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일에는 본말(本末)이 있다. 본과 말은 말 그대로 나무의 뿌리와 가지 같은 관계다. 본과 말은 둘 다 필요하다. 가지만 있고 뿌리가 없는 나무는 당연히 살아 있을 수 없고, 뿌리만 있고 가지는 없는 것 역시 나무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일에는 본과 말이 유기적으로 구성돼 있다. 중요한 것은 일에 있어서 어떻게 본말을 안배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를 두고 <대학>에서는 본말을 잘 판단해 조리 있게 실천하는 것을 도(道)를 행하는 지름길이라고 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상당 부분 본말이 전도된 현실에서 살고 있다. 몇 가지만 예를 들어 보자. 시험은 공부의 정도를 측정하기 위해 있는 것이니 공부가 본이고 시험이 말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학생들은 시험을 위해 공부해야만 하니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일을 하는 것은 창조적 행위에 동참하는 것이다. 거기에서 즐거움과 성취감을 누리는 것이 본이고, 돈을 버는 것은 그에 따른 부수적인 보상으로서 말에 해당한다. 운동을 하는 것은 건강하기 위해서지 미용을 위해서가 아니다. 외면을 잘 꾸몄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건강하기 때문에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말단을 근본인양 착각한 채 시험점수를 높이기 위해, 돈을 많이 벌기 위해, 예뻐지기 위해, 공부하고 일하고 운동한다. 더욱 큰 문제는 그러한 생각이 지극히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자리’에 대해 말해보자. 어떤 자리에 앉는 것은 그 책임을 담당한다는 것을 뜻하지, 권위와 권력을 누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책임을 맡는 것이 본이고, 권위와 권력은 그 책임 때문에 주어진 부수적 보상이다. 오늘날, 자리를 노리는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책임의식은 온데간데없고 온통 젯밥에만 관심을 쏟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수많은 사람과 사안을 책임져야 하는 무거운 짐을 어떻게 선뜻, 때로는 무리하게 꿰차려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무거운 ‘자리’에 합당한 사람을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진취적이고 도전적이며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일까?
무용(武勇)이 뛰어나기로 유명한 자로(子路)가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고자 공자에게 질문한 적이 있다. “선생님이 삼군(三軍)을 통솔하게 된다면 제자 중 누구와 같이하시겠습니까?” 공자의 답은 자로의 기대를 크게 벗어났다.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고 맨몸으로 황하를 건너다가 죽어도 후회하지 않을 무모한 자와는 함께하지 않을 것이다. 일에 임해서 두려워할 줄 알고, 계획을 잘 세워서 일을 완성할 줄 아는 자와 함께할 것이니라.” 초개처럼 목숨을 버릴 수 있어야 하는 군 통솔관의 자리에조차 신중하고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이 적합하다고 한 것은 그만큼 많은 사람의 운명을 맡고 있다는 ‘책임’을 강조한 것이 아닐까?
본인은 알기 어렵겠지만 제삼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 ‘자리’에 적합한 사람을 가려내는 방법이 하나 있다.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바로 얼마나 그 ‘자리’, 혹은 자기 자신을 버릴 수 있는 준비가 돼 있는지를 보는 것이다. 이 점에서 제자들이 서술한 공자의 모습을 하나의 기준으로 삼을 만하다. “선생님은 네 가지를 내려놓으셨으니, 자기 의지대로 하려는 것이 없었고,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것도 없었으며, 고집하는 것이 없었고,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도 없었다.”
공자처럼 이 네 가지를 다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이야 바랄 것이 없겠지만 그런 사람이 과연 있을까? 아니면 한두 가지라도 내려놓을 수 있을까? 리더라면 스스로 돌이켜봐아야 할 것이고, 그룹의 구성원이라면 자신의 리더를 한번 유심히 살펴보자. 과연 그 자리에 합당한 사람인지.
이치억 성신여대 동양사상연구소 연구교수
필자는 퇴계 선생의 17대 종손(차종손)으로 전통적인 유교 집안에서 나고 자라면서 유교에 대한 반발심으로 유교철학에 입문했다가 현재는 유교철학의 매력에 푹 빠져 있다. 성균관대 유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성신여대 동양사상연구소에서 연구 활동을, 성균관대·동인문화원 등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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