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나를 힘들게 했던 슬럼프와 우울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변에 조언을 구하다 보니 ‘회사 생활을 잘하기 위해서는 회사 생활에 매달리지 말아야 한다’는 조금은 아이러니한 얘기에 수긍하게 됐다. 가끔은 쌓인 긴장을 풀기 위해 여유로운 취미생활 하나쯤은 있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래서 기왕이면 인맥도 쌓을 겸 사내 동호회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회사에 다니는 6년 동안 한 번도 그런 비공식적 모임에 참여해 본 적이 없는 터여서 이미 두세 개의 사내 동호회에서 활동한다는 손대수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손대수는 기다렸다는 듯이 회사에서 가장 활동이 활발한 등산 동호회 가입을 권유했다. 2주에 한 번 있는 정기 모임에 나가 자연스럽게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그동안 격식을 갖추고 만나던 회사 사람들의 다른 면을 볼 수 있었다.
지난 주말에는 덕적도로 정기 산행 겸 1박 2일 엠티를 다녀왔다. 여기에서 반가운 사람을 발견했다. 바로 임 주임이었다.
손대수와 함께 나타난 임 주임은 나를 보고 깜짝 놀란 눈치였다. 나 또한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등장에 놀랐으나 동호회원들의 말로는 이 두 사람이 등산 동호회의 터줏대감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임 주임이 등산 동호회인줄 알았으면 진작 가입하는 건데….’
어쨌거나 생각지도 않던 행복한 주말을 보내게 됐으니 이보다 기쁜 일이 없었다.
산행 후 넓은 통나무 펜션에서 직접 밥도 해먹고 밤에는 삼겹살까지 구워먹으니 마치 대학 시절로 되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특히 임 주임이 직접 만든 김치찌개는 우리 엄마가 만든 것보다 더 맛있었으니, 임 주임에 대한 또 다른 발견이었다. 임 주임은 대체 못 하는 게 뭐냐고!
지난 번 메일 사건 이후 대하기가 어색해져서 나름대로 관계 개선할 때를 기다려온 나는 그날의 술자리가 임 주임과 자연스럽게 가까워질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원은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그날 따라 임 주임은 내가 다가가는 것을 더욱 부담스러워 하는 것 같았고, 설상가상으로 동호회원들이 너나할 것 없이 임 주임 옆자리에 자꾸만 손대수를 데려다 앉히는 바람에 대화다운 대화는 단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이 아무리 동호회 활동을 오래했다고 해도, 아무리 같은 팀에서 근무한다고 해도, 신입 회원이자 선배인 나도 있는데 둘만 너무 챙겨 주는 것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밤늦도록 술자리를 지키면서 사람들과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고, 그러다보니 내가 미처 몰랐던 사내 정보는 물론 내가 기획한 신제품에 대한 솔직한 평가와 대안을 들을 수 있었다. 디자인팀의 박 대리가 신제품 관련 작업을 도와주겠다고 하는 등 든든한 ‘원군’도 얻을 수 있었다.
동호회 활동을 통해서 제2의 회사 생활이 시작되는 것 같았고, 신제품 개발을 위한 작업도 착착 진행돼 갔다. 제품에 대한 팀내 평가도 전보다 훨씬 좋아졌다.
드디어 나의 신제품이 소비자에게 첫 번째 평가를 받는 시간이 왔다. 우리 제품의 실제 타깃인 20∼40대 전문직 독신 남녀들에게 신제품의 기능과 사용 방법, 형태, 효용, 가격 등을 표시한 ‘컨셉트 보드(concept board)’를 보여 주고 의견을 들었는데 의외로 결과가 충격적이었다.
“제품은 좋은 것 같아요. 그런데 이 제품이 우리 생활에 왜 필요한가요?”
“출장 가서 본 것 같기도 한데요. 해외의 유사 제품이랑 어떻게 다른가요?”
“기능이 좋다는 건가요? 인테리어용인가요?”
“좋은 것은 알겠는데 집에 있는 조명 기기를 두고 돈을 주고 하나 더 살 만큼의 필요성을 못 느끼겠네요. 선물용으로는 고려해 보겠어요”
“우리 같은 독신자보다 오히려 스트레스 많이 받는 수험생들한테 더 필요하지 않을까요?”
아이디어 면에서는 모두들 참신하다며 좋은 점수를 줬다. 그런데 왜 자꾸들 머리를 갸웃거리는 거지? 왜 사고 싶다는 말이 안 나오는 거냐고? 대체 뭐가 문제인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