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를 위한 인문고전 강독

시간과 타자: 집단에서 당당한 주체로…

75호 (2011년 2월 Issue 2)

 

편집자주 21세기 초경쟁 시대에 인문학적 상상력이 경영의 새로운 돌파구를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DBR은 ‘CEO를 위한 인문고전 강독’ 코너를 통해 동서고금의 고전에 담긴 핵심 아이디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사상과 지혜의 뿌리가 된 인문학 분야의 고전을 통해 새로운 영감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20세기 이후 현대 인문학의 고뇌를 대변하는 키워드는 두 가지다. 바로 ‘타자(the other)’와 ‘차이(difference)’다. ‘타자’란 글자 그대로 ‘나와는 다른 사람’이나 ‘나와는 다른 사물’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무엇인가 나와는 다르다고 느낄 때가 있다. 이런 경우 우리는 차이를 느꼈다고 할 수 있다. 차이의 경험은 결국 다름에 대한 경험이기 때문이다. 별도의 개념인 것처럼 보이지만, 타자와 차이는 우리가 낯섦과 조우했을 때 사용할 수 있는 두 가지 표현이었던 셈이다.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것이 한 가지 있다. 왜 20세기에 들어서서야 타자와 차이라는 개념이 부각됐을까? 이것은 20세기의 인간만이 자신의 욕망, 혹은 자신만의 고유한 내면을 긍정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는 바흐보다 모차르트가 좋아.” 이렇게 강하게 자신의 욕망을 표현할 수 있을 때에만, 우리는 나와는 다른 타자의 욕망을 발견할 수 있다.
 
과거 사람들은 욕망을 부정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금욕(禁欲)’이나 ‘절욕(節欲)’이 성숙함의 척도처럼 기능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과거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을 긍정했다가는 살아남기 힘든 사회에 살고 있었다. 과거 여성이 어떤 삶을 영위했는지를 생각해보자. 그녀들은 삼종지도(三從之道)라는 원칙을 맹목적으로 지키면서 살았다. 결혼하기 전에는 아버지의 말에, 결혼해서는 남편의 말에, 남편이 죽은 뒤에는 아들의 말에 따라야 했다. 한마디로 남자의 말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 남성들은 여성을 타자로 경험할 수 없었다. 자신의 욕망을 부정하거나 숨기고 있는 여성에게서 어떻게 낯섦을 발견할 수 있단 말인가? 욕망에 ‘노(No)’라고 말할 수 있을 때에만 상대방은 나에게 타자로 드러날 수 있는 법이다.
 
과거 사람들은 가정에서든 사회에서든 국가에서든 조화를 최고의 이념으로 생각했다. 그렇지만 어느 경우든 조화라는 이념은 구성원들이 자신의 욕망을 억압하지 않는다면 실현 불가능하다. 자신의 가정이 화목하다고 뿌듯해 하는 여인이 있다고 하자. 그렇지만 이것은 그녀만의 착각일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는 그녀가 가족들의 욕망에 자신을 맞추고 있거나, 가족들이 그녀의 욕망에 맞추고 있을 것이다. 이처럼 조화의 이념 속에서 타자와 차이에 대한 경험은 발생할 수 없는 법이다.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만큼 이 점을 명확히 알고 있었던 철학자도 없을 것이다.
 
플라톤 이후부터 사람들은 사회적인 것의 이상을 하나가 됨이라는 이상에서 찾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주체가 타자와의 관계에서 타자를 자신으로 동일시하는 경향을 갖게 되고, 마침내 집단적 표상이나 공동의 이상을 갖게 된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바로 ‘우리’라고 말하는 집단성이고, 인식 가능한 태양이며, 진리로 향하면서 타자를 자신과 얼굴을 맞댄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과 나란히 서 있는 자로 인식하는 집단성이다. - <시간과 타자(Le Temps et L’autre)>
 
가정의 화목을 자랑하던 여인은 ‘우리 가족’이란 집단성에 매몰돼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결국 그녀로 하여금 자신도 당당한 주체라는 사실을, 그리고 동시에 남편이나 자식도 자신과는 다른 타자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간과하도록 만든다. 나와 다른 욕망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실현하려고 할 때, 타자는 스스로 하나의 주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타자의 타자성(alterity)이 나로 환원될 수 없는 타자만의 고유한 주체성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처럼 집단에 매몰되는 순간, 집단에 속한 구성원들은 자신만의 고유성, 혹은 주체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전체주의(totalitarianism)는 이런 메커니즘으로 발생하는 것 아닌가?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의 지배 하에 있던 나치 독일만큼 전체주의가 발생하는 논리를 명확히 보여주는 사례도 없을 것이다.
 
<파시즘의 대중심리(Die Massen- psychologie des Faschismus)>에서 라이히(Wilhelm Reich, 1897-1957)는 말한다. 당시 히틀러 통치 하의 독일 국민들은 자신들이 곧 ‘작은 히틀러’라고 생각했다고 말이다. 사실 모두가 히틀러라면 여기에는 주체도 타자도 존재할 수 없다. 당연히 주체와 타자 사이의 인격적인 대면도 있을 수 없다. 모든 주체가 집단에 매몰되는 전체성 속에는 ‘우리’라는 정치적 관계만 존재할 뿐, ‘나와 너’라는 윤리적 관계는 존재할 수 없다. 주체와 타자가 대면하는 윤리적 관계는 책임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책임을 “나의 행동에 책임을 진다”는 식의 일상적인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책임’을 뜻하는 영어 표현 ‘Responsibility’를 보면, 책임이란 단어는 더 심오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책임은 타자에 ‘대응하거나 반응하는 것(response)이 가능하다(ability)’는 것을 의미한다.
 
레비나스가 집단성을 “타자를 자신과 얼굴을 맞댄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과 나란히 서 있는 자로 인식하는 것”이라고 규정한 대목은 매우 중요하다. 이 구절이 그가 전체주의가 발생하는 원인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레비나스는 확신한다. 전체주의는 우리가 자신에게 책임의 역량, 즉 타자와 마주하면서 그에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망각했을 때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당연히 전체주의를 막기 위해 레비나스는 책임의 관계, 즉 타자와의 관계를 숙고할 수밖에 없었다.
 
타자와의 관계는 공동체와의 전원적이고 조화로운 관계가 아니며, 우리가 타자의 입장에서 봄으로써 우리 자신이 그와 유사하다고 인식하도록 만드는 공감도 전혀 아니다. 타자와의 관계는 우리에 대해 외재적인 것이다.
 
- <시간과 타자>
 
어머니는 아이가 법관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불행히도 그녀의 아이는 영화를 만드는 삶을 살려고 한다. 어머니에게 아이는, 혹은 아이에게 어머니는 타자로서 등장한 것이다. 어머니가 아이의 욕망에 자신을 맞추어도 안 된다. 반대로 아이가 어머니의 욕망에 자신을 맞추어도 안 된다. 두 경우 모두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타자로 드러날 수 없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자신만의 고유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 당연히 두 사람 사이에는 갈등과 긴장의 관계가 형성될 것이다. 그래서 레비나스도 “타자와의 관계는 공동체와의 전원적이고 조화로운 관계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타자와의 관계는 공감의 관계일 수도 없다. 공감은 유사한 생각과 욕망을 공유하는 집단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나 아이에게 남은 유일한 관계는 책임이란 관계다. 이 관계를 통해 어머니는 자신의 아이를 타자로 긍정하면서 그에 부단히 반응할 수 있고, 아이도 자신의 어머니를 타자로 긍정하면서 그에 반응할 수 있다. 완전한 일치도 아니고 완벽한 결별도 아닌 관계. 이것이 바로 레비나스가 생각했던 타자와의 진정한 관계다. 그래서 그는 “타자와의 관계는 우리에 대해 외재적인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전체주의의 발생을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 있는 관계를 찾아낸 셈이다. 그의 발견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내면으로 환원할 수 없는 타자의 타자성과, 그 타자에 대응할 수 있는 책임의 논리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타자라는 범주가 우리가 집단으로 환원될 수 있는 가능성을 봉쇄해주었다면, 책임의 논리는 새로운 연대성, 혹은 전체주의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사회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강신주 철학자·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 객원연구원 contingent@naver.com
필자는 서울대 철학과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연세대 철학과에서 ‘장자철학에서의 소통의 논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출판기획사 문사철의 기획위원, 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 객원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철학 VS 철학> <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 <상처받지 않을 권리>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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