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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셀러로 본 트렌드: 『퇴마록』

판타지의 현지화… 오리지널리티의 힘

이경림 | 291호 (2020년 2월 Issue 2)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유명한 표현과 달리 현실 세계에서는 ‘유’에서 ‘유’가 창조될 때가 많다. 원래 존재하던 무엇에 착안해 아주 비슷한 것을 만들어내고, 거기서 또 조금 다르게 만들어내는 과정의 반복 속에서 원래의 것에선 볼 수 없던 독창성, 새로운 오리지널리티가 탄생한다. 대중문화계에서 ‘유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방식이 가장 재미있고 풍부하게 나타난 대표적인 시대로 1990년대를 꼽을 수 있다. 이 시대에 서구의 것이라고만 여겨졌던 다양한 장르가 폭발적으로 한국화되기 시작했다. 랩과 힙합 같은 음악 장르서부터 스릴러, 블록버스터 같은 영화 장르에 이르기까지, 대중문화계 전 영역에 걸쳐 장르의 현지화가 활발히 진행됐다. 그런데 문화의 영역에서 이처럼 ‘바깥’에서 어떤 것을 들여오는 방식에는 사실 커다란 위험이 따른다. 저기에서 아무리 ‘잘나가던’ 것이라 한들 여기선 너무 낯선 나머지 대중의 외면을 받기가 쉽다. 문화의 장벽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질적인 콘텐츠를 현지화하는 것, 다시 말해 그저 낯설기만 한 것을 대중이 자연스럽게 접하고 좋아할 수 있을 정도로 변화시킨다는 것은 절대 쉽지 않은 작업이다. 그러나 대중에게 없던 새로운 열망을 심을 수 있다는 차원에서 그만큼 커다란 성공을 기대할 수 있기도 하다. 이질적인 것일수록 현지화에 성공했을 때 혁신적인 시장이 열리기 때문이다. 1990년대 대중문화계의 과감한 실험들을 되돌아보면 특히 더 그렇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듣도 보도 못했던 랩 음악을 들고나왔을 때, 데뷔 무대에서 가장 낮은 점수와 혹평을 받았던 일화는 유명하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때의 비난을 까맣게 잊고 ‘문화 대통령’ 서태지와 아이들이 거둔 위대한 성공만을 기억한다. 랩을 소수의 리스너가 애호하는 ‘그들만의’ 장르에서 한국 대중이 열광하는 ‘우리의’ 장르로 바꿔버린 힘, 그럼으로써 한국 대중가요계의 판도 전체를 뒤집어버린 힘. 서태지와 아이들이 발휘했던 그런 힘이 바로 훌륭한 현지화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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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문학계에서도 현지화를 통해 존재감을 과시했던 기념비적인 작품이 있다. 2011년 소장판까지 출간하며 명실공히 베스트셀러 겸 스테디셀러로 우뚝 선 『퇴마록』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퇴마록』은 PC통신 문학의 시조로 더 잘 알려져 있다. 1993년, 하이텔의 한 게시판에서 연재되기 시작한 이 소설은 당시 하이텔 최다 조회 게시물의 1위부터 10위까지를 전부 독식했을 정도로 뜨거운 인기를 누렸다. 연재분을 종이책으로 정리해 출간된 국내 편, 세계 편, 혼세 편, 말세 편 등 네 시리즈는 지금까지 총 누적 판매량이 1000만 부에 이른다고 한다. 『퇴마록』이 출간된 지 20여 년도 훌쩍 지난 지금까지 장르 소설 분야에서 이 기록은 깨지질 않고 있다.

장르 소설로서 『퇴마록』은 ‘한국형 판타지’로 분류되곤 한다. 넓게 보아 판타지 문학은 ‘현실에 없는 허구적 존재에 관한 상상’을 담은 문학을 말한다. 박 신부가 기도력으로 오라를 쏘고, 준후가 부적과 뇌전을 날리며 좀비들을 제압하는 『퇴마록』은 판타지의 전형처럼 보인다. 그런데 왜 굳이 앞에 ‘한국형’이라는 말이 붙는 걸까? 구체적 문학 장르로서의 판타지는 지극히 서구적인 기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로 제작돼 더 친숙해진 판타지의 고전 J.R.R. 톨킨의 『반지의 제왕』이나 C.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를 떠올려 보자. 성과 기사가 어울리는 서양 중세 시대를 배경으로 엘프, 드워프, 오크 같은 다양한 종족과 마법사, 정령 같은 존재들이 어슬렁대는 이미지가 곧바로 떠오른다. 주인공이 동료들을 모아 모험에 떠나 위대한 과업을 완수하는 플롯도 생각난다.

이처럼 오늘날 우리가 판타지 하면 먼저 떠올리는 많은 요소는 서구 문화에 뿌리를 두고 판타지 장르가 발전하며 구축된 관습들이다. 반면 우리나라에서 넓은 의미의 판타지 문학이라 하면 『구운몽』이나 『금오신화』가 원조 격으로 생각난다. 동양을 배경으로 구름 타고 다니는 신선과 염라대왕이 등장하고, 하늘에서 죄를 지은 선녀가 적강(謫降)하는가 하면 억울한 귀신이 구천을 헤매며 우는 이야기들 말이다. 그런데 『금오신화』의 계보를 이은 작품이 언뜻 생각나지 않는 것처럼, 이와 같은 판타지적 전통은 서구처럼 확실히 알아볼 수 있는 장르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대중은 초자연적, 허구적 존재들이 등장하는 신기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즐겼지만 의식적으로 그러한 전통을 염두에 두고 그 계보 안에서 문학을 창작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1990년대의 한국에 판타지는 굉장히 이질적인 장르였다. 한국인 작가가 한국을 배경으로 『반지의 제왕』 비슷한 소설을 쓴다는 발상 자체가 상당히 낯설었다. 현암이나 준후 같은 주인공을 대뜸 서양 중세 같은 무대에 던져놓을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금오신화』처럼 현재와 무관한 과거를 배경으로 떠돌게 만들 수도 없는 노릇이다. 만일 현대 한국을 배경으로 그런 신화적이고 허구적인 존재들이 나타난다면 어떤 존재들일까? 그렇게 한국에 어울리는 판타지적 존재들과 무대를 마련했다고 치자. 그 안에서 벌어질 사건이란 어떤 것이어야 할까? 모험과 전쟁을 치르고 세계를 구하는 식의 서구 판타지 문법을 그대로 좇을까? 다른 판타지 서브 장르들은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지 한번 참고해볼까?

『퇴마록』의 세계는 이처럼 주제의식과 세계관부터 소소한 모티프에 이르기까지 한국에 어울리는 판타지란 무엇인지를 고민한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작가는 기존의 판타지 장르 관습들을 참조한 위에 동양 전통의 종교와 문화, 역사 등 광범위한 자료를 세세하게 조사해 방대한 설정을 덧붙인 세계를 창조했다. 무속 신앙이나 조선시대의 설화부터 일본과의 역사까지 한국 고유의 문화적 요소들을 풍부하게 살리는 한편, 이를 멀린과 아서 왕 전설이나 이집트 신화, 좀비처럼 세계 각국에 소재한 판타지적 요소들과 자연스럽게 엮어 넣어 독특하게 균형 잡힌 세계를 만들어냈다.

『퇴마록』 이전에는 없었던 이 세계는 결코 작가가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다 만들어낸 상상의 세계는 아니다. 다른 모든 판타지 문학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판타지 문학은 판타지, 즉 순수한 허구와 상상의 산물로 기대되기 쉽다. 그러나 상상 역시도 ‘유에서 창조된 유’다. 서구형 판타지의 근원에는 서구 유럽의 역사와 문화적 전통, 신화와 전설, 설화의 세계가 있고, 일본형 판타지의 근원에도 마찬가지로 일본 고유의 맥락이 존재한다. 이처럼 각 문화권에 따라 상상의 토대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허구와 상상의 세계를 구현한 판타지 문학이라 할지라도 문화권에 따라 중심적 주제와 문법, 캐릭터, 세계관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다. 기독교적 구도에 익숙한 서양에선 선의 세력과 악의 세력이 거대한 전쟁을 일으킨다는 상상력이 자주 보이고, 요괴 관련 설화가 풍부한 일본에선 요괴 퇴치와 퇴마의 문법이 발전하는 식으로 말이다.

『퇴마록』은 판타지 장르에서 구축돼 있던 기존 관습들을 한국적인 상상의 토대와 융화했다. 그렇게 현지화를 거쳐 변화된 상상의 토대에 맞춰 한국에 어울리는 새로운 문법과 캐릭터가 탄생하고 더욱 ‘개성적인’ 세계가 만들어졌다. 파문당한 가톨릭 신부, 한민족 비전(祕傳)의 무공을 익힌 청년, 동양 밀교와 한국 무속의 전통을 이은 소년, 밀교 신의 화신인 20대 젊은 여성. 이 퇴마사 네 사람이 힘을 합쳐 악을 물리치는 세계에는 서양과 동양에서 유래한 전통이 공존한다. 이처럼 이질적인 것들이 매력적으로 공존하면서 성공적인 현지화가 이뤄졌다. 어딘가 낯설어서 흥미롭지만, 또 어딘가 익숙해서 쉽게 따라가고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상태 말이다. 『퇴마록』에는 서로 다른 종교적 배경을 지닌 이들이 자기만의 힘을 발휘해 악을 처단하는 간결하고 재미있는 퇴마 에피소드들부터 일제강점기의 긴 역사가 엮여 장대하고 긴 여운이 남는 후반부의 스토리까지 다양한 문법이 시도되고 있다. 에피소드의 성격도 가벼운 수준에서 점차 어둡고 무거운 주제의식을 반영하는 식으로 바뀌기도 한다. 이와 같은 다양한 수준을 묶어주는 구심점이 바로 『퇴마록』이 만들어낸 매력적인 세계다. 『퇴마록』이 창출해낸 한국형 판타지의 오리지널리티는 바로 이처럼 다양한 특성이 절묘하게 균형 잡힌 세계에 있다.

『퇴마록』은 그때나 지금이나 문학적으로 많은 약점을 지적받곤 한다. 투박하고 훈련이 덜 된 문체, 개연성이 떨어지는 일부 서사들, 단순하고 반복적인 문법과 묘사 등이 그렇다. 사실 『퇴마록』 연재 당시 작가는 직업 작가도 아니었고, 『퇴마록』이 연재되던 곳도 문학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처음 하이텔 ‘SUMMER’ 게시판에서 납량특집 격으로 운을 뗐던 이 소설은 얼마 지나지 않아 1990년대 한국 사회의 독자 대중을 깡그리 사로잡았다. 아마 1990년대에 학교를 다녔던 사람치고 『퇴마록』을 모른다는 이는 드물 것이다. 시리즈를 거듭할수록 어두워지는 분위기에 주인공들이 혹시 죽을까 마음을 졸인 팬, 1998년 영화 ‘퇴마록’의 실패를 안타깝게 생각하던 팬들도 많았다.

이렇게 『퇴마록』이 많은 독자를 단번에 사로잡았던 비결은 음양의 조화처럼 균형 잡힌 한국적인 세계관에 있었다. 『퇴마록』의 세계는 무에서 창조되지 않았다. 이 세계는 아주 많은 유에서 창조된 새로운 유였다. 작가는 고대의 서양 마법과 고승(高僧)의 공력, 아서 왕과 좀비가 공존하고 무당과 마법사가 함께 싸우는 지극히 한국적인 상상의 세계를 만들어냈다. 잡다한 설정들만 보면 자꾸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퇴마록』의 묘미는 직접 읽을 때만 알 수 있다. 그 모든 문학적인 약점에도 불구하고 개성적으로 창조된 상상의 세계 자체에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트렌드를 선도하는 비결은 대중보다 딱 반보(半步) 앞서는 것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제자리걸음만 해서도, 대중의 뒤꽁무니만 쫓아가서도 안 되겠지만 너무 앞서가면 대중이 따라오지 못해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 수도 있다는 의미다. 『퇴마록』은 수박 겉핥기식으로 서구 판타지의 겉모습을 수입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우리의 문화와 전방위적으로 융화시킴으로써 성공적으로 현지화했다. 그 과정에서 발현된, 다른 나라에는 없는 한국적인 오리지널리티가 관객들의 마음을 훔치는 데 성공했다.


이경림 서울대 국문과 박사 plumkr@daum.net
필자는 서울대 국문과에서 현대소설을 공부했다. 신소설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문화와 문학 연구가 만났을 때 의미가 뚜렷해지는 지점에서 한국 소설사를 읽는 새로운 계보를 구성하는 작업에 주력하고 있다. 육군사관학교, 국민대, 홍익대 등에서 강의했으며 국립중앙도서관 주관 한국 근대문학 자료 실태 조사 연구, 국립한국문학관 자료 수집 방안 마련을 위한 기초 연구 등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상아탑 너머에서 연구의 결실을 나누는 방식을 찾고 있다.
  • 이경림 | [現] 서울대 국문과 박사

    [前]
    육군사관학교, 국민대, 홍익대 등 강의
    국립중앙도서관 주관 한국 근대문학 자료 실태 조사 연구
    국립한국문학관 자료 수집 방안 마련 위한 기초 연구
    plumkr@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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