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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 가문의 창조 경영 리더십 10

미완성作 많은 다빈치, 버림 받다

김상근 | 73호 (2011년 1월 Issue 2)
 
 
 
편집자주 15∼17세기 약 300여 년간 이탈리아 피렌체 경제를 주름잡았던 메디치 가문은 르네상스의 탄생과 발전을 이끌어 인류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 놓았습니다. 르네상스 시대를 연구해온 김상근 연세대 교수가 메디치 가문의 창조 경영 코드를 집중 분석합니다. 메디치 가문의 스토리는 창조 혁신을 추구하는 현대 경영자들에게 깊은 교훈을 줍니다
 
 
로렌초, 인재를 소중히 여긴 리더
1492년, 로렌초 데 메디치(Lorenzo de’ Medici, 1449-1492)가 카레지 별장에서 눈을 감았다. 불과 43살의 젊은 나이에 요절에 가까운 임종을 맞이한 것이다. 약골이었기 때문에 늘상 침대에 누워있었던 아버지 피에로 데 메디치의 뒤를 이어 가문의 최전성기를 구가했던 메디치가의 젊은 수장이 세 아들과 네 딸이라는 대가족을 지상에 남겨놓고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감했다. 로렌초로부터 변함없는 우정과 파격적인 예우를 함께 받았던 인문학자 폴리지아노(Poliziano, 1454-1494)는 자신의 주군(主君)이자 절친한 벗이었던 로렌초의 임종을 끝까지 지켰다. 폴리지아노는 라틴어로 쓴 명문장으로 인문학자와 예술가를 정성껏 후원하고, 그들의 학문과 예술을 사랑했던 친구의 죽음을 이렇게 애도했다.
 
“로렌초 데 메디치는 모든 위대한 것의 현신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 그의 지능은 매우 탁월했으며, 생각이 유연하고 무척 사려 깊은 사람이었다. 어떤 사람은 한 가지 전문 영역에서 두각을 나타내지만, 그는 모든 분야에 통달했던 사람이었다. 이 세상 어떤 사람도 그가 품었던 고결함, 정의로움, 깊은 신앙심, 그리고 진중함을 따라갈 수 없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가장 좋아하는 인물로 삼았다. 그의 우아함과 친절한 태도는 우리 사회의 모든 사람들에게 선한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그는 학자들의 열렬한 후원자였다. 학자들에게 거의 경외에 가까운 존경심을 보여주었다. 그는 모든 세상의 지혜를 구하기 위해 엄청난 액수를 아낌없이 사용했다. 그는 라틴어와 그리스어로 된 값진 문헌에 아낌없이 돈을 썼다. 지금 우리 시대, 아니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기를 완성시킨 것은 로렌초가 학문 발전에 후원을 아끼지 않은 덕분이다. 이제 그가 가고 없으니, 그 상실감에 우리는 모두 큰 슬픔에 빠져든다.”
 
폴리지아노의 추도사에서 언급돼 있는 것처럼 로렌초는 인문학자와 예술가들의 ‘열렬한 후원자’였다. 그는 학자들에게 거의 경외에 가까운 존경심을 보여주며, 인재를 소중히 여겼다. 그의 자비로운 후원을 통해 미켈란젤로의 예술이 탄생했고 마르실리오 피치노(Marsilio Ficino, 1433-1499)의 신플라톤주의 사상이 부활할 수 있었다. 그의 할아버지였던 코시모 데 메디치가 플라톤 아카데미의 창립자였다면, 이를 발전시킨 사람은 손자 로렌초였다. 해마다 플라톤의 생일이 되면 카레지 별장에서는 학자들이 참여하는 철학의 향연(Symposium)이 베풀어졌다. 그 지적 향연의 잔치를 주도한 사람은 인재를 소중히 여겼던 로렌초였다.
 
당시 피렌체에서 활동하던 거의 모든 인문학자와 예술가들이 로렌초의 후원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각이면 조각, 공예품이면 공예품, 다루지 못하는 것이 없었던 최고의 장인(匠人) 베로키오(Verrocchio, 1435-1488)는 사실 거의 모든 작품을 로렌초를 위해 제작했다. 젊은 시절의 보티첼리(Botticelli, 1445-1510)가 메디치 가문을 위해서만 그림을 그렸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비너스의 탄생>이나 <프리마베라>와 같은 보티첼리의 초기 명작은 모두 메디치 가문을 위해 그린 것이다. 그 외에도 필리피노 리피(Filippino Lippi, 1457-1504), 루카 시뇨렐리(Luca Signorelli, 1445-1523), 기를란다요(Ghirlandaio, 1449-1494), 페루지노(Perugino, 1446-1524) 등이 모두 로렌초의 은덕을 입었다. 인재를 소중히 여기는 리더 로렌초가 없었다면, 15세기 후반의 피렌체는 르네상스라는 찬란하고 아름다운 문명의 꽃을 피워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단 한 명의 예외가 있다. 바로 르네상스의 천재로 알려져 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다. 다빈치는 생애 첫 30년 동안 피렌체에서 성장하고 예술가로서 활동했지만 메디치 가문으로부터는 거의 무시에 가까운 푸대접을 받았다. 피렌체 출신의 다른 예술가들이 로렌초로부터 파격적인 대우를 받는 동안 천하의 다빈치는 거의 찬밥 신세를 면치 못했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메디치 가문의 리더들은 당대에 이미 천재의 대명사로 불렸던 다빈치를 왜 등용하지 않았을까? 메디치가 다빈치를 내친 이유는 무엇일까?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굴욕
댄 브라운의 베스트셀러 <다빈치 코드>의 대대적인 성공과 톰 행크스가 주연을 맡았던 동명 영화의 히트에 힘입어 다빈치의 유명세는 가히 절정에 올라있다. 세계 10대 천재 중에서 가장 지능지수(IQ)가 높은 인물로 선정되기도 했고, 세계 각국에서 다빈치 특별전시회가 열리고 있을 만큼 인기가 높다. 다빈치가 연구했던 분야는 거의 모든 학문 분야라고 할 수 있다. 미술은 기본이고, 건축, 미학, 음악, 요리, 수리학(水理學), 생물학, 해양학, 해부학, 지리학, 지도제작술, 기계 공학, 동물학, 지질학, 무기 제작, 수학, 항공학 등에 관심과 두각을 나타냈으며 자전거, 항공기(헬리콥터), 잠수함, 전차 등의 모델을 고안했던 만능인(萬能人)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왜 메디치 가문의 리더들은 이런 다재다능한 피렌체의 천재를 후원해주지 않았던 것일까?
 
1452년, 레오나르도는 빈치(Vinci)라는 마을에서 약 2∼3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안키아노의 작은 농가에서 태어났다. 널리 알려진 대로 다빈치는 사생아였다. 법률 공증인이었던 아버지는 다빈치가 태어나던 해에 피렌체로 이주하면서 다른 여성과 결혼했다. 친어머니와 헤어져 의붓어머니 밑에서 자랐던 다빈치는 피렌체에서 예술가의 길에 들어섰고,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였던 베로키오의 공방에 맡겨졌다. 다빈치는 준수한 외모를 지녔고, 당시로서는 희귀한 왼손잡이였으며, 관찰과 사색에 몰두하는 독특한 아이였다. 건축을 제외한 거의 모든 예술 장르를 넘나들었던 베로키오의 공방에서 다빈치는 성실하게 수련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1  1470년 즈음, 도제 생활을 거의 마쳐가던 다빈치는 스승 베로키오와 함께 <그리스도의 세례>를 그렸다. 르네상스 예술가들의 생애에 대한 최초의 기록을 남긴 조르조 바사리에 따르면 베로키오는 십대 소년에 불과한 제자의 그림 솜씨를 보고 붓을 꺾었다고 한다. 실제로 작품 왼쪽 하단에서 중앙을 바라보고 있는 천사의 묘사는 다른 부분과 차별화된 섬세함을 보여주고 있는데, 다빈치의 솜씨가 분명해 보인다.
 
다빈치는 정확하게 20살이 되던 해(1472년)에 스승 베로키오의 공방에서 도제생활을 마치고 화가로 독립했다. 그는 자신의 수첩에 “1472년 6월 21일, 레오나르도 디 세르 피에로 다빈치, 화가”라고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베로키오의 공방에서 도제 수업을 마친 신예작가 다빈치에게 특별한 작품 주문이 들어오지 않았다. 베로키오의 제자 출신이라면 예술가로서의 성공이 보장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함께 동문수학했던 보티첼리나 페루지노의 즉각적인 성공이 이를 증명한다. 그러나 같은 공방에서 수련을 받으며 스승에게 충격까지 안겨 주었던 다빈치는 피렌체의 예술 후원자들로부터 특별한 후원을 받지 못했다. 동료들의 승승장구를 지켜보던 다빈치에게는 굴욕적인 경험이었을 것이다.
 
1476년에 발생한 고소사건 때문에 다빈치는 궁지에 몰리게 된다. 피렌체에서는 시민들이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사법부의 수사를 의뢰할 수 있는 부키 델라 베리타(Buchi della Verita, 진실의 입)란 제도가 있었다. 이 제도를 이용해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익명의 고발자가 다빈치를 포함한 몇 명의 청년들을 동성애 혐의로 고발한 것이다. 다빈치 외에 고발된 사람은 금 세공사였던 야코포 살타렐리와 바르톨로메오 디 파스퀴노, 그리고 메디치 가문의 사돈이었던 리오나르도 데 토르나부오니가 포함됐다. 이들은 ‘동성연애자’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검은 옷을 입은 남자’로 고소를 당했다.
 
동성애 혐의로 고발을 당했지만 다빈치는 처벌 받지 않았다. 로렌초 데 메디치의 어머니가 바로 토르나부오니 가문 사람이었기 때문에, 고소 사건 자체가 무마됐다. 피렌체 정치권력을 한 손에 쥐고 있던 로렌초가 자신의 어머니 가문에 먹칠을 하는 사건을 확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생아라는 태생적 약점을 안고 있던 다빈치에게 이것은 치욕스러운 경험이었을 것이다. 이런 수치스러운 사건에 연루됐기 때문인지 메디치 가문은 다빈치를 등용하거나 작품을 의뢰하지 않았다. 1478년 유명한 ‘파치가의 음모’가 저지되고 암살자들이 사형에 처해졌을 때 로렌초는 그 현장 기록을 모두 보티첼리에게 맡겼다.2  같은 공방 출신의 보티첼리가 메디치 가문으로부터 파격적인 후원을 받는 것을 지켜보면서 다빈치는 먹먹한 가슴을 다시 한 번 쓸어내렸을 것이다. 해부학에 관심을 보이며 신체 데생을 많이 했던 다빈치는 메디치 가문의 주문을 고대한 것으로 보인다. 메디치 가문으로부터 공식적인 주문을 받지 못했지만 다빈치는 혼자서 <목 매달린 베르나르도 바론첼리의 시체>를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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