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클이 타이어를 만났을 때
햄버거는 손으로 집어 먹어야 하는 다소 불편한 음식이다. 한국에서 파는 햄버거는 그래도 사이즈가 작아서 먹을 만하지만 외국에서 파는 햄버거를 먹는 일은 곤혹스럽다. 한 입에 넣기엔 빵이 너무 크고 케첩과 마요네즈가 옆으로 줄줄 흘러내리기도 한다. 가장 당혹스러운 것은 내용물이 빵 사이를 이탈해 밖으로 삐져나오는 현상이다.
햄버거에 들어가는 내용물은 저민 고기, 양배추, 토마토, 양파, 피클(pickle)이라 불리는 오이다. 이 햄버거용 피클(오이)을 생산, 판매하는 블라식(Vlasic)의 직원들은 햄버거용 피클이 빵 사이로 삐져나오는 불편을 해소하기 위한 새로운 아이디어가 필요했다. 이 회사의 창의적인 직원들은 이른바 ‘생각의 융합’을 통해 이 문제를 단숨에 해결했다. 그들은 피클이 빵 사이로 삐져나오는 현상을 미끄러지는 현상으로 보고, 차량용 타이어 바퀴에 노면 미끄러짐 방지를 위해 규칙적으로 홈을 파는 것을 피클에 응용했다. 피클을 타이어로 생각하고 표면에 홈을 파서 빵으로부터의 미끄러짐을 방지하는 아이디어였다. 이 아이디어는 특허로도 출현될 만큼 대박이었다. 타이어와 오이를 결합시킨 생각의 융합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더 이상 피클은 빵 사이로 미끄러지지 않았다.
프란스 요한슨이란 전문 경영 컨설턴트가 있다. 이 사람이 집필하고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이 출간한 <메디치 효과>는 바로 이런 생각의 융합을 글로벌 시대의 새로운 경영 기법으로 소개하는 책이다. 다양한 생각과 상이한 분야가 만나서 완전히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현상을 그는 ‘메디치 효과(Medici Effect)’라고 불렀다. 동질적인 것보다 이질적인 것에 희망을 두고 기존의 생각에 다른 생각을 융합시키고자 노력했던 메디치 가문의 노력을 주목했다는 점에서 그의 책은 일독(一讀)의 가치가 있다. 실제로 메디치 가문은 다양한 생각, 상이한 분야가 서로 만나서 충돌을 일으키도록 유도함으로써 새로운 시대의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동서 사상의 빅뱅을 유도했던 메디치 가문의 융합 리더십 덕분에 이른바 전성기 르네상스(High Renaissance)의 찬란한 예술적 결과물들이 탄생할 수 있었다.
동서양 사상의 대 융합을 주도하다
1434년, 코시모는 유배지였던 베네치아에서 고향 피렌체로 귀환했다. 코시모를 도시의 반역자로 모함하고 유배시켰던 알비찌 가문의 사람들은 이제 자신들이 유배자 신세가 되었다. 피렌체 시민들은 유배지에서 귀환한 코시모를 도시의 통치자인 ‘제1시민’으로 인정한다. 1436년은 피렌체 시민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 해였다. 오랜 세월, 미완성으로 남아있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의 거대한 돔이 브루넬레스키의 설계와 공사로 완공된 해이기 때문이다. 코시모는 이 역사적인 준공식 행사를 주도하면서 피렌체의 실질적인 리더로 부상했다.
코시모는 신중하고 사려가 깊은 사람이었다. 개인의 알량한 도덕성으로는 자신에게 맡겨진 지도자의 책무를 감당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려운 결단, 남들이 쉽게 하지 못하는 결단을 내려야하는 것이 리더의 책무다. 그는 피렌체의 외교정책을 친(親) 밀라노(스포르차) 정책으로 수정하고 이탈리아의 평화를 위해 ‘힘의 균형’ 정책을 펼친다. 15세기 중반, 전운이 감돌던 이탈리아에 일시적인 평화가 도래한 것은 코시모의 현명하고 냉철한 외교정책 때문이었다.
코시모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일시적인 평화는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일반 시민들의 정치적 자유와 권익에 대해 남다른 자부심과 열정을 가진 피렌체에서 언제까지 메디치 가문의 독점적인 리더십이 유지될지도 의문이었다. 실제로 그는 “50년 내에 우리 메디치 가문은 다시 피렌체에서 축출 당하게 될 것이다”고 예측하곤 했다.1
무엇인가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했다. 코시모는 시대의 평화나 기업의 발전, 가문의 보존은 모두 현상의 문제라고 보았다. 이런 현상은 지엽적인 것으로 모두 어떤 정신의 표면적 결과일 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이 문제라고 여겼다.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이 바로 정립된다면 정치적 평화와 경제적 발전, 가문의 지속가능은 자연스러운 결과로 나타날 것이라고 보았다. 새로운 시대를 경륜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시대를 이끌 수 있는 새로운 정신이 필요하다. 옛 시대의 논리로는 새 시대를 견인해 낼 수 없다.
코시모는 사상의 대융합, 새로운 정신의 빅뱅을 추진한다. 중세 유럽의 1000년 역사를 지탱해 왔던 철학기조에 새로운 사상의 자양분을 공급하여 사람과 생각의 충돌을 유도하기로 한 것이다. 코시모는 평소 친분이 있던 교황 유제니우스 4세(Eugenius IV)를 설득하여 페라라에서 지지부진하고 있던 종교회의 장소를 피렌체로 옮길 것을 제안한다. 당시 페라라에서는 동방 비잔틴 교회(Eastern Byzantine Church)와 서방 가톨릭 교회 간의 종교 회담이 열리고 있었다. 이 두 교회는 11세기 이래로 분열되어 거의 원수처럼 지내던 사이였다. 제3차 십자군 전쟁 때 유럽의 십자군들이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해 많은 사람을 죽이고 엄청난 재물을 노략질해 갔다. 유럽의 가톨릭교회는 동방 비잔틴 교회를 이단이라고 몰아붙였고, 동방 비잔틴 교회는 유럽 가톨릭교회를 권력의 시녀라고 비난해 왔다.
이러한 동서방 교회의 극단적인 대립과 반목은 15세기에 들어서면서 조금씩 완화됐다. 공동의 적이 생겼기 때문이다. 공동의 적은 지금의 터키 지방을 차지하고 있던 이슬람 세력인 오스만튀르크 왕국이었다. 이 무슬림 세력은 동방 비잔틴 제국이 차지하고 있던 지중해 동부 지역 무역거래로 인한 이익에 눈독을 들이며 서진(西進)을 계속했다. 이들의 공세로 인해 1000년의 영광을 지켜온 동방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였다. 다급해진 동방 비잔틴 제국의 황제(요한 팔레오로구스 8세)와 총대주교(요셉 2세)는 서방 가톨릭교회의 지원과 유럽 군주들의 군사적인 지원이 필요했다. 그래서 소집된 동서방교회의 화해 협상이 바로 카라라 종교회의였던 것이다. 그러나 마침 그 도시에 흑사병이 창궐하고 종교 회담에 뚜렷한 성과가 나타나지 않자 코시모는 직접 나서서 종교회담 장소를 피렌체로 바꿔버렸다. 당시 교황청은 재정적으로 열악한 상태였기 때문에 장소를 바꿔가면서 종교회의를 계속할 여유가 없었다. 코시모는 총 700명에 달하는 동방 비잔틴교회의 대표단에게 지불할 여비와 생활비, 회담에 드는 모든 비용을 본인이 부담하겠다고 약속한다.2
그래서 열린 것이 1439년의 피렌체 공의회(Council of Firenze)다. 회담 장소는 피렌체 도심 북서쪽에 있는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이었다. 이곳에서 동서교회 화합과 일치를 모색하는 역사적인 피렌체 공의회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