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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합리성 이긴 동양의 ‘전략적 의도’

김용성 | 36호 (2009년 7월 Issue 1)
객관적 열세를 뛰어넘게 만드는 전략적 의도
1989년, 개리 해멀과 C.K. 프라할라드는 하버드비즈니스리뷰(HBR)에 ‘전략적 의도(Strategic Intent)’라는 논문을 실었다. 이 논문은 서구의 비즈니스 리더 사이에서 큰 화제가 됐다. 동양 기업들, 특히 일본 기업들이 자원의 빈곤함을 극복하고 어떻게 세계적 기업으로 성공했는지를 설명했기 때문이다.
 
전략적 의도란 현재의 자원과 역량으로는 이루기 힘들지만, 미래에 야심 차게 이뤄야 할 도전적 꿈을 말한다. 저자들은 전략적 의도가 단순한 비전이나 전략, 또는 사업 구조와 다르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전략적 의도란 단순히 ‘미래에 이러이러한 모습을 갖추자’는 것을 넘어 장기 목표에 대한 광적인 집착을 뜻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전략적 의도라는 개념은 합리주의적 전통을 가진 서구 기업인들에게는 동양 기업 특유의 ‘가미카제 특공대’식 무모함으로 보였다. 따라서 일본 기업의 전략적 의도는 서구 기업의 경계 레이더에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방심했던 서양 기업들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일본 기업들이 미국 기업을 사들이고 있었다. ‘믿을 수 있는 엔진 설계 업체’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모터사이클 시장에 진입한 혼다를 미국 기업들이 무시한 게 대표적 사례다.
 
해멀과 프라할라드는 논문에서 “기업은 성공을 위해 전략적 의도를 갖고 목적과 수단을 조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이 주장은 우리에게는 꽤 당연하게 들린다. 하지만 서구 비즈니스 리더들은 이를 매우 신선하게 받아들였다. 그들은 서양인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전략적 의도’라는 개념이 어떻게 동양 기업의 경쟁력을 키웠는가에 주목했다. 저자들은 분기별 수익성 강화에 매달린 미국 기업들이 단기적 시각에서 벗어나는 못하는 사이, 일본 기업들은 20여 년 동안 모든 계층의 직원들이 글로벌 시장에서의 리더십 확보라는 목적에 집착했다고 주장했다.

 

 

자원만으론 성공할 수 없다
미국 기업의 리더들은 경쟁 전략을 세우는 과정에서 ‘눈에 보이는’ 경쟁 상황과 경쟁자의 분석에만 주력했다. ‘자원 기반 경쟁 전략’을 금과옥조로 여기던 그들에게는 자원의 크기(인력, 생산 능력, 자금력)가 곧 경쟁력의 크기였다. 그들은 경쟁사가 현재 보유한 자원을 보면 자신들의 역량을 쉽게 가늠할 수 있다고 믿었다.
 
물론 자원과 역량 없이 경쟁에 참여하면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상식이다. ‘솜주먹’으로 권투를 할 수 없고, 적은 폐활량으로 마라톤을 할 수 없다. 기업도 이와 마찬가지다. 연구개발(R&D) 역량이 없는 기업이 첨단 기술 사업에 뛰어들거나, 물류가 허약한 기업이 우유나 두부처럼 유통에 주의가 필요한 식품을 다루면 성공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자원만 있으면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지극히 당연한’ 논리는 일본의 군소 불도저 생산업체인 고마쓰가 어떻게 불과 20년 만에 캐터필러를 ‘포위’했으며 캐논이 어떻게 제록스를 밀쳐냈는지를 설명할 수 없었다(당시 고마쓰는 ‘캐터필러를 포위하라[Encircle Caterpillar]’를, 캐논은 ‘제록스를 제쳐라[Beat Xe-rox]’를 전략적 목표로 삼고 있었다).
 
시장에서 1, 2위 하는 사업만 남기고 나머지는 철수하는 미국 기업의 논리와 달리, 일본 기업들은 시장에서 전혀 알려지지 않은 미약한 존재임에도 무모하리만큼 과감한 도전을 시도해 성공했다.
 
보이지 않는 정신의 힘을 믿는 동양인
동양인들(논문은 구체적으로 일본인과 한국인을 거론함)은 어떻게 목표를 향한 무모한 도전을 하여 성공할 수 있었을까? 많은 학자들이 ‘정신의 힘을 믿는 태도’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정신일도 하사불성(精神一到 何事不成)’이라는 말은 정신을 집중하면 못 이룰 것이 없다는 동양적 사고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반면 서양인들은 르네상스 이후 합리성에 대한 믿음을 계승해왔다.
 
한 사람이 한 가지 목표를 10년 동안 추구해도 대단한데, 수천 명이 한 가지 목표를 20년 이상 줄기차게 추구한 후 세계적 수준에 도달한다면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논문에서 소개한 일본 기업들에서는 모든 조직원이 20년 이상 세계 최고의 기업이 되겠다는 ‘전략적 의도’를 버리지 않았다.
 
동양 기업의 리더들은 조직원들이 명분, 즉 전략적 의도를 갖고 논리적으로는 불가능한 목표에 정서적으로까지 몰입하도록 인도하는 데 능하다. 물론 이는 막연한 희망을 제시하는 것과 질적으로 차이가 있다. 조직이 수십 년 넘도록 하나의 목표에 매진하도록 만드는 리더는 다음 3가지 속성을 지닌다.
 
방향 감각 전략적 의도가 지향하는 미래의 모습은 한두 해 앞이 아닌, 먼 미래의 시장 변화와 그 시장에서 기업이 추구해야 할 목표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일본 기업에 대한 연구가 퍼지면서 많은 경영 작가와 컨설턴트들은 영감을 불어넣는 목표의 중요성을 많이 강조했고, 이제는 많은 기업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비전이나 BHAG(Big Hairy Audacious Goal)를 명시화하고 있다.
 
겸손한 유연성 뛰어난 리더는 자신은 물론 조직원들이 누구에게라도 머리 숙여 배우고,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정신을 불어넣는다. 이는 목표 달성을 향해 가는 혁신의 여정에서 조직이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1980년대 일본 기업 약진의 비결을 연구하던 미국 경영학자들은 일본 기업들이 탁월한 품질의 비결을 미국에서 배워갔음을 알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에서 미국에 무릎을 꿇었던 일본의 리더들은, 미국을 이기기 위해 품질 경영 전문가 W. 에드워즈 데밍을 초청해 품질 관리 이론을 배웠다. 이런 지식에 특유의 장인 정신을 결합하자 세계 최고 품질의 제품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결국 일본인들은 품질로 미국을 제칠 수 있었다.
 
사명감 전략적 의도를 가진 리더는 조직이 추구하는 목표가 조직원들의 개인적 희생을 통해서라도 꼭 이뤄야 하는 사명이라는 점을 설득력 있게 전한다. 전략적 의도로 무장한 리더들은 종종 이윤 추구가 기업의 목적이 아니라고 말한다. 미국 기업의 사장들은 기업의 목표를 주주 이익의 극대화 관점에서 이야기한다. 반면 전략적 의도를 가진 동양의 리더는 “우수한 성능의 의약품으로 인류를 질병에서 해방시킨다”거나,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기업이 된다” “한국의 위상을 전 세계에 드높이겠다”는 식의 답을 한다. 사람들은 종종 물질적 풍요 이상의 목표를 추구하는 자신의 모습에서 희열을 느낀다는 사실을 뛰어난 리더들은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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