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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함의 미학

조선 백자, 흰색 하나로 모든 것 표현 쉽고 단순한 것이 하늘과 통한다

이기동 | 126호 (2013년 4월 Issue 1)

 

 

 

세상살이 참 복잡하다. 도대체 뜻대로 되는 것이 없다. 공부도 어렵고, 친구 사귀는 일도 어렵다. 이성을 만나 사랑을 나누는 일은 더욱 어렵다. ‘한 사람 사랑하는 데 왜 이렇게 힘이 드는가라고 노래하는 가수도 있다. 세상에 쉬운 일이 없다. 취직하기도 어렵고 취직을 하더라도 직장생활의 어려움은 계속된다. 세상일이 너무 빨리 변해서 거기에 따라가는 것도 쉽지 않다.

 

가정을 꾸려가는 일도 만만치 않다. 부부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는 것도 어렵고 부모와 자녀, 형과 아우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는 것도 쉽지가 않다. 기업을 경영하는 일도 어렵고, 국가를 경영하는 일도 어렵다. 세계 평화를 달성하는 일은 더더욱 어렵다.

 

세상에 온통 어려운 일뿐이다. 세상살이가 왜 이렇게 어려울까? 그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주역>에서는 인생의 삼대 원리를 변역(變易), 불역(不易), 이간(易簡)이라 했다. 변역은 모든 것이 변하고 바뀐다는 뜻이다. 세상살이가 복잡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세상에 똑같은 것도 없고, 바뀌지 않는 것도 없다. 세상의 일은 마치 거대한 나무의 잎들이 각각 다른 모습으로 각각 다르게 움직이고 있는 것과 같다. 그 많은 잎들의 모양과 움직임을 다 파악하는 일은 참으로 어렵고 복잡하다. 그런 것을 다 파악하고 있어야 제대로 살 수 있다면 세상살이는 참으로 복잡하고 어렵다.

 

그러나 잎들은 그렇지 않다. 잎들은 독립된 개체가 아니다. 잎들은 가지에 붙어 있고, 가지는 줄기에 붙어 있고, 줄기는 뿌리에 붙어 있다. 뿌리는 변하지 않고 바뀌지 않는다. <주역>서 말한 불역이란 말이 바로 그것이다. 불역(不易)은 바뀌지 않는다는 말이다.

 

잎의 움직임은 복잡하지만 뿌리의 움직임은 단순하다. 그렇지만 잎과 뿌리가 별개의 것이 아니다. 잎과 뿌리는 하나로 연결돼 있다. 잎이 다른 잎들을 다 파악하는 것은 어렵고 복잡하다. 다른 잎들과 어울리는 방법은 더욱 어렵고 복잡하다. 그러나 다른 잎들을 파악하는 대신 자기의 본질로 파고 들어가 뿌리에까지 가서 닿으면 모든 잎들은 남이 아니라 바로 자기로 바뀐다. 모든 잎들은 뿌리와 연결돼 있다. 뿌리에서 보면 모든 잎들은 하나로 통한다. 이를 공자는 일이관지(一以貫之)라는 말로 표현했다. 모든 것이 하나로 꿰어져 있다는 말이다.

 

모든 잎들은 뿌리의 뜻으로 존재한다. 뿌리에서 물이 올라오면 푸름을 유지하면 되고, 물이 올라오지 않으면 붉게 물들면 된다. 잎들이 뿌리의 뜻을 잊어버리면 복잡해진다. 언제 싹이 터야 할지, 언제까지 푸른빛을 유지해야 할지, 언제 붉게 물들어야 할지, 또 다른 잎들과 어떤 관계를 유지해야 할지 도무지 알기 어렵다. 그러나 뿌리의 뜻을 알고 뿌리의 뜻을 따르면 어려울 것이 없다. 망설일 것도 없고, 주저할 것도 없다. 뿌리가 시키는 대로 그냥 따르기만 하면 된다. 참으로 간단하고 쉽다. <주역>에서 말한 이간(易簡)이 그것이다. 이간은 쉽고 간단하다는 말이다.

 

사람이 사는 것도 그렇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각각 독립된 개체로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복잡하고 어렵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다. 한 사람의 속도 알기 어려운데 수많은 사람을 어떻게 알고 어떻게 대할 수 있을까? 사람살이가 이렇게 어렵고 복잡하게 된 데는 원인이 있다. 그 까닭은 모든 존재를 연결하는 하나의 뿌리를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모든 잎들이 하나의 뿌리와 연결돼 있듯이 모든 사람은 하나로 연결돼 있다. 형제는 부모를 매개로 하나로 연결돼 있고, 사촌들은 조부모를 매개로 하나로 연결돼 있다. 이렇게 확대해가면 모든 사람은 하나로 연결돼 있다. 형제가 비슷하게 생긴 것은 하나로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사촌이 비슷하게 생긴 것도 하나로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서로 비슷하게 생긴 까닭도 모두 하나로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연결돼 있는 것은 사람뿐만이 아니다. 모든 생명체가 하나로 연결돼 있다. 사람과 아메바의 DNA 97%가 같다고 한다. 연결돼 있는 것은 생명체뿐만이 아니다. 모든 물체가 하나로 연결돼 있다. 그 하나로 연결돼 있는 뿌리가 하늘이다. 그 하늘을 하느님이라고 해도 되고, 하나님이라고 해도 된다. 자연의 생명력이라고 해도 되고, 그냥 자연이라고 해도 된다. 그 하나의 뿌리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물질이 아니다. 물질이라면 하나가 될 수 없다. 그 하나의 뿌리는 모든 물체를 유지시키고 모든 생명체를 살리는 작용을 한다. 그 작용은 모든 물체의 원자 속에서 작동하고 모든 생명체의 세포 속에서 작동한다. 모든 생명체는 유전자의 명령에 따라 생명을 유지한다. 그 유전자의 생명을 유지하는 작용은 모든 생명체에 공통이다. 공통이기 때문에 하나다. 하나가 하늘이고, ()이고, GOD, 자연(自然)이다. 서구에서 르네상스운동이 일어난 이후 과학이 발달하고 인류문명이 비약적으로 발전했지만 사람들이 한 가지 큰 실수를 했다. 사람들이 그하나를 부정했다. 사람들이 그 하나를 부정하는 것은 잎이 뿌리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뿌리를 부정하고, 뿌리의 뜻을 외면한 존재는 오직 사람뿐이다. 사람의 삶이 어렵고 복잡해진 까닭은 그 때문이다.

 

사람 이외의 생물체는 여전히 자연으로 살아간다. 자연(自然)이란 저절로 그러하다는 뜻이다. 저절로 그러하기 때문에 어려울 것도 없고, 복잡할 것도 없다.

 

실내에서 자라고 있는 식물은 줄기가 창 쪽으로 향해 뻗어가지만 그쪽으로 가야만 햇빛과 만나 광합성을 할 수 있다는 것을 파악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저절로 그렇게 한다. 동해의 개천에서 자란 연어는 태평양을 건너 알래스카의 앞바다에까지 갔다가 산란기가 되면 자기가 자랐던 개천으로 돌아오지만 그 개천을 애써 잊지 않고 기억한 뒤에 돌아오는 것이 아니다. 그냥 저절로 그렇게 한다. 집이 무너지기 전에 거기에 있던 쥐나 고양이는 다른 곳으로 피신을 하지만 그들은 집이 무너진다는 것을 알고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저절로 그렇게 한다. 갓 태어난 송아지는 비실비실 걸어서 어미 소의 젖을 먹으러 간다. 그렇게 해야 살 수 있다는 것을 알아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저절로 그렇게 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대자연의 생명체가 살아가는 모습이 모두 그렇다. 그것은 신비에 가까울 정도로 경이롭다. 그 모든 삶의 방법은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일 뿐이다.

 

사람의 삶도 예외가 아니다. 삶 그 자체가 신비다. 사람의 몸 구석구석을 들여다보면 너무나 정밀하고 신비롭다. 이런 몸을 누가 만들었을까? 우리 부모님이 어떻게 이런 정밀하고 신비한 몸을 만들었을까? 우리 부모님께서 이런 몸을 만드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저절로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몸을 만드는 것은 간단하고 쉽다.

 

이 몸은 저절로 그렇게 태어났고, 저절로 그렇게 자랐다. 저절로 손과 발이 생겼고, 저절로 손가락 다섯 개와 발가락 다섯 개가 생겼다. 밥을 먹으면 저절로 소화가 되고, 저절로 힘이 생긴다. 때가 되면 저절로 밥을 먹고, 피곤하면 저절로 쉬며, 밤이 되면 저절로 잠을 잔다. 생명을 유지하는 방식이 참으로 오묘하지만 그런 방식이 전혀 어렵지 않다.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므로 쉽고 간단하다.

 

하늘은 자연의 생명력이다. 하늘은 쉬지 않고 생명체를 살려간다. 밥 먹을 때가 되면 밥을 먹도록 유도한다. 하늘이 유도하는 것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다. 말은 귀로 듣지만 하늘이 유도하는 것은 느낌으로 듣는다. 배고픔을 느낄 때는밥을 먹어라는 하늘의 명령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하늘의 명령이란 말이 이해되지 않는다면 유전자의 지시로 이해하면 된다. 피곤함을 느낄 때는쉬어라는 하늘의 명령으로 이해하면 된다. 졸릴 때는자라고 하는 하늘의 명령으로 이해하면 된다. 무너지려는 집에서 나가고 싶은 느낌이 드는 것은거기 있지 말고 밖으로 나가라는 하늘의 지시임을 알고 나가면 된다. 어떤 물건을 만들어야 할 때는 어떻게 하면 만들 수 있는지 느낌이 온다. 느낌에 충실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쉽고 간단하다. 배고플 때 밥 먹고, 피곤할 때 쉬며, 졸릴 때 자고, 나가고 싶을 때 나간다. 느낌에 따라 낡은 것을 버리고 느낌에 따라 새로운 것을 만들면 된다. 느낌에 따라 노래하고, 느낌에 따라 춤을 추며, 느낌에 따라 작품을 만들면 된다. 어려운 것이 없다. 모든 것은 느낌에 따라 하기만 하면 저절로 된다. 공자는 이런 상태를 성실함으로 정의하고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성실함 그 자체는 하늘의 작용이니, 성실함 그 자체로 사는 사람은 힘쓰지 않아도 알맞게 되고, 생각해서 하지 않아도 잘되며, 모든 것이 저절로 들어맞는다. 그런 사람을 성인(聖人)이라 한다.”-<중용>

 

그런데 사람이 욕심을 가지면서 느낌을 상실했다. 도박을 할 때는 밥 먹어야 할 때가 돼도 배고픔을 못 느낀다. 도박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도 하늘은밥을 먹어라고 지시하지만 돈을 따고 싶은 욕심이 가로막으면 그 지시를 받아들일 느낌이 차단된다. 욕심에 가로막혀 느낌을 잃어버린 뒤에는 복잡하고 어려운 일들이 일시에 쏟아져 나온다. 언제 밥을 먹어야 하고, 언제 쉬어야 하며, 언제 자야 하는지, 낡은 집에서는 언제 어떻게 피해야 하고, 새로운 상품은 어떻게 개발해야 하는지, 노래는 어떻게 불러야 하고, 춤은 어떻게 춰야 하며, 작품은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도무지 알기가 어렵다. 그런 것을 알기가 어렵고, 행동하기가 복잡하다. 사람들의 삶이 복잡하고 어렵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면 사람에게 욕심이 왜 생기며 어떻게 생길까?

 

사람의 마음은 본래 하늘에서 주어진 마음뿐이었다. 그 마음이 몸에 들어와 있는 것이 정이다. 사람의 정은 하늘에서 흘러들어온 것이기 때문에 모두 같다. 배고플 때는 먹고 싶어 하고, 피곤할 때는 쉬고 싶어 하며, 위험한 것을 피하고 싶어 한다. 다만 각각의 몸이 처한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그 상황에 맞게 작용할 뿐이다. 예를 들면 갑이라는 사람은 더위를 타는 체질이라면 옷을 얇게 입고 싶어 하지만, 을이라는 사람은 추위를 타는 체질이라면 옷을 두껍게 입고 싶어 한다. 이처럼 정이 다르게 표현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살고 싶어 하는 마음에서 보면 같은 것이다. 모두 같은 정이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사람에게는 몸이 있고, 몸에는 보고 듣고 냄새 맡는 등의 기능을 가진 감각기관이 붙어 있다. 감각기관은 감각을 한다. 감각하는 것은 감각대상을 구별하는 것이다. 구별하는 기능이 업그레이드되면 분별하고, 헤아리고, 생각하고, 계산하는 기능으로 발전한다. 사람이 분별하고, 헤아리고, 생각하고, 계산하는 기능을 하면, 그런 기능을 할 수 있는 장소로서 의식이라는 것이 생긴다. 이는 사람이 사무를 보면 그 주위가 사무실로 바뀌는 것과 같은 이치다. 분별하고, 헤아리고, 생각하고, 계산하는 기능을 사람들은 재주라고 하기도 하고, 영어로 IQ라고도 한다.

 

인간의 의식은 분별하고, 헤아리고, 생각하고, 계산하는 일을 하는 장소가 될 뿐만 아니라 인간이 살면서 경험한 것을 기억하는 저장창고 구실을 하기도 한다. 인간은 살면서 감각한 내용들, 분별하고 헤아리고 생각하고 계산한 내용들, 배우고 익힌 것 등등을 기억이라는 형태로 의식세계에 차곡차곡 저장을 한다. 그 저장된 기억들이 의식 속에서 차츰 쌓여서 덩어리가 되면 그것이란 개념으로 둔갑을 한다. 말하자면란 의식 속에 저장된 기억의 덩어리이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들은내가 누구입니까” “혹시 나를 아세요하고 물으면서 돌아다니는 경우가 있다. 이는 자기의 기억을 잃어버린 것을 자기를 잃어버린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기억 덩어리인 나가 생기면 문제가 달라진다. 사람의 기억은 사람마다 다 다르기 때문에기억 덩어리인 나남과 구별되는 나이다. ‘남과 구별되는 나는 남과 구별되기 때문에 나 중심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내 것 챙기기에 열중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사람의 의식에란 것이 생기고 그 의식에서 분별하고, 헤아리고, 생각하고, 계산하는 등의 기능이 작용하면 사람의 마음은 복잡해진다. 밤이 깊어지면 하늘이자라고 명령하고, 그 명령은 졸리는 느낌으로 전달된다. 사람은 졸릴 때 자면 된다. 그러나 그때 도박을 하다가 돈을 잃었을 경우 본전을 찾아야 한다는 계산이 들어가면 자고 싶은 정을 자기 싫은 정으로 변질시킨다. 자고 싶은 정이 먼저 나온 정이고, 자기 싫은 정으로 변질된 것은 두 번째 나온 정이다. 두 번째를 표현하는 한자가 아()이기 때문에 두 번째로 나온 정을 아()에 심()을 더하여 악()이라 한다. 악이 생기면 사람의 마음은 복잡해진다. 사람의 마음은 하늘에서 내려온 본래의 마음과 본래의 마음에서 흘러들어온 정, 의식세계와 의식세계에서의 분별하고, 헤아리고, 생각하고, 계산하는 등의 기능과 그 기능들에 의해 악으로 변질된 정을 모두 포함한다. 이 중에서 사람에 따라 각각 다른 것은 의식세계와 의식세계에서의 분별하고, 헤아리고, 생각하고, 계산하는 등의 기능과 그 기능들에 의해 악으로 변질된 정이다.

 

악은 하늘의 뜻을 어기는 것이다. 배고플 때 먹지 않는 것이 악이고, 피곤할 때 쉬지 않는 것이 악이며, 졸릴 때 자지 않는 것이 악이다. 악은 내 것 챙기는 것에서 비롯된 욕심이다. 욕심이 자꾸 커져서 본래의 마음을 밀어내고 주인행세를 하게 되면 삶이 복잡해진다. 욕심으로 사는 사람은 내 것 챙기는 데 열중하기 때문에 늘 남과 충돌하고 그 때문에 사회가 혼란해진다. 사회가 혼란해지면 사람들이 살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지만 그것은 쉽지 않다. 사람이 욕심을 채우기 위해 남과 경쟁하면 그 경쟁은 치열해진다. 수많은 사람이 경쟁하지만 그 경쟁에서 이기는 사람은 극소수이므로 경쟁에서 살아남기란 참으로 어렵고 복잡하다. 또 욕심은 채울수록 커지기 때문에 욕심을 채우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없다. 그것은 영원히 불가능한 일이다. 사람의 삶이 어렵고 복잡한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다.

 

욕심은 본래부터 있었던 마음이 아니다. 그러므로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사는 것은 참된 삶이 아니기 때문에 헛것이다.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사는 것은 헛것이면서 고통스럽다. 그러면서도 복잡하고 어렵다. 이런 사람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욕심을 버리고 본래의 마음을 도로 찾는 것뿐이다. 맹자는 그것을 학문이라 했다. 맹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사람들이 집에 있던 닭이나 개가 없어지면 찾으러 다닐 줄을 알지만 마음을 놓아버리고는 찾지 않으니 불쌍하다. 학문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놓아버린 마음을 구하는 것일 뿐이다.”-<맹자>

 

한국 사람은 예로부터 하늘을 중시했고 본심을 중시했다. 사람이 원래부터 가지고 있는 본래의 마음이 한마음이다. 한마음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으로 들어 있는 하늘마음이다. 하늘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하늘이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고 하는 한국의 인내천(人乃天) 사상이 바로 그것이다. 하늘마음이 모든 것의 뿌리이므로 한국인은 뿌리 찾는 것을 좋아한다. 지금도 족보를 만드는 유일한 사람들이다.

 

한국 사상을 표현하는 말 중의 하나가 간이박략(簡易樸略)이다. 목은 이색 선생이 간이박략이란 말을 쓴 뒤에 많은 한국의 학자들이 이어서 이 말을 쓰고 있다. 간이박략이란 간단하고 쉬우며 순박하고 간략하다는 뜻이다. 뿌리를 찾아 뿌리로 살아가기만 하면 어려울 것이 없다. 간이박략 하게 살아가는 것은 하늘마음으로 사는 것이고, 하늘처럼 사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우리의 본래 모습이었다. 그러던 것이 그런 모습을 잃어버리고 지금 욕심을 채우기 위해 고통스럽게 살아간다면 참을 수 없어 한이 맺힌다. 한국인의 한()은 이런 연유에서 생겨난다. 한을 가장 빨리 풀기 위해서는 술을 마시면 된다. 술을 마셔서 현재의 나를 의식하는 의식을 지우면 된다. 그래서 한풀이로 마시는 술은 폭탄주다. 필름이 끊어지도록 폭탄주를 들이키지만 깨고 나면 소용이 없다. 그래서 이 한풀이 방식이 예술로 나타나기도 한다. 한국의 판소리는 한이 맺힌 소리로 울부짖는다. 본래 나는 하늘이었다. 하늘은 영원하게 존재한다. 그렇지만 지금의 나는 영원하지 못하고 잠시 살다 가야 한다. 한이 맺힌다. 그래서 한오백년을 노래하며 한을 뱉어낸다. 나는 모두와 하나이므로 남과 이별하는 것은 나의 모습이 아니다. 그러한 나를 직시할 때 한이 맺힌다. 그래서 이별가를 외치며 한을 뿜어낸다. 춤을 출 때도 한을 풀어내듯 몸부림을 치는 춤사위를 연출한다. 꽹과리를 요란하게 두드리며 한을 풀어내기도 한다. 한은 자신이 하늘임을 확인할 때 풀린다. 하늘임을 확인하는 과정은 수도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한을 풀기 위해 한국인은 수도자의 모습이 된다. 그 수도자의 마음에서 나오는 수도자의 예술이 한국 예술의 한 장르로 자리 잡는다.

 

하늘임을 확인하는 것은 존재의 본질이 하나임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잎이 가지를 찾아가는 과정이고, 줄기를 찾아가는 과정이며, 뿌리를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러한 것이 예술로 승화되면 하나를 추구하고 하나로 표현하는 것이 등장한다. 고려자기는 푸른색 하나로 모든 것을 표현하고, 조선의 백자는 흰색 하나로 모든 것을 표현하며, 수묵화는 검은색 하나로 모든 것을 표현한다. 승무라는 춤은 수도자의 마음을 춤사위로 표현하는 대표적인 장르다. 하나를 추구하는 것은 근원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근원으로 접근하는 것은 뿌리에 다가가는 것이고, 한마음이 되어가는 것이며, 하늘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남과 나의 구별이 없어진다. 그러한 느낌을 표현하는 예술이 또한 한국 예술의 한 장르로 등장한다. 이른바 근원회귀의 단계에서 나타나는 예술이다.

 

근원으로 회귀할수록 구별이 희미해진다. 욕심이 많은 사람은 남을 이기기 위해 온갖 것을 구별하지만 욕심이 없어지고 한마음이 다가오면 남과 나의 구별을 별로 하지 않는다. 그러한 사람은 일견 멍청해 보이기도 하고 송아지의 해맑은 눈동자처럼 맑아 보이기도 한다. 박수근의 그림은 구별이 뚜렷하지 않다. 희미하여 사람과 사람이 잘 구별되지 않는다. 이는 물감이 모자라서 그렇게 그린 것이 아니다. 근원으로 회귀하는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경주 남산에 산재해 있는 돌부처들의 표정은 일견 보면 세상 물정을 모르는 천치 같기도 하다.

 

세상 물정을 잘 알아서 똘똘해 보이는 사람에게는 다가가기 어렵다. 나에 대해 온갖 계산을 다하고 있을 것 같아 부담스럽다. 그러나 나에 대해 아무런 계산을 하지 않을 것 같은 어린이들에게는 다가가고 싶어진다. 그들은 나에 대해 아무런 계산을 하지 않고 받아줄 것 같기 때문이다. 남산의 돌부처도 그런 얼굴들이다. 아무리 가까이 가도 아무런 부담이 없다. 그런 얼굴을 조각한 석공이 기술이 모자라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정신적 수준이 고도로 승화된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조각할 수 있다.

 

자녀들은 부모를 그리워하지만 부모들은 자녀를 그리워한다. 사람들은 하늘을 그리워하지만 하늘은 사람을 그리워한다. 잎들은 뿌리에 관심이 많아 뿌리로 향하지만 뿌리가 되면 다시 잎에 관심이 많아 잎을 향한다. 이른바 회광반조(回光返照)인 것이다.

 

회광반조란 일몰 전에 햇빛이 반사하는 것, 촛불이나 등불이 꺼지려고 할 때 잠깐 밝아지는 것, 사람이 죽기 직전에 병이 잠시 호전되는 것, 도가의 수행법 등을 말하지만 여기서는 수양을 통해 존재의 본질을 향하던 마음이 존재의 본질에 도달한 뒤에는 본질의 차원에서 도리어 현재의 모습을 비춘다는 뜻으로 쓰고자 한다. 빛을 돌려 반대 방향으로 비춘다는 글자 그대로의 뜻으로 볼 때 가장 절절하기 때문이다.

 

뿌리에서 잎을 보면 잎은 다양하다. 그래서 뿌리는 다양한 잎을 표현하고 싶어 한다. 마찬가지로 한마음을 회복해 한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삶의 현장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모습들을 표현하고 싶어진다. 그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면 그는 다양한 색상을 표현한다. 뿌리를 모르고 잎만을 쳐다보는 사람에게는 잎은 잎일 뿐이다. 꽃이 피고 지는 것 역시 꽃이 피고 지는 것일 뿐이다. 그것은 얄팍하다. 그렇기 때문에 뿌리를 모르고 잎만을 표현하는 사람은 그 색상도 얄팍하게 표현한다. 그러나 뿌리를 알고 잎을 보는 사람은 그 잎이 뿌리의 한 표현임을 안다. 그러므로 잎의 움직임은 깊고 심오하며 그 색상도 깊고 심오하다. 그러므로 회광반조의 차원에서 표현되는 예술은 곱고 다양하면서도 깊고 그윽하다. 한국의 전통 예술가의 예술품에 나타나는 특징은 심오하고 그윽하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색상도 단순하게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심오하게 표현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예술가들은 색을 칠하고 또 칠하는, 이른바 덧칠하는 방식으로 그런 분위기를 연출했다. 고구려 고분벽화가 그렇고, 색동저고리의 색상이 그렇다.

 

뿌리를 알고 뿌리의 뜻으로 움직이는 잎은 그 움직임이 뿌리의 움직임이다. 하늘마음을 완전히 회복한 사람의 움직임도 이와 같다. 하늘마음으로 움직이는 사람은 그 움직임이 하늘이다. 그가 하는 일은 하늘이 하는 일이고, 그가 만든 작품은 하늘이 만든 작품이다. 경주 불국사에 있는 석가탑이 그렇고, 다보탑이 그렇다. 토함산 석굴에 있는 석굴암 본존불상도 그러하다. 그렇지만 작가는 그런 작품을 어렵고 복잡하게 만들지 않았다. 그저 느낌에 따라서 만들었을 뿐이다. 그 방법은 쉽고 간단했다.

 

 

 

이기동 성균관대 대학원장 kdyi0208@naver.com

이기동 성균관대 대학원장(유학동양학부 교수)은 일본 쓰쿠바대에서 동양철학 박사 학위를 받고 대만 국립정치대와 하버드대 옌칭연구소에서 수학했다. 20여 년에 걸친 작업 끝에 2007년 사서삼경을 최초로 완역하는 등 유학(儒學)의 세계적 권위자로 인정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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