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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변기의 국가경영

병자호란 겪고도… 국력 소진시킨 인조

김준태 | 390호 (2024년 4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인조 재위 후반기는 전란을 수습하고, 민생을 안정시키고, 국가 행정을 정상으로 되돌려야 하는 중차대한 시기였지만 인조는 이 시기를 세자 책봉 문제로 허비한다. 인조는 적장자인 소현세자가 갑자기 사망하자 소현세자의 아들인 원손 대신 자신의 둘째 아들을 왕위에 앉히고자 한다. 결국 인조의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이 왕위를 잇게 되는데 이는 종법상 정당한 계승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후 예송논쟁을 촉발한다. 그런가 하면 인조는 상벌이 엄격하지 못하고 신하의 자질과 상관없이 그저 자신에게 무조건 충성하냐 아니냐에 따라 중용 여부를 결정함으로써 인사를 망치기도 했다.



남한산성에서 벌어진 49일간의 농성이 실패로 끝나고, 인조가 청나라 태종에게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1 를 올리며 항복하면서 왕실과 조정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키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랜 세월 오랑캐라 부르며 무시하던 여진족을 상국으로 받들어야 했으니 당시 지식인들이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지난 회2 에서 소개했듯 김상헌을 비롯한 많은 신하가 사직하고 조정을 떠난 것은 그래서였다. 도리를 지키지 못한 정권에서 벼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국정이 마비되는 것을 방치할 수는 없었다. 전란을 수습하고, 민생을 안정시키고, 국가 행정을 정상으로 되돌리는 일이 시급했다. 이를 인조와 신하들도 잘 인지하고 있었다. 1639년(인조 17년) 경상도에 시범적으로 대동법을 시행하는 등 효종 대 대동법 확대의 기틀을 닦았으며, 백성을 쉬게 해야 한다는 ‘여민휴식(與民休息)’3 의 이념 아래 긴축 재정을 운용하고, 왕실에서 사용하는 비용을 줄였으며, 조세와 부역을 감면하는 등의 조처를 했다. 또한 전국적으로 우역(牛疫, 소 전염병)이 퍼져 특히 “평안도에 살아남은 소가 한 마리도 없는” 등 피해가 극심해지자 몽골에까지 가서 소를 구매해 나눠주기도 했다.

하지만 인조는 세자 책봉과 강빈의 옥사로 평지풍파를 일으켰다. 능력 있는 신하는 보호해 주지 않으면서 간신에게 힘을 실어줌으로써 조정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잘해야 한다는 마음은 있었지만 스스로 잘할 수 없는 환경을 만들어 버린 시기, 이것이 인조의 재위 후반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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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 책봉과 강빈 옥사

1645년(인조 23년) 4월 26일, 인조의 적장자 소현세자(昭顯世子)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청나라에서 오랜 인질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지 채 석 달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인조실록』에 보면 소현세자의 시신이 “온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 모두 선혈이 흘러나오므로 …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라는 기사가 있어4 독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승정원일기』와 『심양일기』 『동궁일기』 등의 기록을 보면 소현세자가 학질(말라리아) 혹은 지병으로 돌연사했을 가능성도 없진 않다. 아무튼 사인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아서 많은 의혹을 남기고 있다. 한데 더 큰 문제는 소현세자가 죽은 뒤에 벌어졌다. 인조가 원칙을 무시하고 원손 적장손 석철이 아니라 둘째 아들 봉림대군을 후계자로 삼고, 며느리 강빈을 역적으로 몰아 죽인 것이다. 그로 인해 조정은 혼란에 빠졌고 봉림대군, 훗날 효종은 정치적으로 큰 부담을 져야 했다.

도대체 인조는 왜 그랬던 것일까? 인조는 소현세자가 청나라에 있을 때부터 그를 견제했다. 청나라 황실과 밀접해진 소현세자가 자신의 자리를 빼앗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옛날 원나라가 아버지 충선왕을 하야시키고 아들 충숙왕을 보위에 올린 것처럼 말이다. 인조는 소현세자가 청나라와의 외교를 성공적으로 이끌고, 사재를 털어 포로 쇄환에 힘쓴 일도 애써 무시하거나 질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여기에 인조가 총애하던 소용 조씨가 소현세자를 끊임없이 참소한 일도 부자 사이를 악화시키는 데 일조했다. 이는 소현세자가 영구 귀국했을 때 인조가 냉담한 모습을 보인 데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소현세자를 위로하는 연회도 한 번 열어주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소현세자가 사망하자 인조는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겠다고 나섰다. 왕위 승계의 기준이 되는 종법(宗法)에 따르면 적장자가 죽으면 적장손이 후계를 승계해야 한다. 그런데 인조는 이를 무시한 것이다. 인조는 “나의 질병이 이와 같을 뿐 아니라 국사가 날로 어렵고 위태로워지고 있으니, 만일 내가 갑자기 죽고 나면 어린 임금으로서는 보위를 감당할 수 없을 듯하다. 그래서 나는 대군들 가운데 선택해 세자를 정하고자 한다”5 라고 선언한다. 그러자 논의에 참여한 16명의 대신 중 영의정 김류와 낙흥 부원군 김자점, 병조판서 구인후를 제외한 모든 대신이 반대했다. 그러나 인조는 세조 때 맏아들 의경세자가 죽자 적장손 월산대군이 아닌 둘째 아들 예종을 세자로 삼은 일을 거론하고6 , 또한 원손의 자질이 밝지 못하다며 밀어붙인다. 신하들이 “국가의 근본과 관련한 일은 상도(常道, 변함없이 지켜야 할 도리)를 따라야 한다” “상도를 지키지 않으면 나라가 편안하지 못할 것이다” “국가가 평온할 때는 상도에서 벗어나는 처사를 할 수도 있지만 국가의 형세가 위태로울 때는 상도를 지켜야 한다”라며 비판했지만 인조는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봉림대군이 세자로 책봉됐는데 훗날 ‘체이부정(體而不正)’, 즉 왕위를 이었으나 종법상 정당한 계승자가 아니라는 논란에 휩싸여 예송논쟁을 촉발하게 된다. 예송논쟁으로 인해 조선 조정이 낭비한 에너지가 컸음을 생각할 때, 매우 안타까운 지점이다.

한데 인조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소현세자의 아내 강빈을 역적으로 몰아 사사했다. 인조는 강빈이 자신의 수라에 독을 넣었다며 궁녀들을 국문했는데 진상이 밝혀지지 않았지만 평소 행실로 봤을 때 강빈이 저지른 일이 틀림없다며 비망기를 내렸다. 신하들 대부분이 한사코 반대했고 일부는 칭병하며 조정에 나오지 않을 정도였지만 인조는 끝까지 밀어붙였다. 폐서인하되 죽음만은 면하게 해달라는 타협안도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인조 24년 3월 15일, 강빈은 폐출당한 뒤 사사된다. 이날 실록은 “단지 추측만을 가지고서 법을 집행했기 때문에 안팎의 민심이 수긍하지 않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강빈의 죽음과 함께 강빈의 친정어머니도 사사됐고, 남자 형제들은 곤장을 맞아 죽었으며, 이미 죽은 친정아버지 강석기는 부관참시됐다. 그리고 강빈과 소현세자의 세 아들은 제주도로 유배됐다. 집안이 멸절되다시피 한 것이다.

인조가 이렇게까지 무리수를 둔 것은 소현세자와 강빈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데다 강빈을 역적으로 몰아야 원손 석철이 갖고 있던 왕위 승계의 정통성을 빼앗을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감정도 풀고, 후계자로서 봉림대군의 위상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본인이 목적하던 바는 이룬 셈이지만 그로 인하여 조정은 1년이 넘도록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국가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한 상황에서 세자 책봉과 강빈을 사사하는 문제로 온 조정이 혼란에 휩쓸려야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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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 실패


인조의 실책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인조의 재위 후반기는 조선으로서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대내외적으로 불확실성이 가중되고 있던 17세기라는 특수성 외에도 병자호란에 따른 전후 처리, 민생 안정, 외교전 등 조정에서 각별하게 신경 써야 할 문제들로 가득했다. 이런 때는 기존 관성에 갇히지 않고 새롭게 시도하는 아이디어와 경험으로 무장한 경륜이 조화를 이뤄야 하며 국가가 가진 역량이 낭비되는 일 없이 모두 뭉쳐야 한다. 인사의 측면에서 말하자면 ‘거국내각 드림팀’이 출범해야 이 위기를 극복해 갈 수 있다. 하지만 인조의 조정은 그렇지 못했다.

인조는 무엇보다 상벌이 분명하지 않았다. 병자호란 당시 도원수로서 조선군을 지휘했던 김자점은 청군의 남하를 방관하다시피 했다. 인조와 조정이 남한산성에서 고초를 겪는 동안에도 전투를 회피한 채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 이에 따라 김자점을 엄중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인조는 1년 정도 유배를 보냈다가 풀어준 후 중용했다. 인조와 사돈을 맺고7 영의정에까지 올랐을 정도다. 또한 강화도 방어 총책임자였던 김경징은 무능으로 일관하다 청군이 강화도로 진입하자 세자와 백성들을 버려두고 도망친 인물이다. 인조는 처음에는 유배로 그치겠다고 주장했으나 신하들의 강경한 태도에 밀려 사약을 내렸다. 한데 김경징의 아버지 김류를 영의정으로 계속 곁에 둔다. 약점이 있는 인물의 정치적 생명을 유지해 줌으로써 자신에게 충성하길 기대한 것이다. 실제로 김자점과 김류는 이후 모든 정치적 국면에서, 심지어 인조가 무리수를 두어도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비해 김상헌은 병자호란 내내 자신의 곁을 지켰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에 왕을 버리고 떠났다는 이유로 모질게 비난하며 재등용하길 꺼렸다. 김상헌의 처세와 절의를 추앙하는 젊은 선비들이 조정에 등을 돌리게 된 하나의 원인이었다. 그리고 주화를 주장했던 신하들도 보호해 주지 않아서 장유는 모친상을 사유로 낙향해 조정에 돌아오지 않았다. 상중인 장유에게 인조는 삼전도비문을 지으라는 명까지 내린다. 장유만큼 문장을 잘 짓는 사람이 없다는 이유였지만 화친을 주장한 데다 청나라 황제의 덕을 칭송하는 글까지 써야 했으니 사림의 비난을 받을 것이 뻔했다.8 인조는 신하에게 이런 부담을 가중하면서도 그를 지켜주는 일에는 무관심했다.

최명길의 경우, 전쟁 직후 삼정승을 연달아 지내며 국정을 정상화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러나 조선이 명나라와 비밀리에 연락했음이 드러나자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청나라로 끌려가 투옥됐다. 1645년에 풀려난 후 다시 조정에 나갔으나 세자 책봉과 강빈 옥사에서 인조에게 반대하자 인조는 그를 소외시켰다. 존경받던 원로인 이경여도 강빈 옥사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오지인 함경도 삼수로 위리안치됐고 그 외에도 여러 능력 있는 신하들이 유배형을 받아 상당 기간 조정에 돌아오지 못했다. 그리고 이 직전에는 인조반정의 1등 공신이자 현직 좌의정인 심기원이 인조의 정치에 불만을 품고 역모를 꾀하다가 발각된 일도 있었으니 조정의 역량을 한데 모으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이는 다른 누구보다도 인조의 책임이다.

요컨대 인조는 재위 초기에도 자신의 아버지 정원군을 왕으로 추숭하는 문제로 조정의 에너지를 낭비하더니 후반기에는 절차에서 벗어난 세자 책봉과 강빈 옥사로 국정 현안을 해결하고 미래에 대비할 시간을 빼앗아 버렸다. 여기에 상벌이 엄격하지 못하고 신하의 자질은 상관없이 그저 자신에게 무조건 충성하냐 아니냐에 따라 중용 여부를 결정함으로써 인사를 엉망으로 만들어버렸다. 이는 능력이 있다면 심지어 북인까지도 등용했던 재위 초기보다 훨씬 못한 것이다. 그나마 후계자로 선택한 효종이 리더십을 발휘하며 조정의 힘을 한데 모아 개혁에 나섬으로써 나라가 무너지는 것을 막았다.
  • 김준태 | 성균관대 유학동양학과 초빙교수

    필자는 성균관대에서 한국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동 대학 유교문화연구소, 유학대학 연구교수를 거치며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특히 현실 정치에서 조선시대를 이끌었던 군주와 재상들에 집중해 다수의 논문을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왕의 공부』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akademie@skku.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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