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와 정조를 통해 본 리더십
Article at a Glance
조선후기 정부 관청은 시전(市廛)상인과 공인(貢人)들을 대상으로 각종 부당한 요구를 자행했다. 정부의 부당한 ‘갑(甲)질’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영조는 1752년 ‘공시당상(貢市堂上)’을 만들었다. 공시당상의 주 업무는 공인과 시전상인들에게 정부 관청의 폐단을 하나하나 물어 영조에게 보고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영조는 권력형 부패 척결이라는 중대 업무를 공시당상에게만 맡겨두지 않고 직접 나섰다. 시전상인과 공인을 궁궐로 불러들여 그들의 하소연을 직접 들은 것이다. 한마디로 영조는 ‘법대로 하면 되지 않느냐’고 안이하게 내버려두지 않고, 현장으로 직접 뛰어들어서 법 자체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지도자가 아무리 굳은 의지를 가졌다 해도 실무선에서 아랫사람들이 단합해 저항하면 시정하기 어렵다. 비록 영조의 굳은 의지는 정조에게까지 이어졌지만, 그 이후로는 더 이상 계승되지 못했다. 그것이 조선의 부패와 몰락을 더욱 가속시킨 원인이다. |
조선시대에 백성들의 민원은 어떤 방식으로 처리됐을까? 우선 머리에 떠오르는 단어는 신문고일 것이다. 그런데 사실 신문고는 잠깐씩 시행됐던 것이라 제도라고 말하기 힘들다. 가장 보편적인 민원은 ‘상소’였다. 상소는 훌륭한 제도였지만 여기에도 문제는 있었다.
조선후기 정부 관청의 ‘갑(甲)질’
한번은 조선후기 서울 종로에 있던 ‘혜전(鞋廛)’이라는 가죽신을 만드는 가게에서 비변사(備邊司)에 이런 상소를 올렸다. ‘정부관청에서 수시로 공문을 보내 행사에 필요하다며 신발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는데, 이런 요구를 때마다 모두 들어주면 파산할 지경이고, 들어주지 않으면 여러 방법으로 괴롭혀서 살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혜전만 이런 일을 당한 것이 아니었고, 관청에서 요구하는 수법도 이런 수법만 쓴 게 아니었다. 실은 모든 시전에서 비슷한 고통을 겪고 있었고, 관청에서 외상으로 가져가고는 절대 갚지 않는 방법으로 상인들을 괴롭히고 있었던 것이다.
민원상소를 접수한 비변사에서는 이런 조치를 내렸다. ‘부당한 공문은 거부하고, 그런 공문을 내린 관리는 징계하고, 가게에 와서 행패를 부리거나 물건을 받아간 하인은 처벌하라.’ 이 조치는 간단히 말하면 ‘법대로 하라!’는 것이었다. 조선의 법과 규정은 의외로 잘돼 있어서 시전에 물품을 요구할 때도 각각의 법과 절차가 있었다. 비변사의 조치는 시전에 물품을 요구할 때는 기존의 규정대로 절차를 밟아 진행하고, 규정에 어긋난 요구는 거부하되 관례대로 처벌하라는 것이었다.
이런 방식의 비변사 조치는 과연 적절하게 처리를 한 것일까? 예나 지금이나 법대로 하면 되는데 법이 지켜지지 않아서 문제가 생기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바로 이 법 자체가 이런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일 때가 많다는 것이다. 조선은 국가재정으로 들어가는 비용을 줄이겠다며 조세를 낮추고 관청에 예산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았다. 각 관청에서 알아서 조달해서 쓰라는 것이었다. 필요한 물건은 시전에서 공짜로 받아 사용하게 하고, 대신 시전에는 특정 상품에 대한 판매독점권을 줬다. 애초에 법과 제도 자체가 권력의 횡포와 남용을 방치, 조장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비변사가 내놓은 대책도 그 자체가 문제였다. 과연 시전상인들이 상부의 명령을 거부하고 관청의 관리와 하인들을 처벌하는 일이 가능했을까? 권력 있는 관청의 하인들은 대놓고 마치 자기가 고위관료나 된 것처럼 똑같이 유세를 부리고 트집을 잡고 있는 마당에 만약 그랬다가는 음으로 양으로 더 심한 보복을 당할 게 뻔했다.
조선후기에 공물제도를 폐지하고 대동법을 시행하면서 ‘공인(貢人)’이라는 새로운 상인이 등장했다. 이들은 과거에 공물로 조달해오던 물품을 지방에서 직접 구입해서 궁궐이나 중앙의 각 관청에 납품했던 공납청부업자였다. 이런 공인들도 시전상인과 마찬가지로 독점권을 넘겨받고 독점권의 대가로 이런저런 준조세에 해당하는 부담을 감당해야만 했다. 더욱이 17세기 이후로 독점권은 약화되고 준조세는 더욱 늘어났다. 여기에 점차 도시로 인구가 집중되고 경제가 발전하면서 서울과 서울 근교에 소위 난전, 혹은 사상(私商)이라고 불리던 상인이 크게 증가하면서 독점적으로 장악해오던 상품의 유통과 판매에 큰 타격을 받게 됐다. 공인은 공인대로 정부나 관청으로부터 납품하는 대가를 제대로 받지 못해 파산지경에 이르게 됐다.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상황이 100여 년간 계속됐다. 이런 부조리를 타파하기 위해 영조가 드디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부패 관료 척결에 나선 영조
1752년(영조 28) 영조는 ‘공시당상(貢市堂上)’이라고 불리는 시전상인과 공인들을 위한 고충처리반을 만들었다. 박문수의 건의로 재정을 담당하는 양대 관서인 호조판서와 선혜청 당상이 공시당상을 겸임하게 됐다. 이들은 공인과 시전상인에게 폐단을 하나하나 물어서 영조에게 보고해야만 했다.
호조판서와 선혜청 당상이 높은 자리기는 했지만 영조는 이들이 권력형 부패를 제대로 처리할 수 있을지에 의문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영조는 직접 나섰다. 영조는 시전상인과 공인들을 궁궐로 불러들여 직접 대면했다. 1769년(영조 45) 상인들이 영조를 만나는 자리에서 “임금의 인척인 낙창군 이탱(1200냥), 청성위 심능건(1100냥)을 비롯해 홍자(2500냥), 송낙휴(1500냥) 등 높은 자리에 있는 분들이 자신들에게 돈을 빌리고 아직도 갚지 않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이른바 ‘외상(外上)’을 진 사람들을 모두 고해바쳤다. 청성위 심능건은 영조의 딸 화녕옹주의 남편, 다시 말하면 영조의 사위였다. 심능건은 이 사건이 발각되기 전에 이미 은을 파는 가게(은전)에서 물의를 일으켜 사직된 상태였는데 또다시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영조는 즉시 홍자, 송낙휴 등을 잡아서 처리하고,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시당상 김시묵(金時默)과 김종정(金鍾正)도 파직했다. 한편 인척들에게는 일단 잡아 가둔 뒤에 돈을 다 갚으면 풀어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영조는 신문고를 달아놓은 경희궁의 건명문에 나가 다시 한번 시전상인들을 만났다. 영조는 채무의 폐단을 처리한 건에 대해 상인들에게 물었다. 상인들은 “전부 상환해 돌려받았습니다”라고 대답했는데, 영조는 오히려 심드렁하게 “그런가?”라고 중얼거렸다. 과연 다 돌려받은 것인지, 권력자들에게 뭔가 협박을 받아 속이는 것은 아닌지 염려하는 대답이었다. 문제 처리를 지시한 후에 제대로 시행되고 있는지를 반드시 확인했던 영조의 방식을 고스란히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영조는 늘 얘기했다. “특별히 공시인들에게 묻는 것은 깊은 뜻이 있어서다. 처결을 내리는 공문서에 먹물이 마르기도 전에 또 어기고 있으니 이 하나만 봐도 나머지 일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권력자의 세력을 겁을 먹고 제대로 보고하지 않는지 어찌 알겠는가.”
지도자가 부조리 척결의 의지를 가져도 아랫사람이 단합해서 저항하면 시정하기 어렵다. 이것을 해결하는 것은 지도자가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투지를 보이는 방법뿐이다. 영조는 열린 채널을 확대하고 고충을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다. 시전상인과 공인들이 연초나 연말 정도에 궁궐에서 임금을 직접 만나 자신들의 어려움과 폐단을 말하는 자리를 정례화시켰다.
하지만 왕이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부정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기 마련이다. 부정은 매일같이 일어나는데, 왕이 1년에 몇 차례 상인들을 만나서 그들의 소리를 듣는다고 얼마나 개선되겠냐고 말할 수도 있다.
리더가 홀로 정의로운 최후의 보루가 되려고 하면 실패하기 쉽다. 그러나 리더가 끈기와 의지를 보이면, 결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실질적인 대책을 찾아내는 사람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그런 인재를 발굴해 해결책이 만들어지고 시행되기 시작하면 ‘변화’가 생겨난다.
진정한 경쟁력의 원천
영조가 상인들을 면담하고 직접 고충을 들었던 진정한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법대로 하면 된다고 안이하게 대처하지 말고 현장으로 뛰어들어서 법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해결책을 찾아내기 위해, 최소한 부당한 관행과 부조리만이라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관료가 돼보거나 혹은 그런 관리를 발굴해보라는 것이다. 영조의 이런 노력은 정조에게 계승됐고 권력과 시전 간 부조리의 온상이었던 독점 상업권을 폐지하게 됐다. 다만 이런 노력이 더 이상 계승되지는 못했다. 그것이 조선을 부패시키고 조선의 몰락을 가속시켰다.
‘법과 관행에 안주하지 말고 현장에 뛰어들어 문제와 해결책을 찾아내라.’ 오늘날 기업의 경쟁력은 한두 사람의 노력, 한두 사람의 인재로 해결되지 않는다. 얼마나 많은 사원이 이런 자세를 지니고 노력하느냐, 기업이 그런 노력을 독려하고 장려하는 분위기를 갖추고 있느냐의 싸움이다. 이것이 진정한 경쟁력이자 지속적인 성장의 비결일 것이다.
노혜경 호서대 인문융합대학 교수 hkroh68@hotmail.com
필자는 연세대 사학과에서 학사 및 석사 학위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박사(한국사학) 학위를 받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을 지냈고 덕성여대 연구교수로 활동했다. 저서로 <영조어제해제6>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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