畵中有訓
편집자주
미술사와 문학, 두 분야의 전문가인 고연희 박사가 옛 그림이 주는 지혜를 설명하는 코너 ‘畵中有訓(그림 속 교훈)’을 연재합니다. 옛 그림의 내면을 문학적으로 풍부하게 해설해주는 글을 통해 현인들의 지혜를 배우시기 바랍니다.
양기성(梁箕星) <임포방학(林逋放鶴, 임포가 학을 풀어주다)>,
조선시대 18세기 전반, 종이에 채색, 33.5 x 29.4 cm, 일본 야마토분가칸
서호에 학이 날면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는 항주(杭州)라 한다. 예로부터 중국인들은 천상에는 천당이 있고 지상에는 항주가 있다고 했다. 항주가 아름다운 이유는 사시사철 살랑살랑 잔물결이 흔들리는 호수, ‘서호(西湖)’가 있음이다. 조선시대 학자들은 서호의 풍경을 병풍으로 그려두고 감상했고, 그 풍광의 상상을 시로 읊었다. 우리 한강 마포 일대를 ‘서호’라 부르면서 중국 서호의 근사한 운치를 누리고자 했다. 조선후기 학자 정약용(丁若鏞)이 ‘서호는 항주의 눈썹(眉)’이라 글을 지은 일도 유명하다.
항주 서호의 물결 위에 보트를 띄우면 운치가 넘칠 것이다. 실로 송나라의 학자 중에 서호를 좋아해 벼슬도 아니 하고, 결혼도 하지 않고, 서호에 배를 띄우고 시를 지으며 늘그막까지 20년간 머물렀던 이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임포(林逋, 967∼1028). 소개하는 그림의 오른편 중앙으로 작은 배를 타고 오는 인물이 임포다. 이 그림이 실려 있는 시화첩 <예원합진>을 펼치면 그림의 옆면에 아래의 글이 명필가 윤순(尹淳)의 서체로 단정하게 적혀 있다. <세설신어>의 글을 옮긴 것이다.
임포가 고산(孤山)에 은거하면서 항상 학(鶴) 두 마리를 길렀는데, 이들을 풀어주면 구름 속으로 날아들어 오래 머물다가 다시 새장으로 돌아왔다. 임포는 늘 작은 배로 서호에 노닐었다. 손님이 왔는데 임포가 강에 머물고 있으면 동자가 문에 기대어 앉아 새장을 열어 학을 풀어주면, 한참 있다 임포가 반드시 작은 배를 노 저어 돌아왔다. 학이 날면 손님이 왔다는 뜻으로 여겼던 것이다.
임포는 서호의 고산에 머물렀다. 임포를 ‘서호처사’라 혹은 ‘고산처사’라 부르는 이유다. 임포는 그곳에서 매화를 키웠고 또한 학을 길렀다. 신기하게도 임포가 키운 학은 풀어주어도 날아올랐다가는 임포에게 되돌아왔다. 그리하여 임포에게 손님이 온 사실을 알려주는 심부름꾼 역할까지 했다. 동자가 새장을 열면 학은 서호 위로 날아올라 빙빙 돌고는 되돌아왔을테니 말이다. 서호 위로 학이 날면 임포는 배를 돌려 고산의 숙소로 돌아와 먼 걸음 온 손님을 맞이할 수 있었다.
학이 돌아온다는 말은
학은 목과 다리가 가늘어 길고 자태가 우아하며 흰 몸체에 검은 깃의 어울려 그 모습이 말쑥하다. 정수리의 벼슬이 붉은 단정학(丹頂學)은 최고로 여겨졌다. 학은 고대로부터 신선계의 새로 일컬어졌다. 신선이 학을 타고 하늘을 날았고, 신선이 된 뒤에 학으로 변신해 고향을 방문했다는 전설이 만들어졌다. 고구려 고분벽화 천장에 학을 타고 훨훨 나는 신선이 있고, 당나라 무덤 벽화에도 하늘을 나는 학이 그려져 있다. 신선계의 학은 깃털 빛이 변해 누런 황학(黃鶴), 푸른 청학(靑鶴), 검은 현학(玄鶴) 등이 된다고 믿어졌다. 조선시대 창덕궁 실내 벽화에 황학과 청학이 그려져서 왕실과 국가의 무궁한 번영을 기원하는 매체가 됐다. 중국의 황실에서나 조선시대 문인들의 정원에서 학을 키우는 문화는 전설적인 학의 속성에 대한 기대를 반영하는 일이다. 조선후기 회화작품에서 정원에 학 한두 마리가 멋지게 서 있는 모습을 찾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런데 학을 키우는 양학(養鶴)의 실상을 알면 누구라도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조선후기 학자 홍만선(洪萬選)이 정리한 각종 동식물의 양육법을 보면 대개 야생의 새를 키우려면 그 알을 훔쳐다가 닭이 품도록 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특히 학의 경우는 영양이 부족해 병들게 되면 쥐와 뱀을 먹여서 영양보충을 해줘야 한다니 고상하고 말쑥한 학의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다. 게다가 학이 날아 도망가지 못하도록 깃털을 잘라주어야 했다. 학이 정원의 나무 그늘을 걷는 신선계의 분위기를 만들려면 이러한 노력 없이는 불가하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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