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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쾌락은 금방 사라진다… 큰 기쁨보다 작은 기쁨 자주 느껴야 더 행복

한근태 | 159호 (2014년 8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 자기계발

 

행복은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다. 인간이 생존과 번식에 필요한 유인책이 바로 행복일 뿐이다. 생존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정신적 도구에 불과하다.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게 아니라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상황에서 행복을 느껴야만 했다. 행복에는 외적 조건이 아니라 주관적인 인식이 더 중요하다. 또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가 더 중요하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행복할까. 행복한 사람은 외향적이고 정서적 안정성이 높다. 사회적인 인적 관계도 활발하다.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물질이 아니라 좋은 경험을 더 느끼는 데 애를 써야 한다. 또 다른 사람을 덜 의식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평가한다고 생각하면 본능적으로 긴장하고 위축된다. 행복은 남이 나를 평가하는 것에서 오지 않는다. 지극히 사적인 경험이고 영역이다. 행복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허락을 받거나 인정을 받을 필요도 없다.

 

 

삶의 목적은 무엇일까? 사람들은 대부분 삶의 목적이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행복을 절대 가치로 여긴다. 서은국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다른 주장을 편다. 그는 저서 <행복의 기원>에서 사람들이 행복을 위해 사는 게 아니라 생존하기 위해 행복이 필요할 뿐이라고 했다. 이 책은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까를 얘기하는 대신 행복의 기원이 무언지를 파고든다. 행복과 관련된 많은 기존 생각들을 무너뜨린다. 1977년 스페인령 캐너리군도의 작은 섬에서 최악의 항공사고가 발생했다. 미국 팬암과 네덜란드 KLM의 항공기가 활주로에서 충돌해 583명의 사상자를 낸 것이다. 사고원인은 조종사의 커뮤니케이션이었다. 커뮤니케이션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이 사고는 상공이 아니라 활주로에서 발생했다. 항공기 충돌 후 수십 분이 지난 뒤 기체가 폭발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숨질 사고는 아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숨졌을까? 사고 후 승객들이 탈출하지 않고 자신의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탈출하는 게 맞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몸이 얼어버린 것이다. 포식자 앞에서 일시적으로 몸이 얼어버리는 것은 동물의 본능 중 하나다. 결정적 순간 그 동물적 본능이 나타난 것이다. 인간은 합리적이지 않다. 우리는 이성적 능력을 과대평가한다. 이성적일수록 행복한 게 아니라 오히려 행복에 방해가 된다. 역으로 본능의 보이지 않는 힘을 과소평가한다. 우리는 사실 본능에 따라 행동한다.

 

행복은 생존을 위해 필요한 정신적 도구에 불과

행복은 생각이 아니다. 우리는 긍정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한다. 흔히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한다. 그럴 듯한 얘기지만 현실성이 적다. 불행한 사람이라고 긍정의 가치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이들 역시 긍정의 중요성을 알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싶어 한다. 다만 몸이 따라주지 않을 뿐이다. 행복도 그렇다. 행복의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다만 뜻대로 되지 않을 뿐이다. 행복은 생각이 아니다. 행복을 추구하라는 충고를 듣는다고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악어와 개미는 생각 자체가 없다. 생각을 하지 않는다. 철새도 생각하고 이동하지 않는다. 본능적으로 움직일 뿐이다.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이 산다고 자주 비난한다. 그렇다면 생각을 많이 하면서 살라는 얘기인데, 생각을 많이 하면 행복해질까? 그렇지 않다. 생각을 많이 하면 행복하고 생각이 없으면 불행할까? 오히려 반대다. 아무 생각 없이 느끼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이 행복이다. 생각을 많이 할수록 불리하다. 호흡하겠다고 생각하고 호흡하는가? 먹어야 산다고 생각하면서 먹는가? 자손을 만들기 위해 억지로 섹스를 하는가? 오늘은 혈액 좀 돌려야지 하면서 혈액을 돌리는가? 다 저절로 움직인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동으로 이뤄진다. 행복을 위해서는 의식적 사고를 줄이고 무의식적 사고를 많이 해야 한다. 행복은 생각이 아니기 때문이다.

 

행복을 위해서는 인간이 동물이란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동물에게 최고의 가치는 두 가지뿐이다. 하나는 살아남는 것이고, 다음은 짝짓기를 통해 대를 잇는 것이다. 그 외의 모든 것은 두 가지와 다 연결돼 있다. 이 중 최고의 가치는 생존이다. 살아남는 것이다. 생존경쟁은 생명을 건 싸움이다. 승자는 후손을 통해 자신의 생명을 지속하지만 낙오자는 더 이상 생명체가 아닌 싸늘한 물질로 돌아간다. 태평양 연어는 6000개의 알을 낳지만 생존자는 단 두 마리뿐이다. 무려 30001의 경쟁이다. 생존 다음은 성공적인 짝짓기다. 수컷들에겐 특히 심각한 문제다. 치열한 경쟁에서 이겨야 짝을 지을 수 있다. 침팬지 마을을 보면 전체 침팬지 새끼 중 86%는 정권을 쥔 몇몇의 자식이다. 소수의 수컷이 모든 암컷을 차지하는 구조다. 대다수 침팬지는 평생 단 한 번의 짝짓기 기회도 갖지 못한다. 거의 모든 암컷은 짝짓기 기회를 가졌지만 수컷의 경우 일부만 후세에 유전자를 남길 수 있다. 남녀의 기질 차이는 이 때문에 발생한다. 여자는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엄마가 될 수 있다. 당연히 안정지향적이다. 수컷은 다르다. 최고가 되지 못하면 짝짓기에서 낙오된다. 매사모 아니면 도의 전략을 택해야 한다.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마찬가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은 다분히 목적론과 가치 지향적이다. 삶의 궁극적 목적은 행복이며 그것은 의미 있는 삶을 통해 구현된다는 생각이다. 도덕책 버전의 행복론이다. 서 교수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살아남기 위해 행복이란 도구를 썼다는 것이다. 생존하기 위해, 짝을 짓기 위해 행복을 만들었고 그 결과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는 주장이다. 공작새 꼬리가 증거물이다. 화려한 공작새의 꼬리는 생존에 치명적이다. 적의 눈에 쉽게 띄는 방해물이다. 그래서 다윈은 공작새 꼬리를 볼 때마다 어지럽고 토가 나온다고 편지에 썼다. 다윈은 이 수수께끼를 이렇게 풀었다. “생존의 목적은 단지 살아 숨쉬는 것은 아니다. 후세에 자신의 유전자를 남겨야 한다. 성공적인 짝짓기가 없는 생존은 의미가 없다. 위험을 무릅쓰면서 공작새가 사치스런 꼬리를 가진 이유는 바로 짝짓기 때문이다.” 무늬가 많은 공작새일수록 짝짓기 빈도는 확연히 높다. 무늬 20개를 가위로 오려내자 짝짓기 횟수가 2.5배 정도 감소했다. 꼬리는 패션아이템이 아니다. 수컷의 화려한 꼬리는 자신이 건강하고 우월한 유전자를 가진 존재라는 것을 암컷에게 과시하는 상징물이다. 짝짓기를 위한 치열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생명체의 모든 생김새와 습성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생존과 짝짓기를 위한 도구다. 미국의 진화심리학자인 제프리 밀러는 <메이팅 마인드>라는 책에서 인간의 마음이란 진화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도구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다만 그렇게 의식하지 못할 뿐이다. 인간의 마음은 공작새 꼬리 같은 기능을 한다. 피카소는 5만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그가 왜 이렇게 많은 작품을 남겼을까? 그는 꾸준한 사람이 아니다. 붓을 한참 내려놓고 있다가 갑자기 예술적 창의력이 폭발했다. 그런데 이 광적인 시기에는 언제나 새로운 여인이 등장한다. 여인의 등장과 작품의 폭발시점이 일치한다. 창의성과 로맨스의 궁합은 피카소만의 얘기는 아니다. 살바도르 달리, 단테, 구스타프 클림트, 일반 대학생 등도 모두 그렇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도, 작품활동을 애써서 하는 것도 궁극적인 목적은 짝짓기를 위한 것이다. 현대인들이 죽어라 일을 하고, 돈을 벌고, 이름을 날리려고 하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좋은 짝을 만나기 위한 도구일 뿐인 것이다.

 

행복이란 감정은 생존에 어떤 도움을 줄까? 인간은 생존을 위해 만들어진 동물이다. 생존확률을 최대화하도록 설계된 생물학적 기계다. 행복은 이런 청사진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개는 헤엄을 즐기지 않지만 주인은 과자인 새우깡을 활용해 개에게 서핑까지 하도록 만들 수 있다. 주인은 새우깡의 힘을 빌려 개가 자신이 원하는 행동(서핑)을 하도록 단계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다. 행복의 본질은 개에게 서핑을 하도록 만드는 새우깡과 비슷하다. 개에게 사용된 새우깡 같은 유인책이 행복감(쾌감)이다. 개가 새우깡을 얻기 위해 서핑을 배우듯 인간도 쾌감을 얻기 위해 생존에 필요한 행위를 한다.조상들은 목숨 걸고 사냥을 하고 기회가 생길 때마다 짝짓기에 힘썼다. 행복은 삶의 최종 이유도 목적도 아니다. 다만 생존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정신적 도구일 뿐이다.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상황에서 행복을 느껴야만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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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근태

    한근태kthan@assist.ac.kr

    - (현) 한스컨설팅 대표
    -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 교수
    - 대우자동차 이사 IBS 컨설팅 그룹 상무
    - 한국리더십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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