『세종실록』 14년 11월7일

하지만 신하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백성이 법을 알게 되면, 법망을 이리저리 피하고 법의 허점을 이용해 간사한 죄를 저지르는 자들이 늘어날 것이라며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자 세종은 “백성으로 하여금 알지 못하고 죄를 범하게 하는 것이 옳겠느냐? 백성에게 법을 알지 못하게 해놓고, 범법한 자를 벌주게 되면, 조사모삼(朝四暮三)의 술책에 가깝지 않겠는가?”라고 반문한다. 이러한 사건들을 계기로 세종은 어떻게 하면 백성에게 나라에서 제공해 주는 정보를 쉽게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법률, 농업, 의술, 조세제도 전반에 걸쳐서 새로운 지식과 제도를 만들어 ’경천근민‘의 관점에서 정사를 펼치더라도 이것이 백성에게 전달이 될 수 있어야 참다운 ’경천근민‘의 완성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에 세종은 중국어뿐 아니라 산스크리트어, 몽골어, 서하어, 거란어, 여진어, 일본어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그 특성을 분석하며 글자 연구에 착수한다. 이제껏 나온 모든 음운학 서적들을 모아 밤낮으로 연구했고, 대부분의 작업은 신숙주, 성삼문 외 집현전 학사 몇 명과 세자, 수양대군과 안평대군, 정의공주 등 왕자와 공주들만 데리고 철저히 비밀리에 진행했다. 많은 이가 알다시피 이 과정에서 세종은 시력을 거의 잃었다. 본인의 표현을 빌리면 "두 눈이 흐릿하고 깔깔하며 아파, 지난봄부터는 조금이라도 어두우면 지팡이가 없이는 걷기가 어려웠다"고 한다.11 ::C::『세조실록』 23년 4월 4일::/CN::
이처럼 오랜 노력 끝에 세종은 마침내 새로운 28개의 글자를 만들게 된다.
훈민정음 창제는 당시 지배층에게 큰 충격이었다. 이들의 인식은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의 언문(諺文)반대 상소에 잘 드러난다. 12 ::C::『세조실록』 26년 2월 20일 ::/C:: 내용의 요지는 훈민정음이 첫째 중국을 섬기고 중화(中華)의 제도를 사모하는 정신에 어긋나며, 둘째 우리 스스로를 오랑캐와 같아지게 하려는 행위이며, 셋째 이미 이두를 쓰고 있으니 상스럽고 무익한 글자를 굳이 만들 필요가 없으며, 넷째 언문을 배우면 따로 문자를 배울 필요가 없어서 성리(性理, 성리학)의 가르침을 공부하려 하지 않을 것이니 학문에 방해되고 정치에 아무런 이익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최만리는 훈민정음을 그저 '새롭고 기이한 기예'일 뿐 아무리 생각해봐도 무엇이 좋은지 알 수 없다며 그 의미를 격하한 것이다. 그런데 최만리가 여러 가지를 거론했지만 사실 가장 큰 위험으로 느낀 것은 ‘용음합자(用音合字)’, 즉 표음문자라는 사실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용음합자’가 최대 이슈였다는 것은 최만리 상소에 대한 세종의 반박에서도 나타난다. 세종은 가장 먼저 “너희가 이르기를, ‘음(音)을 써서 글자를 합하는 것은 모두 옛것에 위반된다’라고 하였는데, 설총의 이두도 역시 한자와 음이 다르지 않으냐?”라고 답한다. 13 이렇게 세종은 최만리의 상소를 조목조목 반박한 후 훈민정음 확산 작업에 돌입한다. 궁중 안에 정음청을 설치하고 『용비어천가』와 『월인천강지곡』, 『석보상절』 등을 새 문자로 출간함으로써 훈민정음을 최종 점검했다. 그리고 훈민정음의 종합 해설서인 『훈민정음해례』도 완성한다. 그렇게 "슬기로운 사람은 하루아침을 마치기도 전에 깨우치고, 어리석은 이라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는" 14 글자가 탄생한다.

그렇다면 표음문자라는 것이 도대체 왜 문제였을까. 바로 백성이 사용하는 일상의 언어를 그대로 문자로 표기하는 표음문자의 창제가 표의문자인 한자를 통해 지식을 독점해 오던 사대부들에게 큰 충격이자 위험으로 받아들여 졌기 때문이었다. 세종은 문자는 한자(표의문자)여야 한다는 기존 관념을 깨트리고 표음문자라는 새로운 발상을 제시한 셈이다.



참고자료
1. 조지프 니덤 外, 『조선의 서운관』(서울, 살림출판사, 2010)
2. 구만옥, 『세종시대의 과학기술』(서울, 들녘, 2016)
3. 남문현, 『한국의 물시계』(서울, 건국대출판부, 1995)
4. 박현모, 『세종처럼』(서울, 미다스북스, 2012)
5. 채연석, 『한국초기화기연구』(서울, 일지사, 1981)
6. 『조선왕조실록』, 국사편찬위원회
7. 박현모 교수 인터뷰 녹취록(인터뷰 일시: 2018년 7월 11일 오후, 판교)



필자 소개 채연석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 교수 gogospace@naver.com, 고승연 기자 seanko@donga.com
경희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기계공학 전공으로 석사 과정을 마쳤다. 미국 미시시피주립대 항공우주공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1988년부터 한국항공우주연구원에 재직하며 우주추진기관을 연구해 왔다. 과학로켓 KSR-Ⅲ의 사업단장을 지내기도 했다.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원장을 지낸 뒤 현재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 교수로 연구 활동을 계속하며 한국의 항공우주공학 발전에 온 힘을 쏟고 있다. 세종 시대의 과학발전사에도 관심이 많으며 저서로 『로켓이야기』 『로케트와 우주여행』 『눈으로 보는 우주개발 이야기』 『우리의 로켓과 화학무기』 등이 있다.
동아비즈니스리뷰 345호 Fake Data for AI 2022년 05월 Issue 2 목차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