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선생의 학습법

군자되라는 퇴계 선생의 가르침,爲己之學: 나를 수양해 공동체를 이롭게 하라

181호 (2015년 7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퇴계의 공부의 목적

 

공부란 인의예지(仁義禮智)라는 인간 본성(감정)의 발현이 항상 적절하도록 마음을 가다듬는 것. , 모든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감정을 유지하며 그 적절한 감정대로 실천하며 살아감으로써 가장 사람다운 사람, 이른바군자(君子)’ ‘성인(聖人)’이 되는 것. 그렇기에위인지학(爲人之學, 남에게 보이기 위한 공부)’이 아닌위기지학(爲己之學, 나를 위한 공부)’의 배움을 추구.

 

21세기에 퇴계의 공부법을 되새겨야 하는 이유

 

진정한 성공을 위해서는나를 위한 공부본성의 회복이 필요함. 기업도포장된 마케팅으로돈이 되는 제품·서비스를 내놓으려 하기보다 진정성을 갖춰인간 본연의 마음을 제시하려는 노력이 필요.

 

 

 

 

 

인간의 삶은 배움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배움은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돼 죽고 나서야 마친다. 걸음마, 말하기, 밥 먹기, 도구 사용하기 등과 같은 초보적인 일에서부터 정밀한 사유, 깊이 있는 학문, 고도의 판단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하는 일들은 모두 배움의 과정이자 결과물이다. 특히 우리는 인생 초반부의 4분의 1 정도를 전적으로 공부에 집중하며 보낸다. 더욱이 오늘날은 학교를 떠나더라도 공부가 끝나지 않는다. 생존을 위해서든, 취미로서든 거의 평생 동안 공부를 해야 한다. ‘평생학습이라는 말은 이제 특정한 사람만이 아닌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말이다.

 

이처럼 살아가면서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게 배움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배움은배우고 때에 맞게 익히니 기쁘지 아니한가1 라는 공자의 말씀처럼 과연 기쁜 일일까? 배움이나 공부라는 말을 입시·취업경쟁의 도구로 국한시킨다면 배움은 그다지 기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 삶의 영역 전반으로 그 개념을 넓힌다면 배움은 충분히 기쁠 수 있다. 배움으로써 이뤄낸 성취만큼 희열이 강한 게 또 있을까? 모르던 것을 알고, 못하던 것을 잘하게 되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세상에 배워야 할 것은 많다. 그리고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양적으로만 그러한 게 아니라 속도도 그렇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은 이미 옛말이 됐다. 단 하룻밤 만에 강산이 변할 수도 있는 엄청난 속도의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배워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기뻐야 할 배움이 스트레스가 되지 않도록 말이다. 본고에서는 일평생 배움을 업으로 삼았던 우리 선조 중 한 분인 퇴계 선생의 삶을 조명해 봄으로써 진정한 배움은 무엇이며 바람직한 배움의 자세는 무엇인지에 대한 교훈을 제시하고자 한다.

 

 

 

퇴계, 공부에 빠지다

 

퇴계의 공부법을 묻기 전에 퇴계가 어떤 인물인지 사전 조사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다행히 퇴계는 그다지 생소하지 않은 인물이다. 우리가 매일 한 번 정도는 손에 쥐어보는 1000원짜리 지폐의 전속모델이기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퇴계는 필자의 조상이다. 그래서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필자를 만나면 지폐에 그려진 퇴계의 얼굴과 닮았다는 말을 하곤 한다. 사실 16대 위의 먼 조상과 그렇게 닮았을 리는 없다. 게다가 1000원짜리 지폐에 그려진 얼굴은 퇴계의 진영이 아니다. 퇴계는 영정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진짜 얼굴은 알 수가 없다. (혹자는 필자의 얼굴을 보고 그린 것 아니냐고 하는데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다. 그림은 1974년에 그려졌고 필자는 그 이듬해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퇴계는 조선 연산군 7(1501) 경상도 예안현 온계리(현 경북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6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위인들 중에는 대개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어린 시절을 고생스럽게 보내는 경우가 종종 있다. 공자와 맹자가 그랬고 퇴계 역시 마찬가지였다. 태어난 지 반 년 만에 아버지를 여읜 퇴계는 어머니로부터세상 사람들이 과부의 자식이라 배운 것이 없다고 헐뜯을 것이니 너희들은 백 배 노력하지 않으면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라는 가르침을 항상 들으며 자랐다.

 

퇴계는 조용하고 담박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또한 어렸을 때부터 공부에 임하는 자세가 진지했다고 한다. 6세에 이웃에 사는 노인에게 천자문을 배웠는데 아침이면 반드시 용모를 단정히 하고 그 노인 집으로 가서는 울타리 밖에서 전날 배운 것을 두어 번 외운 다음 들어가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13세에는 <논어>를 배우다가학이편의배우는 사람은 집에 들어와서는 효도하고, 밖에 나가서는 공손해야 한다는 대목에 이르러사람의 도리는 마땅히 이래야 할 것이다”라고 스스로 경계했다고 한다. 20세 때는 침식을 잊고 밤낮으로 <주역>을 탐구하다가 건강을 해칠 정도로 공부에 심취했다.

 

임금의 간청을 뿌리치지 못해

잠깐씩 서울에 가서 관직을 맡은 적이 있지만

오랜 기간 머물지 않고 바로 낙향해서

오직 공부와 후진양성에 힘썼다.

 

퇴계가 15세에 냇가에 사는 가재를 보고 지은 시석해(石蟹)’2 에는 인생에 대한 그의 포부가 잘 드러나 있다. “돌을 지고 모래를 파니 저절로 집이 되고, 앞으로 가고 뒤로 달리니 발도 많구나. 평생 한 줌 샘물에서 살아가면 그만, 강호의 물이 얼마인지는 묻지 않겠노라.[負石穿沙自有家, 前行却走足偏多. 生涯一?山泉裡, 不問江湖水幾何.]” 이처럼 퇴계는 어린 시절부터 관직에 초연했고, 세상에 이름을 떨치고자 하는 욕심도 없었다. 그렇지만 퇴계는 주위의 권유와 홀어머니를 부양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마지못해 과거에 응시, 34세에 대과에 합격했다. 그러나 본래 벼슬에는 뜻이 없었기 때문에 관직생활을 시작하고 나서도 틈만 나면 한적한 지방의 관직을 자원하거나 자리에서 물러나려고 했다.

 

30대와 40대를 어쩔 수 없이 관직에서 보낸 퇴계는 49세에 단양군수와 풍기군수를 마지막으로 관직에서 완전히 물러나 학문에만 집중하려고 했다. 물론 이후에도 임금의 간청을 뿌리치지 못해 잠깐씩 서울에 가서 관직을 맡은 적이 있지만 오랜 기간 머물지 않고 바로 낙향해서 오직 공부와 후진양성에 힘썼다. 이와 같이 퇴계는 평생을 학문의 완성을 위해 정진했고,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도 그의 공부는 멈추지 않았다. 이를 두고 현대의 어떤 학자는 퇴계를걸어가다가 죽은 사람이라고 은유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사람은 왜 배워야 하는가?

 

퇴계의 학문의 깊이를 알기는 쉽지 않다. 퇴계와 동갑내기이자 당대 경상도 지역의 양대 산맥으로 불린 남명 조식 선생조차도경호(景浩, 퇴계의 )의 학문의 깊이는 논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라고 했을 정도였다. 그러니 학문의 깊이는 일단 제쳐두자. 그보다 먼저 퇴계가 왜 그토록 공부를 좋아했는지, 이 점부터 알고 싶다. 이 문제를 다르게 표현하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될 것이다. “사람은 왜 배워야 하는가?” 이는 비단 퇴계에게만 국한되지 않는, 우리 모두에게도 유효한 질문이다.

 

우리는 종종 이런 말을 접한다. “사람 되려면 배워야지!” 혹은배워야 사람 노릇하지!” 맞는 말이다. 공부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배워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사람 된다혹은사람 노릇이라는 말에 담긴 미묘한 뉘앙스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사람됨’ ‘사람 노릇이라는 말을 쓰고 있는 것일까?

 

비록 같은 말이기는 하지만 상황에 따라서 이 말은 정말로사람다운 사람보다 타인에게대접받는 사람의 의미를, ‘사람의 도리보다는타인 앞에서의 행세라는 의미를 더 강하게 가지기도 한다. 즉 남들에게 무시나 멸시를 당하지 않고행세하고대접받는 것이사람됨혹은사람 노릇의 의미에 깃들어 있다. ‘사람이라는 말을 이러한 의미로 쓴다면 공부는 학벌·지위·명예를 구축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하게 된다. 남보다 더 많이 더 효율적으로 배워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부를 유학(儒學)에서는위인지학(爲人之學)’이라고 했다. 위인지학이란남 때문에 하는 공부라는 의미다. ,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시켜서, 남들도 하니까, 남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이를 통해 타인에게 대접받기 위해 하는 공부다.

 

그러나 배움의 본질은 위인지학, 즉 남에게 보이기 위한 공부가 아니다. 진정한 배움은 세속적 의미의사람 되기의미가 탈각된, 자기 인격을 완성한다는 의미에서의사람 되는공부다. 이를 유학자들은위기지학(爲己之學)’이라고 했다. , ‘자기 자신을 위한 공부’ ‘내가 원인이 돼서 하는 공부가 진정한 배움의 본질이다.퇴계는 양자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위기지학이란, 도리를 우리 사람이 마땅히 알아야 할 것으로 삼고, 덕행을 우리 사람이 마땅히 행해야 할 것으로 삼아서 가까운 곳에서 공부에 착수해서 마음으로 터득하고 몸소 행하는 것이다. 위인지학이란 마음으로 터득하고 몸소 행하는 것은 힘쓰지 않고, 헛된 것을 꾸미고 외물에 따라가서 명예를 얻고자 하는 것이다.”

 

- <퇴계선생 언행록> 1

 

 

 

퇴계에게 공부의 목적은 과거에 합격해 관직을 얻거나 승진하는 것이 아니었음은 물론 지식인으로 명성을 얻고 타인의 존경을 받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퇴계는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의 명성이 알려질까 두려워했고, 타인으로부터 존경받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이 있으니,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합니다. 나에게도 역시 이러한 한탄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포부를 세상이 알아주지 않음을 한탄하지만, 나의 경우는 나의 헛됨을 알아주지 않는 것이 한탄스럽습니다.”

 

- <퇴계집> 11 ‘이중구에게 답함

 

 

 

학문을 통해 진정으로 퇴계가 추구한 것은 경쟁에서의 승리도, 지식인으로서의 명성도, 지식 그 자체도 아니었다. 오로지 순수한 의미에서의사람다운 삶이었다. 그 모습을 퇴계는 다음과 같이 은유적으로 표현한 적이 있다.

 

 

 

“군자의 학문은 위기지학일 뿐이다. 이른바 위기지학이라는 것은 장남헌(張南軒)이 말한의도하는 바 없이 그러한 것[無所爲而然]’이다. 마치 깊은 산 무성한 수풀 속에 한 떨기 난초가 있어, 종일토록 향을 피워내지만 정작 자신은 향기가 되는 줄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 <퇴계선생 언행록> 1

 

자기가 내뿜는 향기를 자기도 알지 못하는 난초처럼, 지식과 덕성을 갖추고 사람의 향기를 은은하게 뿜어내지만 어떤 의도와 목적도 없이 그러한 것. 퇴계는 그것이 진정한 사람다운 모습이라 여겼다. 남과의 경쟁에서 이기고 무언가가되기위한 공부가 아니기 때문에 쉬운 듯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그 간단하고도 어려운 일을 위해 퇴계는 묵묵히 평생을 학문의 길에 정진했다.

 

 

사람의 본질은 무엇인가?

 

사람이란 어떤 존재인가? 여기서 우리는 이 질문의 답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다. 위기지학은 사람의 본질을 탐구해서 그 길대로 살고자 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약간 장황하지만 유학에서 말하는 사람의 의미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유학의 이론에 따르면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는 이 세상의 만물은 기()라는 물질 혹은 에너지로 구성돼 있다. 기는 상반된 성질을 가진 음양(陰陽)이라는 원초적 물질 혹은 에너지다. 이 음양의 기가 다양하게 조합됨으로써 만물은 생겨나고 존재하게 된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물질이 이 세계의 전부는 아니다. 기의 세계의 배후에는 그것의 원인이 되는 근원자가 존재한다. 그것을 유학에서는 태극(太極) 또는 리()라고 했다. 이 태극은 물질세계와 다른 저기 어딘가에 별도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물질세계와 서로 떨어지지 않고 항상 함께 존재한다. 유학에서는 이를리와 기는 서로 섞이지도 않고 떨어지지도 않는다고 했다. 바꿔 말하면 태극 혹은 리는 이 세계와 만물의 형이상(形而上)적 측면이고, 기 혹은 음양은 그것의 형이하(形而下)적 측면이다. 즉 인간을 포함한 이 우주의 만물은 태극이라고 하는 절대적 존재가 자신의 모습을 형상화해 드러낸 것이다.

 

사람의 마음에 내재된 태극을 성()이라고 했다. 성은 마음속에 내재돼 마음의 작동방식을 결정하는 프로그램이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은 성의 명령이자 작용이다. 이 성이 상황에 따라 드러난 것, 즉 우리가 느낄 수 있는 마음을 정()이라고 한다. 기쁜 상황에서 기쁜 감정이 솟고, 슬픈 상황에서 슬픈 감정이 드는 것은 바로 이 성이 정으로 드러나는 현상이다.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생물은 감정이 있고, 그 감정 때문에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뱀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개구리는 살 수 없지 않겠는가?

 

사람에게 부여된 성을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의예지(仁義禮智). 유학에 따르면 사람이 사회를 이뤄 서로 도우며 살 수 있는 것은 어떤 인위적 안배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의예지라고 하는 사람의 본성에 근거해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다. 타인과 만물을 사랑할 줄 알고, 옳은 일을 할 줄 알며, 타인을 배려해 양보할 줄 알고,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인의예지의 성이 현실에서 끊임없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 가끔 혹은 종종, 인의예지의 발현이 방해받거나 왜곡되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감정은 부적절하게 드러나게 된다. 화가 날 일이 아닌데도 화가 치미는 경우도 있고, 짜증날 일이 아닌데도 짜증이 나기도 한다. 아무런 근거 없이 사람이 밉기도 하고,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을 사랑하기도 한다. 남에게 해코지를 하고도 별다른 불편한 마음을 갖지 않는 사람도 있으며, 부당한 이익인데도 좋아라 하며 챙기기도 한다. 이러한 것은 모두 성이 본래 방식대로 작동한 것이 아니다. 나의 무지나 착각, 잘못된 욕심으로 인해 성의 발현이 왜곡된 것이다.

 

유학에서의 공부란 바로 감정의 발현이 항상 적절하도록 마음을 가다듬는 것을 말한다. 모든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감정을 유지하며, 그 적절한 감정대로 몸소 실천하며 살아가는 게 유학에서 말하는 공부의 기본적인 목표이며, 그러한 사람이 바로 사람다운 사람, 즉 퇴계가 지향한 군자이고 성인(聖人)이다.

 

 

공부의 양 날개 - 거경과 궁리

 

적절한 감정의 발현과 실천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는 인식과 반응의 문제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적절한 감정 발현을 위해서는 첫째, 사태를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사태 파악이 왜곡돼 있다면 그에 따른 반응도 적절하지 못할 것은 분명하다. 둘째,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했다 하더라도 내 마음의 반응 양식이 왜곡돼 있다면 적절한 감정이 발현될 수 없다.

 

예를 들어 부모님에게 꾸중을 듣는 상황을 생각해 보자. 자식으로서 그 상황에 가장 적절한 감정적 반응은 나의 잘못과 부모님의 걱정에 대한 자책감·송구함·걱정스러움 같은 감정일 것이다. 이때 만일 사태 파악이 왜곡돼 있다면 부모님 꾸중은 귀찮은 잔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혹은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해 그것이 자식에 대한 사랑의 표현임을 인식했다 하더라도 내 마음이 등나무 줄기처럼 꼬여 있다면 역시 짜증이나 화와 같은 감정으로 반응할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배움은 바른 마음을 기르고 정확한 인식능력을 계발하는 두 방향으로 이뤄진다. 이를 유학 용어로 거경(居敬)과 궁리(窮理)라고 한다. 궁리는 말 그대로 세상의 이치를 궁구하는 것이고, 거경은 언제 어디서나 경()의 상태를 유지함을 말한다. 이 거경 공부와 궁리 공부는 마치 양 날개와 같다. 둘 중 어느 것도 소홀히 할 수는 없지만 굳이 따지자면 거경 공부가 기본이 된다. 퇴계 역시 거경에 큰 비중을 뒀는데 종종()은 학문의 시작과 끝’이며, ‘항상 경()을 지킬 수 있으면 성인(聖人)에 경지에 들어간 것이라 할 정도였다. 이처럼 거경은 퇴계 공부법의 핵심 중 핵심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경을 지킨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할까?

 

보통 사람의 마음은 쉼 없이 움직인다. 그 요동치는 마음의 대부분은 그다지 생산적이지 않다. 마음은 외부 사물의 유혹을 받고 거기에 반응한다. 외부 사물의 유혹이 없다 하더라도 사람의 마음속에는 쉴 새 없이 생각이 피어오른다. 그런 생각의 대부분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잡념일 뿐이다. 이렇게 잡념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은 본래의 마음이 아니다. 본래 마음은 고요하고 순수한 것인데, 잡념은 그 마음이 자기중심적인 욕심에 가려짐으로써 생겨난다.

 

거경공부의 관건은 욕심으로 인해 생겨난 잡념을 비우고 마음의 본래 상태를 회복하는 데 있다. 욕심과 잡념을 비우면 마음은 또렷이 깨어 있고 거울처럼 텅 비게 된다. 그 마음은 한 곳에 집중돼 있어 두 갈래, 세 갈래로 흩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마음의 상태는 마음이 하늘과 하나가 돼 존재의 본질인 태극이 온전하게 드러나는, 가장 자연스럽고 편안한 마음이다. 이 마음의 상태를 유지한다면 외물의 자극이 없을 때는 명경지수(明鏡止水)와 같은 밝고 맑은 마음이 되고, 외물의 자극이 있을 때는 그에 대해 능동적으로 정확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된다.

 

경은 하늘(혹은 태극, )의 소리를 온전하게 듣고 그에 따르고자 하는 노력이다. 그 노력은 단기간 기울인다고 충분치 않다. 장기간에 걸친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이를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하늘과 하나의 마음이 되도록 주파수를 맞추는 행위와 같다. 손으로 튜너를 돌려서 주파수를 맞추는 아날로그 라디오를 상상해보자. 아날로그 라디오로 채널을 찾을 때, 정확한 주파수에 맞기까지는 잡음이 계속되지만 그 주파수에 정확히 맞으면 잡음 없는 깨끗한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경의 마음은 그러한 상태와 같다. 그런데 아날로그 라디오는 채널을 정확히 맞춰 놓는다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또 잡음이 섞이기 시작한다. 이때 다시 튜너를 조정해서 잡음 없는 상태로 돌려놓아야 한다. 그러나 경의 실천이 오래되면 처음에 큰 힘을 들여 튜너를 맞추는 것보다 쉽고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이 경을 바탕으로 해서 궁리(窮理)에 힘써야 한다. 궁리란 말 그대로 세상의 이치를 탐구해 깨우치는 길이다. 궁리공부는 책이나 수업에 국한되지 않는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만나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세상의 이치를 배울 수 있다. 그러므로 일상의 모든 때와 장소가 궁리의 자리다. 하지만 이치를 깨우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성현이 남긴 말을 보는 것이다. 성현의 말씀은 책에 담겨 있으므로 궁리공부에서 사실상 독서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는 오늘날의 공부와 비슷한 것 같지만 차이가 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익숙한 공부는 보통 글이나 강의를 통해 지식과 정보를 얻는 행위다. 우리는 지식과 정보를 얻어서 그것을 암기했다가 시험에 써먹는다. 그중에서 지속적으로 활용하는 정보는 그대로 담아두지만 사용되지 않는 정보는 폐기된다. 오늘날의 공부란 이 과정의 반복이다.

 

만일 나의 지식에 잘못된 점이 있으면

거기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배우고 묻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과정을 거쳐 실천에 옮긴다.

공부는 이 과정의 무한 순환이다.

 

한편 유학자들이 말하는 궁리공부는 정보를 습득해서 지식적으로 이해하고 암기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책을 읽고 그 뜻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진정한 공부를 했다고 할 수 없다. 진정한 공부가 되려면 단지 많은 것을 읽고, 많이 아는 것을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된다. 철저하게 이해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아는 것을 추구해야 하며, 자기중심적 계산이 아니라 만물의 원리를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걸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세상의 이치에 통달해야만 비로소 정확하고 올바른 인식이 가능하다.

 

배움, 질문, 생각, 판단, 실천

 

퇴계의 공부 목적은 가장 사람다운 사람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 즉 성인(聖人)이 되는 것이다. 퇴계는 이 점에서 그 누구에게도 한 발의 양보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공부는 철저하고 독실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퇴계를 비롯한 유학자들이 실질적으로 공부를 할 때, 구체적으로는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다음은 <중용(中庸)>에서 말하는 공부의 다섯 가지 과정이다.

 

첫째, 박학(博學), 폭넓게 많은 지식을 습득함을 말한다. 많은 지식을 습득하는 것은 단순히 박학다식한 사람이 돼 지식을 뽐내려 하는 것이 아니다. 폭넓게 배우지 않으면 시야가 좁아지고 생각이 치우치기 십상이다. 어떠한 지식이든 수용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되도록 어느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자세는 배우는 사람에게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박학이 필요한 이유다.

 

둘째, 심문(審問), 의문 나는 것을 자세히 살펴서 묻는 일이다. 설렁설렁 대충 많은 것을 아는 것보다 하나라도 정확하고 올바르게 아는 게 중요하다. 정확하게 알기 위한 가장 빠른 방법은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 질문하는 것이다. 불치하문(不恥下問)이라고 했다. 즉 나이·학식·신분에 관계없이 내가 모르는 것을 더 잘 아는 사람이 있다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물을 수 있어야 한다.

 

셋째, 신사(愼思), 신중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공부는 결국 자기가 하는 것이지 남의 생각을 주워 담고 앵무새처럼 따라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배우고 묻는 것과 같은 남의 도움을 받는 정도를 넘어 공부의 더 깊은 단계로 나아가는 길은 바로 자기의 생각이다. 생각을 통해 깨우치고 알아야만 비로소 나의 것이 된다.

 

넷째, 명변(明辨), 명료하게 판단하는 것이다. 배움과 물음, 사색의 과정을 거쳐 옳은 판단을 내리는 단계다. 이 판단으로 나의 행동이 결정된다.

 

다섯째, 독행(篤行), 독실하게 실천하는 것이다. 공부의 전 과정을 통해 옳다고 판단된 것은 꿋꿋이 실천한다. 실천하지 않는 앎은 앎으로서의 가치가 없다. 위의 네 단계를 거치는 것은 바로 이 실천을 위해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의 앎과 행동은 완벽할 수 없다. 이러한 과정을 충실히 거쳐서 얻어진 지혜라고 하더라도 어딘가는 단점이나 잘못된 점이 있을 수 있다. 유학자들은 그 가능성을 항상 열어놓는다. 나의 지식과 지혜에 잘못이 있을 가능성을 열어 놓았기에 그들의 지식은 절대화·교조화되지 않는다. 만일 나의 지식에 잘못된 점이 있으면 거기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배우고 묻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과정을 거쳐 실천에 옮긴다. 공부는 이 과정의 무한 순환이다.

 

퇴계의 독서법

 

배움은 꼭 책으로 하는 것만이 아니다. 일상의 모든 경험이 배움의 장이다. 그러나 책은 두 가지 이유에서 가장 좋은 교재가 된다. 첫째는 직접적인 경험을 할 수 없을 때 언제라도 할 수 있는 간접 경험이기 때문이다. 소위경전이 아닌 다른 책이라도 이 점에 있어서는 공통적이다. 유학적 관점에서 독서가 가장 좋은 배움이라고 하는 이유는, 책이 성현(聖賢)의 말과 생각을 그 내용으로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책을 읽는 것은 단순히 지식의 암기가 아닌 선현의 지혜를 배우는 일이다. 이는 시대를 초월해 성현을 사숙(私淑)하는 일, 혹은 맹자가 말한옛사람을 벗삼는[尙友]’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퇴계는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으로 글을 읽었을까? 첫째, 다독이 아닌 정독과 숙독을 했다. 책은 꼭 많이 읽는 게 좋은 것은 아니다. 다독은 욕심이다. 정말로 나에게 길을 제시할 수 있는 책을 몇 권 찾아내 그것을 반복해서 숙독하는 것이 옳다. 한 글자 안에 담긴 의미도 빠뜨리지 말고, 반드시 정독하고 곱씹어야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한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해야만 그 지식과 지혜가 완전히 내 것이 돼 내 마음에 녹아들 수 있다.

 

둘째, 독서와 사색이 적절한 균형을 이뤘다. 퇴계는성현의 글은 단지 낮에만 읽어볼 것이 아니라 밤중에 마음이 고요할 때 깊이 생각해 천지자연의 이치를 깊이 몸으로 인식해야 한다고 하면서크게 의문을 갖는 자만이 반드시 크게 깨닫는다. 생각하지 않고 실행하지 않는다면 의문도 없고 깨달음도 없을 것이라고 했다. 위기지학은 마음을 풍요롭게 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얻고자 하는 것이지, 시험에 합격하거나 지식을 남에게 뽐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많은 책을 읽고 외워서 많이 알고 있다고 한들, 그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공허한 지식일 뿐이다. 한편 배우기는 싫어하고 생각만 한다면 그 생각이 올바른 것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없게 된다. 올바른 생각이 아닌 독선적인 생각에 깊이 빠지면, 그 생각은 위험한 방향으로 흐를 수 있다. 책으로 읽은 지식은 생각을 통해 내 것이 되고, 그럼으로써 나의 삶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참지식과 지혜로 우러날 수 있다.

 

셋째, 한꺼번에 많은 양을 욕심내지 않았다. 퇴계는 평생을 학문에 힘썼지만 전투적으로 공부에 임했던 것은 아니다. 20세 때 <주역>을 과하게 탐독하다가 건강을 해친 이래, 그러한 공부는 도움이 되기보다 오히려 해가 된다고 생각했다. 퇴계가 읽은 책은 단순한 지식이나 정보 저장소가 아닌 성현의 지혜가 담겨 있는 보물창고였다. 그 보물창고에서 노리개를 꺼내 완상(玩賞)하듯 자기에게 절실한 것을 숙독하고 음미해야 한다. 퇴계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책을 볼 때는 마음이 괴로운 지경에 이르도록 해서는 안 되며, 많이 보는 것은 절대 금물입니다. 단지 글의 의미에 따라 그 맛을 즐겨야 합니다. 이치를 탐구하는 일은 일상의 평이하고 명백한 곳에서 시작해 익숙하게 일상의 이치를 간파해서,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을 넉넉하고 여유롭게 곱씹어봐야 합니다. 억지로 탐구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내려놓는 것도 아닌 듯, 관조해 잊어버리지 않아야 합니다. 이러한 것이 오래 쌓이면 저절로 눈이 녹듯이 터득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공부에 집착하고 얽매여서 급히 효험을 바라는 것은 매우 좋지 않습니다.”

 

- <퇴계집> 14 ‘남시보에게 답함

 

 

 

넷째, 오랜 시간을 두고 글을 읽고 사색하고 실천해야 한다. 글의 뜻은 머리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머리로 이해하는 단계를 넘어 몸과 마음에 깊이 배어들어야 한다. 몸과 마음에 배어든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의미를 마치 고기 맛을 느끼듯 즐겨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앎의 단계를 넘어서 일상에서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 학문의 성취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는다. 진실한 배움이 많이 쌓이고 오랫동안 노력[眞積力久]해야만 학문은 진전을 이룰 수 있다. <중용>에 제시된 것처럼남이 한 번에 잘 해낸다면 나는 백번이라도 반복하고, 남이 열 번에 잘 해낸다면 나는 천 번이라도 반복해서 해낼 것[人一能之己百之, 人十能之己千之]

”이라는 정신으로 포기하지 않고 노력해야 한다. 재주가 뛰어난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만큼 학문의 깊은 성취는 쉬운 일이 아니다. 율곡에게 전해준 다음의 메시지에서 퇴계의 이러한 생각을 들여다볼 수 있다.

 

 

 

“텅 빈 마음으로 이치를 살피고 자기의 의견을 먼저 고집해서 정해버리지 말아야 차츰차츰 쌓아가서 완전히 성숙하게 되는 것이니, 한때나 한 달로써 효과를 따져서는 안 됩니다. 얻지 않고는 그만둘 수 없다는 자세로 평생의 사업으로 삼아야 합니다. 궁구한 이치가 무르익어 자세히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이 전일한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은 모두 학문이 깊이 나아간 뒤에라야 스스로 얻을 수 있을 따름입니다.”

 

- <퇴계집> 14 ‘이숙헌에게 답함

 

 

 

21세기, 퇴계의 공부법을 되새겨야 하는 이유

 

경쟁과 속도, 효율과 실리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퇴계의 공부법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특히나 치열한 경쟁의 정글 속에 있는 기업인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줄 수 있을까? 조금 날카로운 독자라면 아마도 지금쯤 회의를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과거시대의 선비들처럼 그리 팔자 편한 사람들이 아니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퇴계를 비롯한 과거의 선비들 역시 팔자 편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지금보다 훨씬 열악한 환경에서 헐벗고 굶주리며 살아남기 위한 사투를 벌였다. 전쟁, 전염병, 자연재해 등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일은 지금보다 심했으면 심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닦는 공부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어째서일까?

 

유학을 구성하는 키워드 중 하나는일상실천이다. 유학에서 마음을 닦아 적절한 감정으로 살고자 한 이유는 그 마음으로 세상에서 일을 하기 위해서였다. ‘나를 위한 공부를 통해 자기 수양을 한는 반드시 세상을 위해서 쓰여야 하며, 쓰이게 된다. 수양이 된그 마음으로 정치를 하고, ‘그 마음으로 경제를 일으키며, ‘그 마음으로 나라를 지키고, ‘그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라는 것이다. 그래야만 세상은 밝아지고 진정한 성공으로 이어진다. 실제로 세종대왕이그 마음으로 한글을 만들었고, 서애 류성룡 선생이나 충무공 이순신 장군, 그리고 숱한 의병들이그 마음으로 나라를 지켰다.(이순신 장군도 학식이 상당히 높은 유학자였고, 의병장들의 대부분이 유학자였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정조와 다산의 경세치용도 바로그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유학은 단순히 도덕적으로 반듯하게 살 것을 요구하는 도덕론이 아니라 매우 실질적인 학문이라 할 수 있다. 유학도 기술과 실무지식을 소홀히 한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그것은 너무나 기본적인 것이라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었을 뿐이다. 실무적 능력의 습득은 인격수양에 비하면 쉬운 일이고, 개인마다 배워야 할 지식이 다르며, 개인 간의 능력 차도 대동소이하기 때문이다. 누군들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열심히 실무 능력을 계발하려 하지 않겠는가?

 

결국 중요한 것은 인격과 마음이다. 유학에서는그 마음이 갖춰지지 않은 사람은 큰일을 할 자격이 없다고 한다. 실제로 자기 수양이 돼 있지 않은 사람이 일을 맡으면 자기도 그르치고 세상도 망친다. 여기에 해당되는 예는 굳이 들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그랬고, 지금 바로 이 시간 정치판에서도 실시간으로 증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퇴계의 공부론은 한가하거나 팔자 편한 사람에게만 유용한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지위가 높거나 영향력이 큰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절실한 것이나를 위한 공부.

 

진정한 성공을 위해서는 반드시나를 위한 공부본성의 회복이 필요하다. 바야흐로 윤리성이 성공의 필수 요건이 되는 시대가 도래한다. 사람들은 점점 더 똑똑해지고, 윤리적 기업과 그렇지 못한 기업을 더 잘 분별해 낼 것이다. 소비자들은 머지않아 마케팅 전략으로 사용되는 포장된 윤리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윤리성까지도 구별해 낼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선한 것을 좋고 편안히 여기고, 거짓된 것을 불편하게 여기게 돼 있기 때문이다. 기업이돈이 되는 제품이나 서비스’, 그리고포장된 마케팅이 아닌인간 본연의 마음을 제공할 때, 그것은 최고의 제품과 서비스가 될 것이며, 그러한 기업만이 진정한 성공의 자격을 얻을 것이다. ‘의도하는 바 없이 그러한난초와 같은 기업이 돼 보는 건 어떨까?

 

 

이치억 성신여대 동양사상연구소 연구교수 muhayu@daum.net

 

필자는 퇴계 선생의 17대 종손(차종손)으로 전통적인 유교 집안에서 나고 자라면서 유교에 대한 반발심으로 유교철학에 입문했다가 현재는 유교철학의 매력에 푹 빠져 있다. 성균관대 유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성신여대 동양사상연구소에서 연구 활동을, 성균관대·동인문화원 등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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