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8년 11월. 7년간의 임진왜란이 이제 막을 내리고 있었다. 이 한 달은 전체 전쟁 기간 중에서도 가장 긴장되고 극적인 기간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죽음으로 일본군은 조선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공격보다 더 어려운 것이 철수다. 게다가 바다(엄밀히 말하면 전라도 남단 해역)는 조선 수군이 지배하고 있었다.
이 철수 과정에서 사천에 주둔한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의 부대가 가장 큰 곤경에 처해 있었다.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일본군은 여러 부대가 있지만, 주력은 카토 키요마사(加藤淸正)와 고니시의 부대였다. 군인으로서는 카토가 훨씬 유능하긴 했지만, 점령 범위가 넓고 세력이 가장 강했던 부대는 고니시의 부대였다.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은 바로 이 고니시를 포위하는 데 성공했다.
노량에서의 최후 결전
고니시는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陳璘)과 이순신에게 사신을 보내고 뇌물까지 바쳐가면서 퇴로를 열어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이순신의 단호한 거절로 이 제안은 실패했다. 진린도 퇴로를 열어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뇌물을 받고 일본군 4명이 탄 작은 배 하나가 만을 빠져나가는 것을 허용했다. 이 배가 남해에 주둔한 일본 수군에게 고니시의 위기 상황을 보고했다.
일본군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병력을 구하기 위해 일본 수군의 주력이 총출동했다. 수군 2만 명에 동원한 배만 500여 척이 넘었다. 이순신과 진린의 연합 함대는 400척이 못 되었는데, 안타깝게도 조선 함대는 80여 척밖에 되지 않았다. 일본 수군의 출동을 감지한 조명 연합 함대는 노량에서 이들을 요격하기로 결정했다. 조선측 기록에 의하면 진린은 전투를 피하려고 했는데, 이순신이 강경하게 요청해서 작전이 결행됐다고 한다. 그곳은 약 300년 전 정지의 조선 수군이 왜구의 함대를 수장시킨 바로 그 장소였다.
11월 19일 새벽 2시경 지금의 남해대교가 놓여진 협로 근처에서 총성이 울렸다. 이렇게 시작된 해전은 임진왜란사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격렬했던 전투로 발전한다. 양국의 장병들 모두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치르는 마지막 전투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한 계단 앞에 펼쳐진 사선은 너무나 깊고 처참했다. 양군은 모두 사력을 다해 싸웠다. 일본군 병사들은 바다 건너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조선의 병사들은 침략자를 격멸하고 승리자로서 귀환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