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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선생의 학습법

군자되라는 퇴계 선생의 가르침,爲己之學: 나를 수양해 공동체를 이롭게 하라

이치억 | 181호 (2015년 7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퇴계의 공부의 목적

 

공부란 인의예지(仁義禮智)라는 인간 본성(감정)의 발현이 항상 적절하도록 마음을 가다듬는 것. , 모든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감정을 유지하며 그 적절한 감정대로 실천하며 살아감으로써 가장 사람다운 사람, 이른바군자(君子)’ ‘성인(聖人)’이 되는 것. 그렇기에위인지학(爲人之學, 남에게 보이기 위한 공부)’이 아닌위기지학(爲己之學, 나를 위한 공부)’의 배움을 추구.

 

21세기에 퇴계의 공부법을 되새겨야 하는 이유

 

진정한 성공을 위해서는나를 위한 공부본성의 회복이 필요함. 기업도포장된 마케팅으로돈이 되는 제품·서비스를 내놓으려 하기보다 진정성을 갖춰인간 본연의 마음을 제시하려는 노력이 필요.

 

 

 

 

 

인간의 삶은 배움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배움은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돼 죽고 나서야 마친다. 걸음마, 말하기, 밥 먹기, 도구 사용하기 등과 같은 초보적인 일에서부터 정밀한 사유, 깊이 있는 학문, 고도의 판단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하는 일들은 모두 배움의 과정이자 결과물이다. 특히 우리는 인생 초반부의 4분의 1 정도를 전적으로 공부에 집중하며 보낸다. 더욱이 오늘날은 학교를 떠나더라도 공부가 끝나지 않는다. 생존을 위해서든, 취미로서든 거의 평생 동안 공부를 해야 한다. ‘평생학습이라는 말은 이제 특정한 사람만이 아닌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말이다.

 

이처럼 살아가면서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게 배움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배움은배우고 때에 맞게 익히니 기쁘지 아니한가1 라는 공자의 말씀처럼 과연 기쁜 일일까? 배움이나 공부라는 말을 입시·취업경쟁의 도구로 국한시킨다면 배움은 그다지 기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 삶의 영역 전반으로 그 개념을 넓힌다면 배움은 충분히 기쁠 수 있다. 배움으로써 이뤄낸 성취만큼 희열이 강한 게 또 있을까? 모르던 것을 알고, 못하던 것을 잘하게 되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세상에 배워야 할 것은 많다. 그리고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양적으로만 그러한 게 아니라 속도도 그렇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은 이미 옛말이 됐다. 단 하룻밤 만에 강산이 변할 수도 있는 엄청난 속도의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배워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기뻐야 할 배움이 스트레스가 되지 않도록 말이다. 본고에서는 일평생 배움을 업으로 삼았던 우리 선조 중 한 분인 퇴계 선생의 삶을 조명해 봄으로써 진정한 배움은 무엇이며 바람직한 배움의 자세는 무엇인지에 대한 교훈을 제시하고자 한다.

 

 

 

퇴계, 공부에 빠지다

 

퇴계의 공부법을 묻기 전에 퇴계가 어떤 인물인지 사전 조사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다행히 퇴계는 그다지 생소하지 않은 인물이다. 우리가 매일 한 번 정도는 손에 쥐어보는 1000원짜리 지폐의 전속모델이기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퇴계는 필자의 조상이다. 그래서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필자를 만나면 지폐에 그려진 퇴계의 얼굴과 닮았다는 말을 하곤 한다. 사실 16대 위의 먼 조상과 그렇게 닮았을 리는 없다. 게다가 1000원짜리 지폐에 그려진 얼굴은 퇴계의 진영이 아니다. 퇴계는 영정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진짜 얼굴은 알 수가 없다. (혹자는 필자의 얼굴을 보고 그린 것 아니냐고 하는데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다. 그림은 1974년에 그려졌고 필자는 그 이듬해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퇴계는 조선 연산군 7(1501) 경상도 예안현 온계리(현 경북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6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위인들 중에는 대개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어린 시절을 고생스럽게 보내는 경우가 종종 있다. 공자와 맹자가 그랬고 퇴계 역시 마찬가지였다. 태어난 지 반 년 만에 아버지를 여읜 퇴계는 어머니로부터세상 사람들이 과부의 자식이라 배운 것이 없다고 헐뜯을 것이니 너희들은 백 배 노력하지 않으면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라는 가르침을 항상 들으며 자랐다.

 

퇴계는 조용하고 담박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또한 어렸을 때부터 공부에 임하는 자세가 진지했다고 한다. 6세에 이웃에 사는 노인에게 천자문을 배웠는데 아침이면 반드시 용모를 단정히 하고 그 노인 집으로 가서는 울타리 밖에서 전날 배운 것을 두어 번 외운 다음 들어가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13세에는 <논어>를 배우다가학이편의배우는 사람은 집에 들어와서는 효도하고, 밖에 나가서는 공손해야 한다는 대목에 이르러사람의 도리는 마땅히 이래야 할 것이다”라고 스스로 경계했다고 한다. 20세 때는 침식을 잊고 밤낮으로 <주역>을 탐구하다가 건강을 해칠 정도로 공부에 심취했다.

 

임금의 간청을 뿌리치지 못해

잠깐씩 서울에 가서 관직을 맡은 적이 있지만

오랜 기간 머물지 않고 바로 낙향해서

오직 공부와 후진양성에 힘썼다.

 

퇴계가 15세에 냇가에 사는 가재를 보고 지은 시석해(石蟹)’2 에는 인생에 대한 그의 포부가 잘 드러나 있다. “돌을 지고 모래를 파니 저절로 집이 되고, 앞으로 가고 뒤로 달리니 발도 많구나. 평생 한 줌 샘물에서 살아가면 그만, 강호의 물이 얼마인지는 묻지 않겠노라.[負石穿沙自有家, 前行却走足偏多. 生涯一?山泉裡, 不問江湖水幾何.]” 이처럼 퇴계는 어린 시절부터 관직에 초연했고, 세상에 이름을 떨치고자 하는 욕심도 없었다. 그렇지만 퇴계는 주위의 권유와 홀어머니를 부양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마지못해 과거에 응시, 34세에 대과에 합격했다. 그러나 본래 벼슬에는 뜻이 없었기 때문에 관직생활을 시작하고 나서도 틈만 나면 한적한 지방의 관직을 자원하거나 자리에서 물러나려고 했다.

 

30대와 40대를 어쩔 수 없이 관직에서 보낸 퇴계는 49세에 단양군수와 풍기군수를 마지막으로 관직에서 완전히 물러나 학문에만 집중하려고 했다. 물론 이후에도 임금의 간청을 뿌리치지 못해 잠깐씩 서울에 가서 관직을 맡은 적이 있지만 오랜 기간 머물지 않고 바로 낙향해서 오직 공부와 후진양성에 힘썼다. 이와 같이 퇴계는 평생을 학문의 완성을 위해 정진했고,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도 그의 공부는 멈추지 않았다. 이를 두고 현대의 어떤 학자는 퇴계를걸어가다가 죽은 사람이라고 은유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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