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와 정조를 통해 본 리더십

정조의 ‘금등문서’ 공개, 유언비어와 갈등만 남긴 사도세자 죽음의 비밀

186호 (2015년 10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사도세자의 죽음은 정조에게 더할 나위 없는 개인적 불행이었지만 그는 이를 개인의 가정사로 묻고 가고자 했다. 이런 비극을 역사적으로 청산하려고 들면 엄청난 정치적 갈등과 대숙청으로 비화될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조는 훗날 사도세자의 신원 촉구에 대한 상소가 빗발치며 정국이 혼란해지자 결국 사도세자가 억울하게 죽었음을 영조가 공식적으로 시인한금등문서를 공개했다. ‘신원은 없다던 기존 입장을 번복하고신원은 하되 정치적 보복은 없다로 노선을 바꾼 것이다. 그러나 정국은 안정되기는커녕 당파 간 갈등의 골만 깊어졌다. 사도세자는 아마 정조도 죽고 노론과 남인 등 파벌이 모두 죽은그 다음 세대로 가면 분명히 신원됐을 것이다. 만약 정조가 기존 입장을 번복하지 않고 자제력을 발휘했다면 고종 때 가서야 비로소 가능했던 사도세자의장조추존이 더욱 앞당겨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편집자주

영조와 정조가 다스리던 18세기는 조선 중흥의 시대라 불립니다. 하지만 이런 타이틀은 결코 쉽게 얻어진 게 아닙니다. 노론과 소론 간 권력 투쟁이 극에 달했던 시기에 즉위한 두 왕은 군왕의 소임이란 특정 당파의 이익을 대변하는 게 아니라 도탄에 빠져 있는 조선과 백성을 위해 있는 자라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당시로선 너무나 혁명적인 선언인 탓에 수많은 방해와 반대에 직면했지만 이들은 포기하지 않고 자신들의 비전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지혜와 용기, 끈기로 무장해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끌어 낸 두 임금, 영조와 정조의 기록을 통해 진정한 리더의 자질에 대한 통찰을 얻어 가시기 바랍니다.

 

1793(정조 17) 88, 정조는 영조가 봉인해 놓은 비밀 하나를 풀어놓았다. 바로금등(金縢)문서. 금등은 금띠 혹은 쇠줄로 봉한 궤짝이라는 뜻인데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비밀이 담겨 있다는 문서였다. 이렇게 갑자기 금등문서를 들춰내놓은 데는 진한 사연이 있었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죽인 후 정조를 보호하기 위해 정조의 아버지를 바꿨다. 정조를 사도세자의 형이었던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시키고, 사도세자에 관한 이야기는 어느 누구도 입에 담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렸다. 그리고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이 문서에 적어 감추게 했다. 문서 은닉의 책임을 맡았던 사람은 당시 도승지로서 나중에 정조의 오른팔이 되는 채제공이었다. 채제공은 영조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 정성왕후의 신주 아래에 금등문서를 숨겼다.

 

그러나 정조가 사도세자의 아들인 것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정조가 즉위하자 곧바로 사도세자의 신원을 요구하는 상소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물론 진심으로 사도세자를 생각한 사람도 있었겠지만 대부분 정조에게 잘 보이려 하거나 정파적 이해가 들어간 정치적 의도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빗발치는 상소 속에 안동 유생 이응원이라는 사람이 올린 글에는사도세자가 억울하게 죽었고 그를 죽인 배후가 노론이니 사도세자를 신원하고 노론을 처벌해 달라는 적나라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영남은 남인의 근거지였고, 이 상소를 받아들인다면 할아버지 영조가 평생을 싸웠던 당쟁이 재연할 것이라고 짐작했던 정조는 이응원을 바로 죽이고, 안동을 부에서 현으로 강등시켜 버렸다.

 

사도세자의 비극, 개인의 불행을 넘은 정치적 불행

 

사도세자의 죽음은 정조에게 더할 나위 없는 개인적 불행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개인적 불행이 정조의 치세 내내 정치적 불행으로 재생산됐다는 사실이다. 정조는 사석에서 이렇게 한탄했다. “사도세자의 불행에 대해 나처럼 원통한 사람이 있는가? 나는 30년을 매일같이 원한을 삼키며 살아가고 있다.”

 

 

비극은 한 번으로 충분하며 사도세자의 비극은 개인의 가정사로 묻고 간다는 게 정조의 입장이었다. 이런 비극을 역사적으로 청산하려고 들면 엄청난 정치적 갈등과 대숙청으로 비화될 게 뻔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노론들이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하면 정조 자신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었다. 실제로 정조에 대한 암살 기도가 이미 2번이나 있었다. 하지만 권력과 이익을 탐하는 사람들에게 사도세자의 비극은 너무나 좋은 소재였다. 집권 노론층을 몰아붙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1792, 사간원의 정언이었던 유성한이 정조에게 상소를 하나 올렸는데 이 상소가 일파만파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됐다. ‘요즘 경연을 자주 땡땡이 치고 궁궐 후원에서 광대와 기생을 불러 놀자판을 만들고 계시다면서요? 이를 바로잡기 위해 간언을 드리지 못했으니 사직하겠습니다는 내용이었다. 어찌 보면 임금에게 쓴소리 한번 올리는 평이한 상소에 불과했지만 유성한이 마침노론이었기 때문에 그의 말투와 내용이 남인들로부터 집중 포화를 받게 된다. ‘유성한의 아버지와 친구들이 흉악한 말을 하고 다니고, 경종의 묘를 지날 때도 말에서 내리지 않는다는 소문까지 더해지며 유성한의 상소는 경종을 부정하고 사도세자를 무시하는 내용으로 확대 해석됐고, 사간원, 사헌부, 승정원 관료뿐 아니라 좌의정, 우의정, 형조판서에 이르기까지 모두 탄핵돼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급기야는 영남 유생의만인소로까지 퍼졌다. 1만 명이 넘는 영남의 유생들이 유성한을 처벌하고 사도세자의 신원을 촉구하는 상소에 서명한 것이다.

 

 

‘금등(金縢)문서공개의 결과는?

 

사태가 걷잡을 수없이 커지자 1793년 영의정 채제공은 사도세자를 공식적으로 신원하자는 상소를 올렸다. 채제공의 본심이 무엇이었는지는 아직 미스터리다. 채제공 역시 남인이었다. 이 기회를 발판삼아 노론을 눌러보려는 시도였을 수도 있고 소문과 억측을 도저히 막을 수 없으니 차라리 사도세자를 신원해서 사도세자가 음모론의 대상이 되는 것을 막자는 이유였을 수도 있다. 어쨌든 정조도 채제공의 생각에 동의했던 모양인지사도세자의 비극은 개인의 가정사로 묻고 간다’라는 기존의 태도를 뒤집었다. 그리고 1793 88, 영조가 봉인해놓은 금등문서를 공개했다. 금등문서엔 도대체 뭐라고 적혀 있었던 것일까?

 

血衫血衫

(피 묻은 적삼이여 피 묻은 적삼이여)

桐兮桐兮

(오동나무 지팡이여 오동나무 지팡이여)

誰是金藤千秋

(누가 안금장(安金藏)과 차천추(車千秋) 같은 충신인가)

予懷歸來望思

(내 죽은 자식을 그리워하고 있노라)

 

‘피 묻은 적삼은 어머니 정성왕후가 죽자 슬퍼하던 사도세자가 피눈물을 흘려서 옷자락이 얼룩진 것 뜻하고, ‘오동나무 지팡이는 상주지팡이를 가리킨다. 3년상이 지나서도 어머니가 그리운 마음에 지팡이를 보관하고 있었는데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던 날, 반란의 증거를 찾기 위해 동궁을 뒤지던 중 이 지팡이가 나왔고, 반대파들은 이를 보고 영조가 일찍 죽기를 바라 보관했다며 사도세자를 모함했다. 그러니 결국 금등문서는사도세자가 자신이 빨리 죽기를 바랐다는 오해 때문에 아들을 죽이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얼울한 죽음이었고, 나 영조는 이 일을 후회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영조는 남 탓도 하고 있었다. 태자를 자결하게 만든 한무제의 충신, 안금장이나 차천추 같은 신하가 있어서 죽음을 각오하고 자신을 말렸더라면 아들을 죽이는 일까지는 없었을 거란 얘기였다.

 

어쨌든 금등문서는 사도세자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사실을 영조가 공인했다는 증거였고, 정조는 금등문서를 공개한 이후 사도세자의 신원 작업을 본격화했다. ‘신원은 없다던 기존 입장을 번복하고신원은 하되 정치적 보복은 없다로 노선을 바꾼 것이다.

 

그러면 이제 소문은 잠잠해지고 정국은 안정됐을까? 안타깝게도 전혀 그렇지 못했다. 사도세자를 지지했던 쪽에서는 더 기세가 올랐고, 반대파는 불안에 떨 수밖에 없었다. 이 불안은 정조가 죽을 때까지도 사라지지 않았고, 더 큰 유언비어를 낳았다. 그중 압권이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정조의 암살설이다.

 

정조의 실수

 

‘유언비어’는 오늘날에도 아주 큰 사회문제다. 대개 SNS나 인터넷에 노출된 ‘∼카더라뉴스를 통해 확대 재생산돼 일파만파 퍼져나간다. 어떤 이들은 지성인들까지 어떻게 그런 엉터리 이야기를 쉽게 믿느냐고 말한다. 그러나 그건 소문의 속성을 잘 몰라서 하는 말이다. 소문은 지혜와 상식으로 판별하는 게 아니다. 자신의 이익과 이해관계가 그 기준이 된다. 사도세자의 죽음처럼 커다란 이해관계가 걸린 경우 소문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국가, 사회, 기업에서도 유언비어의 위력은 무서울 정도다. 기업이 터무니없는 유언비어 때문에 큰 손해를 입거나 망하는 사례도 이따금씩 발생한다. 조직 내에서는 단합을 해치고, 불필요한 갈등과 대립을 양산한다.

 

그렇다면 이런 유언비어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인간에게 이해관계가 있는 이상 유언비어를 막을 수는 없다. 특히 사도세자 사건처럼 극단적으로 잘못된 사건이 터지면 유언비어가 영원히 달라붙는다. 따라서 가능한 한 정도와 상식에 맞는 투명한 경영을 해서 사도세자의 죽음처럼 전 구성원의 이해관계가 둘로 갈리는 빌미를 주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정도경영을 해도 이런 구설수를 막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편법에 의존하지 않고 정도를 끝까지 지켜나가는 태도다.

 

정조의 큰 실수가 바로 이것이었다. 사도세자는 아마 정조도 죽고, 양쪽 파벌이 모두 죽은그 다음 세대로 가면 분명히 신원됐을 것이다. 영조가 금등문서를 남긴 이유가 바로 이때문이었다. ‘이해관계가 청산된 다음에 문제를 해결해라!’ 만약 정조가 영조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해 서두르지 않고신원은 없다던 기존 입장을 번복하지 않고 자제력을 발휘했다면, 고종 때 가서야 비로소 가능했던 사도세자의장조추존이 더욱 앞당겨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조도 인간인지라 그렇게 하지 못했다.

 

정조는 평생 분을 참고 살았다고 했는데, 어쩌면 그게 잘못일 수도 있다. 사도세자 문제는 언젠가는 분명히 해결될 문제였으니이미 해결된 것과 진배없다는 마음으로 살아갔어야 했다. 인간적으로 그것이 쉽겠냐고 반문할지도 모르지만 그렇기 때문에 군주가 아닐까? 큰 권력에는 큰 책임과 큰 고통이 따르는 법이다. 그것을 통제할 수 있어야 진정한 리더다.

 

노혜경 덕성여대 연구교수 hkroh68@hotmail.com

 

필자는 연세대 사학과에서 학사 및 석사 학위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박사(한국사학) 학위를 받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을 지냈고 강남대, 광운대, 충북대 강사로 활동했다. 저서로 <영조어제해제6>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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