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禹임금, 아버지의 실패 딛고 소통의 날개 달다

김영수 | 33호 (2009년 5월 Issue 2)
중국 최초의 왕조인 하(夏)나라를 건국한 사람은 우(禹) 임금이다. 당시 우 임금은 해마다 홍수로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했던 황하(黃河)의 물길을 다스리는 치수 사업을 성공적으로 끝냈다. 그 결과 순(舜) 임금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하나라의 시조가 되었다.
 
우는 아버지인 곤() 이 하던 치수 사업을 물려받았다. 곤은
치수에 실패한 죄로 우산(羽山)으로 추방됐다가 그곳에서 처형당했다. 곤의 죽음은 당시 요 임금에 의해 후계자로 지명됐던 순의 정치적 의지가 반영된 결과였다. 말하자면 순이 잠재적 대권 경쟁자였던 곤을 치수 사업의 실패를 구실로 제거한 것이다. 게다가 순은 치수 사업의 다음 책임자로 다른 사람도 아닌 곤의 아들 우를 지명하고, 그에게 치수 사업을 계속 맡겨 자신의 감시 아래 두는 고도의 정치력을 발휘했다.
 
이렇듯 아버지의 비극적인 죽음과 순의 정치적 견제 속에서 우는 장장 13년 넘게 집을 떠나 치수 사업에만 전념했다. 그는 13년 동안 3번 자기 집 앞을 지나면서도 집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결혼 4일 만에 집을 떠나는 바람에, 나중에 태어난 아들 계(啓)의 얼굴도 못 봤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다.
 
우는 치수 사업을 성공시켜야만 한다는 강박관념과 순의 극심한 정치적 견제 속에서도 리더로서의 자질을 키웠다. 마침내 순으로부터 대권을 물려받아 하 왕조를 건국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엄청난 인내심으로 자신의 리더십을 단련했다.
 
소통의 리더십을 체득하다
우는 아버지의 치수 사업을 재점검하면서 실패 원인을 찾았다. 아버지 곤은 물길을 제방으로 막아 넘치지 못하게 하는 ‘봉쇄’를 사업의 기조로 삼았다. 이것이 실패의 결정적 원인이었다. 제방을 제아무리 높고 튼튼하게 쌓아도 하늘에서 내리는 비의 양을 예측하지 못하면 언제까지고 홍수를 막을 수 없었다. 고심 끝에 우는 봉쇄가 아닌 ‘소통’의 방법을 택했다. 즉 큰 물줄기 사이로 작은 물줄기를 여러 갈래 만들어 물이 고루 흘러 나가도록 함으로써 황하의 홍수를 다스렸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우는 치수 사업보다 더 큰 것을 배웠다. 즉 제방으로는 물줄기를 영원히 막을 수 없으며, 막기보다는 터주는 게 훨씬 힘이 덜 들고 효율적이라는 사실이다. 이를 통해 우는 백성들의 민심 또한 그와 같음을 깨달았다. 외지에서 백성들과 삽과 괭이를 들고 함께 노동하며 온몸으로 체득한 이치였다.
 
사실 우는 13년 동안 노심초사하며 힘겨운 노동과 극심한 스트레스로 몸이 바짝 마르고 목은 가늘어졌다. 입은 새부리처럼 뾰족해졌고, 다리에는 무좀과 마비 증상 등 각종 질병이 생겨 걸음걸이가 불편해졌다(여기서 ‘Y’자 모양의 ‘우의 걸음걸이’라는 뜻의 ‘우보[禹步]’라는 말이 생겼다). 정강이 털은 다 빠져 더 이상 자라지 않게 되었고, 허벅지에는 살이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의 실패를 거울삼아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자세로 백성들과 소통함으로써 민심을 얻는 가장 보람찬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오음’으로 귀를 열다
대망의 권좌에 오른 우 임금은 백성들의 생활을 살피기 위해 틈만 나면 논밭에서 시간을 보냈다. 조정의 일은 유능한 인재들을 초빙해 맡겼다. 그는 식사를 하다가도 찾아온 인재를 맞이하느라 10번이나 먹던 음식을 뱉었다고 한다. 그만큼 겸손하고 열정적이며 열린 자세로 인재들을 발탁했다.
 
우 임금은 치수 사업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백성의 의견을 제대로 듣기 위해 ‘오음(五音)’이라는 여론 청취 방법을 생각해내 실천에 옮겼다. 오음이란 다섯 종류의 악기 소리를 뜻한다. 우 임금은 이 다섯 종류의 악기를 궁궐 문 앞에 걸어놓고 자신에게 할 말이 있거나 정책을 건의하러 온 사람들과 인재들을 맞이했다고 한다. 오음의 종류와 그 역할은 다음과 같다.
 
고(鼓·북): 자신에게 이치를 가르치려 할 때 두드리는 악기
종(鐘·종): 의로운 행위가 무엇인지 말해주고 싶을 때 치는 악기
탁(鐸·방울): 잘 모르고 있는 일들을 알려줄 때 흔드는 악기
경(磬·경쇠): 걱정하고 있는 급한 일을 알리려고 할 때 치는 악기
도(鞀 ·손잡이가 긴 흔드는 북): 진행 중인 소송에 대해 말하려 할 때 흔드는 악기
 
공자의 제자들 가운데 자로(子路)는 성격이 급하고 강직했지만 누구든 자신의 잘못을 지적해주면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우 임금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문과즉희(聞過則喜)’라는 고사성어가 나왔다. 오음을 통해 백성들의 마음을 헤아리려 했던 우 임금의 리더십은 지금 봐도 여간 참신하지 않다.

백성이 죄를 짓는 것은 나 때문이다”
우 임금은 백성들을 제 몸처럼 아꼈다. 길에서 끌려가는 죄인을 보고 울음을 터뜨린 일화는 그의 성품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측근들이 “그저 죄인일 뿐인데 왜 우시느냐”고 묻자, 우 임금은 “천하에 도리가 있어 제대로 시행된다면 백성들이 왜 죄를 짓겠는가? 천하가 무도하니 선한 사람에게까지 죄가 미친 것 아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이어 백성의 마음을 자기 마음처럼 여기지 못하는 자신의 통치와 부덕을 반성했다. ‘백성이 죄를 짓는 것은 나 한 사람 때문이다’라는 뜻의 ‘백성유죄재아일인(百姓有罪在我一人)’이라는 유명한 말이 여기서 나왔다. 곁에 있던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는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공자는 우 임금을 두고 “우 임금은 나와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나는 분이다. 평소 음식은 단출하게 하시되 조상의 제사는 넉넉하게 차리셨고, 옷은 검소하게 입으시되 제사 때 예복은 제대로 차려입으셨으며, 집은 작게 짓고 사시되 물길을 만드는 데에는 온 힘을 기울이셨다”(논어 ‘태백편’)고 평가했다.
 
우 임금은 아버지의 죽음과 순 임금의 극심한 정치적 견제로 13년 이상을 노심초사하며 살았다. 그러나 강인한 인내심으로 백성들의 삶을 직접 눈으로 보고 그들과 함께 일하며 소통의 리더십을 길렀다. 그가 훗날 ‘큰 우 임금’ 즉 ‘대우(大禹)’라는 별칭으로 백성들의 마음에 길이 남을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민간에서 체득한 겸허하고 소탈한 생활 철학과 늘 열린 마음으로 민심을 헤아리려 했던 통치 방식 덕분이다.
 
대우의 리더십을 정리해보자. 우선 그는 아버지의 실패를 교훈 삼아 문제 해결을 위한 정확한 방법을 찾았다. 그런 다음 그 일을 직접 담당하는 백성들에게 다가가 솔선수범의 자세로 함께 일했다. 기다리고 참을 줄 알았으며, 위험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런 경험을 통해 그는 백성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진정으로 아끼는 리더로 거듭났다. 인재가 단련을 통해 크게 성장하듯, 리더 역시 시련을 통해 성장한다. 그 시련과 단련 과정을 극복하지 못하면 리더로 자랄 수 없다. 역사는 이 점을 너무나 생생하게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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