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무쌍한 시대에도 오랜 시간 동안 초기 모습을 유지해 장수하는 생명체들이 있다. 이들은 남들보다 좋은 출발점에 설 수 있도록 기나긴 준비 과정을 거쳐 변화하지 않고도 긴 시간 살아남을 수 있었다. 철저한 준비 끝에 사업을 개시하고 순항한 덕분에 인력 조정이나 사업 구조 개편과 같은 일에 에너지를 쓰지 않을 수 있었던 기업처럼 말이다. 일단 시작부터 하고 시행 착오를 통해 경쟁력을 축적하는 방식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란 것을 보여준다.
모든 것은 변한다. 당연은 하지만 피부로는 잘 와 닿지 않는 이 말이 요즘 피부 정도가 아니라 ‘심장 한가운데에 팍팍 꽂힌다’는 이들이 많다. 그야말로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세상이 돼가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시간이 지날수록 명확해지는 것도 있다. 어떤 식으로든 변해야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압박감이다.
‘세상의 패러다임이 변하리라’고 모두가 예상했던 21세기가 시작된 지 불과 20여 년이 지났을 뿐인 데도 이러니 몇백만 년, 몇천만 년이라는 시간은 어떨까? 요즘 상황을 생각하면 감이 잡히질 않는다. 오로지 변화하고 진화하는 것만이 해결책이었을 것 같다.
그런데 무려 1억 년 이상 살아온 장수 생명체 중에는 이 오랜 시간 동안, 출현할 때의 모습 거의 그대로 변함없이 살아오고 있는 주인공들이 꽤 있다. 어마어마한 시간을 통과하면서도 초기의 형태를 바꾸지 않고 거의 그대로 살아왔다는 건 정말이지 예외적인 ‘사건’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데 이는 생존 전략 차원에서 대단히 좋은 시작을 했다는 뜻이다. 워낙 탁월한 형태로 출발했기에 어떤 환경에서도 고칠 필요가 없었다는 의미인 까닭이다.
고칠 필요가 없다는 건 대단한 이점이다. 무엇보다 형태를 개선하거나 진화하는 데 투입해야 할 에너지를 다른 곳에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생명체의 형태는 망치 같은 도구로 뚝딱뚝딱 고칠 수 있는 게 아니다. 수많은 세대를 거치며 유전자를 바꿔야 한다. 이러는 동안 세상이 다소곳하게 변화의 시간을 기다려주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그러지 않을 가능성이 많다. 이 와중에 다른 방향으로 환경이 바뀌면 그동안의 노력은 헛수고가 되고 만다.
이 시리즈의 ‘장수 편’에 자주 등장하고 있는 상어와 악어가 대표적이다. 상어의 경우 3억여 년 전 화석(스테타칸투스)과 비교해 보면 몸 크기가 훨씬 커지긴 했지만(당시에는 70㎝였다) 형태는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빨래판처럼 생겼던 등지느러미가 현재처럼 바뀐 게 다를 뿐이다. 크게 바꿀 필요가 없었을 정도로 처음부터 괜찮은 형태로 시작했다는 얘기다. 악어는 2억여 년 전과 비교하면 덩치조차 거의 그대로다. 화석에 존재하는 뼈대를 보면 연대 측정을 하지 않을 경우 얼핏 구분을 잘할 수 없을 정도다. 거북도 마찬가지다. 2억1000만 년 전의 화석과 비교하면 등딱지가 완성되지 않았을 뿐 거의 똑같다. 말 그대로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만하다.
중소 규모의 멸종 사태라 해도 해당 지역은 지옥과 같은 악조건의 시간이 몇십 년, 길게는 몇백 년까지 이어지는 게 대부분이다. 이럴 땐 보통 몸집이 작거나 땅속에 사는 생명체들이 살아남는 경향이 많다. 직접적인 피해를 덜 받을 수 있어서다. 물론 다른 생존법도 있다. 잠자리나 고사리처럼 몸집을 확 줄이는 것이다. 잠자리의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면 3억 년 전쯤엔 날개 너비가 최대 2m나 될 만큼 거대한 시절이 있었다. 고사리의 조상 고비속은 3억6000만여 년 전 출현한 뒤 한창 번성하던 시절 키가 보통 15m나 됐던 드높았던 과거가 있었다. 하지만 숱한 시련을 거치며 살아남기 위해 덩치를 줄였다. 커다란 덩치로 살아남는다는 게 결코 쉽지 않다는 방증이다.
시작이 좋았던 상어와 악어는 여기에 들어가는 에너지를 아낄 수 있었을 것이고 이걸 차별화된 다른 기능을 개발하는 데 썼을 것이다. 생존의 돌파구 찾기가 훨씬 용이했음은 당연지사다. 조직 구조나 회사 형태가 좋아 불경기 때마다 개편이다 뭐다 하며 흔들리지 않은 덕분에 항상 잘나가는 일류 기업처럼 말이다. 시작을 잘한다는 건 이렇게 중요하다.
서광원araseo11@naver.com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장
필자는 경향신문, 이코노미스트 등에서 경영 전문 기자로 활동했으며 대표 저서로는 대한민국 리더의 고민과 애환을 그려낸 『사장으로 산다는 것』을 비롯해 『사장의 자격』 『시작하라 그들처럼』 『사자도 굶어 죽는다』 『살아 있는 것들은 전략이 있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