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검색버튼 메뉴버튼

전쟁과 경영

세종, 신기전은 만들었지만…

임용한 | 20호 (2008년 11월 Issue 1)

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시리즈로 연재합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기록상으로 우리나라에 화약무기가 처음 소개된 때는 삼별초의 난이 있었던 1270년대 초다. 원나라 군대가 화약무기를 가지고 고려에 들어왔으며, 여몽 연합군이 일본 원정 때도 이를 사용했다. 고려 말 왜구 침입이 극악해지자 공민왕이 명나라에 화약을 요청했지만 의심 많은 주원장은 이를 거부했다. 결국 우왕대에 최무선이 화약 제조법을 알아내면서 우리나라도 화기의 역사가 시작된다.
 
최무선이 만든 화기는 해전에서 먼저 사용됐다. 화약무기라고 하면 당장 화포를 생각하지만 화기의 용도와 종류는 의외로 다양했다. 초기 화포는 포탄을 날리는 것이 아니라 화살을 날렸다. 그래서 적함을 직접 파괴하는 것보다 화공에 주력했고, 파괴용 무기는 화포가 아니라 화약을 넣은 통(또는 단지)이었다. 이것을 수류탄이나 폭뢰처럼 적선에 던져 폭발시켰다.
 
화기는 신호용으로도 매우 요긴했다. 무선 통신 수단이 없던 시대여서 깃발과 소리로 신호를 보내야 했는데, 불꽃과 연기를 뿜으며 날아가는 화살과 포성만큼 확실한 시청각 효과를 보장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 단 이때에는 지금처럼 폭발하는 포탄은 없었다.
 
최무선의 화기는 육전에서도 금방 사용된 듯 하다. 그러나 성능 면에서는 미흡한 점이 아주 많았다. 그러다가 조선 건국 후 육상전에서 화기의 가치가 새롭게 떠오르면서 집중적인 투자와 개발이 이뤄졌다.
 
여기서 화기의 가치가 새롭게 떠올랐다는 것은 군사적 가치가 아니라 정치적·사회적 가치가 커졌음을 의미한다. 고려 말 때의 극심한 사회혼란과 국정 난맥상을 경험한 고려 학자들은 그 원인으로 두 가지를 지목했다. 외적 원인은 계속되는 외침과 전쟁이었고, 내적 원인은 무신정권이었다.
 
이는 심각한 딜레마를 낳았다. 외침을 이겨내려면 국방을 튼튼하게 해야 하는데, 군대를 키우면 군부 세력이 강해진다. 군부를 약화시키면서 군대를 강화하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일단 군부의 쿠데타 능력을 제거하기 위해 조선은 지역 단위로 사단을 편성하는 전통적 방식을 포기했다. 한 지역 주민이 같은 부대로 편성되고 지휘관이나 지방민이 자율적으로 무사나 장교를 선발하면 부대의 단결과 효율성이 높아져 전투력은 크게 향상되지만, 군대에 사적 인맥이 형성되는 폐단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에서는 병조에서 인사권을 장악하고 중앙군의 장교, 하사관, 병사는 모두 요즘처럼 전국에서 징발한 병사들로 섞어서 채웠다. 지방군도 가능한 한 여러 지역 주민을 섞고, 장교와 하사관은 더더욱 섞었다. 지휘관이 개인적으로 무사나 장교를 추천하거나 채용하는 것도 금지했다. 그래서 채택한 제도가 무과다.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무사를 선발하기 위해 무과를 만든 것이 아니라 병조에서 장교와 하사관을 임명하기 위해 인적자원을 일괄적으로 파악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이런 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이 정도로는 안심할 수 없어서 문과 우대와 전국적인 교육·문화 정책을 통해 전문적인 무사계층이나 무사집단을 선비집안으로 바꿨다.
 
이렇게 하니 고려시대만 해도 잊을 만하면 발생하던 쿠데타는 거의 사라졌지만 군대의 전투력이 뚝 떨어졌다. 그나마 전통적인 장기인 궁술이 유지됐기 때문에 수비력과 원거리 공격력은 괜찮았지만 전문 무사층과 부대의 결속력이 약화된 탓에 공격력, 특히 백병전 능력이 뚝 떨어졌다.
 
공격을 제대로 하려면 적의 진형을 파괴해야 한다. 화살은 진을 흔들고 약화시킬 수 있지만 파괴하기가 어렵다. 적진을 파괴하거나 성을 공략하려면 직접 충돌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백병 능력이 있어야 했다.
 
그렇다고 고려시대 방식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현재 가진 능력, 즉 사격 능력을 키워 파진, 공성 능력까지 갖추는 방법은 없을까. 여기서 눈에 들어온 것이 화약무기였다.
 
화기를 이용해 약화된 공격 능력을 보강하고 쿠데타가 없는 군사제도를 완성한다는 발상이 정확히 언제, 누구의 생각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발상의 가치를 누구보다 정확하게 인지한 사람은 확인된다. 바로 세종이다. 세종의 화기 개발에 대한 노력을 여진 정벌과 연계시키거나 신무기와 신기술에 대한 선천적 열정 등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근본적인 목적은 거세된 공격력을 재생해서 조선의 군제개혁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세종의 노력으로 성벽이나 성문을 파괴할 수 있는 대형화포나 투석기처럼 화약의 힘으로 공성용 돌탄을 날릴 수 있는 완구, 한번에 2발이나 4발의 화살을 쏠 수 있는 화포 등이 개발돼 현장에 배치됐다. 왕자들도 무기 개발 사업에 많이 참여했다. 가장 유명한 발명품이 오늘날의 다연발 로켓포처럼 수 십 발의 신기전을 쏘아 보내는 화차다. 이는 문종의 아이디어였다고 한다. 사람의 힘이 아닌 화약의 힘으로 추진되는 신기전은 보병의 방패를 일격에 파괴할 정도로 위력이 강했다. 또 일정 구역에 대해 집중사격이 가능하기 때문에 적진에 구멍을 내거나 성벽 위의 적을 소탕하는 데 최적의 무기였다.
다만 이것이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다. 양궁 시합 때 화살이 날아가는 모습을 슬로비디오로 보면 화살이 뱀처럼 몸을 좌우로 흔드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화약의 힘으로 화살을 날리면 화약의 힘이 너무 강해서 화살의 대칭이 조금만 맞지 않아도 화살의 궤도가 틀어진다. 더욱이 나무와 깃털로 만드는 화살은 완벽한 대칭이 불가능하므로 화살의 궤적이 심하게 변한다. 예전에 군에서 화차를 제작해서 시험사격을 해 보았더니 180도 회전해서 뒤로 날아오는 것도 있었다.
 
그렇다고 화살만 너무 탓할 필요는 없다. 19세기에 강철 대포가 주조되고 강선이 도입되기 전까지 대포도 명중률이 형편없었다. 강선이 없기 때문에 포탄이 회전하지 않고 화약의 힘에 의해 밀려나갔다. 야구에 비유하면 너클볼의 원리와 같다. 회전이 없으므로 공기를 가르며 지나가지 못하고 공기저항에 이리저리 밀린다. 그래서 던진 투수도 어디로 갈 지 모른다는 볼이 너클볼이다.
 
이렇게 말하면 형편없는 무기 같지만 그렇지는 않다. 운이 좋으면 적진에 제대로 떨어졌다. 다른 곳으로 떨어져도 엄청난 포성과 연기, 적진에서 일어나는 화염은 병사들에게 의외로 강력한 용기와 승리의 확신을 줬다. 명나라 최고 장군이던 척계광은 기효신서에 ‘포격이 적에게 별로 피해를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는 병사들도 화염과 연기를 보면 신기할 정도로 더욱 용감하게 돌격하게 된다’고 적었다. 당시에 병사들의 돌격보다 더 강력한 파괴력을 지닌 공격방법은 없었다.
 
세종은 이 수준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 사업을 추진했다. 세종이 궁극적으로 원한 화포는 보병이나 기병이 손에 들고 쏠 수 있는 소형 화포였다. 오늘날의 총이다. 세종의 닦달에 한 가지 완성품이 진상되었다. 세화포라는 구형 권총 크기의 소형 화포였다. 기병이 쏠 수 있도록 고안한 화포로 화상 방지를 위해 장갑을 끼고, 집게로 화포를 쥐고 쏘게 되어 있었다. 한때 매스컴에서 세계 최초의 권총이라고 소개되기도 하면서 유명해졌지만 실전용으로는 문제가 있었다. 실록에도 화살이 떨어지고, 화살을 쏠 힘조차도 없는데 적의 기병이 바짝 추격해 왔을 때 이 무기를 사용하라고 돼 있다. 즉 사정거리와 정확도, 위력이 극도로 떨어진다는 의미다. 이 무거운 쇳덩이를 가지고 다니는 것도 문제였으며 적이 근접했을 때, 말 위에서 불을 붙여 발사하기도 쉽지 않았다.
 
16세기에 들어와 소총과 유사한 승자총통 등이 개발되기는 했지만 세종이 구상한 소총 개발은 끝내 실현되지 않았다. 여기서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국가적 과제로 화기 개발에 힘썼고 아이디어도 좋았는데, 왜 그것이 실현되지도 계승되지도 않았을까. 에디슨의 말처럼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가 아니었던가.
 
대포가 총으로 발전하려면 격발장치를 개발해야 하고, 화약도 개량해야 한다. 그래도 임진왜란 때 노획한 조총을 조선의 장인에게 주자 금방 조총을 만들었던 것을 보면 총과 화포의 간격이 그리 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 간격은 너무나 넓었다. 창의와 발명에는 몇 명의 어머니가 더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에디슨이 그 말을 한 시대는 자본주의와 산업화의 진전으로 발명을 하면 보상이 저절로 따라오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동기 유발과 보상이 발명의 어머니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세종 시대에 장인들은 궁중에 징발되어 일했다. 개발한 상품은 파는 것이 아니라 바치는 것이었다. 좋은 결과를 내면 포상을 받기는 했지만 시장경제에서 발생하는 수익과는 비교할 수 없다. 애국심과 사명감은 숭고하기는 하지만 인간의 창의력을 계발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더욱이 청동과 화약은 엄청난 희귀 품목이자 고가품이었다. 수익이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 개인의 투자는 불가능했다. 유일하게 재료와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곳은 국가뿐이어서 아이디어를 내 실험을 하고 싶어도 경직된 관료제 사회에서 비난과 책임을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오늘날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라고 하면 당장 탐욕과 정글의 법칙을 연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인간의 자유와 창의력을 가장 풍부하게 끌어내는 것이 이 제도이며, 그 근간은 공정한 보상과 최대의 수익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필자는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에서 한국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국왕이야기> <전쟁과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 등 다수의 책과 논문을 저술했다
  • 임용한 임용한 | - (현)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의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저술
    yhkmyy@hanmail.net
    이 필자의 다른 기사 보기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