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 규모의 식품회사를 경영하는 P사장은 일주일 사이에 희비가 교차하는 일을 겪었다. 이 회사는 야심 차게 준비하고 있던 신제품 개발과 관련해 해외 원료구매 파트의 책임자 채용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이 자리에 꼭 맞는 후보자 K씨가 지원을 했다. K씨는 대기업에서 구매 업무를 꽤 오랫동안 했고, 해외 유학파인데다 무엇보다 회사가 필요로 하는 원료를 직접 다루어본 경험이 있었다. K씨는 누가 봐도 두말 할 것 없는 적임자였다. 회사는 합격통보를 하고 바로 연봉협상에 들어갔다.
그런데 P사장으로서는 딱 한 가지 미심쩍은 점이 있었다. ‘이렇게 경력이 화려한 K씨가 왜 하필 우리 회사에 지원을 했을까?’하는 것이었다. 사실 K씨의 경력으로 봤을 때 이 자리는 크게 도움이 될 요소가 없어 보였다. 직급은 한 단계 올라갔지만 이전보다 연봉이나 복리후생 혜택도 훨씬 적고 업무의 범위나 권한도 오히려 줄어드는 자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K씨는 그런 부분에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다.
P사장은 최종 결정을 앞두고 필자에게 K씨를 채용해도 괜찮을지 조언을 구했고, 필자는 P사장에게 K씨에 대해 평판 조회를 해볼 것을 권했다. 그리고 얼마 후, P사장은 K씨에 대한 채용 진행을 중단했다. K씨는 이전 직장에서 구매 책임자로 있으면서 공금횡령 사건에 연루돼 불미스럽게 퇴사를 했다. 게다가 그 일의 책임을 다른 직원에게 전가하려고 해서 직원들과 갈등이 생겼고, 그 때문에 담당 임원까지 퇴사하는 사건이 있었다고 했다.
채용 과정에서 이처럼 평판 조회로 인해 결과가 뒤집어지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다. 최근 한 조사에 따르면, 경력자 채용 시 평판 조회를 진행하는 기업이 45%에 이른다고 한다. 이 중 66%는 특별히 평판 조회를 많이 하는 직무가 있다고 했다. 실제로 재무회계, 영업·판매, 경영기획 등 기업의 자금이나 매출, 주요 정보 등을 다루는 직무에서는 지원자의 경력이나 능력뿐 아니라 실제 함께 근무했던 사람들의 평가가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평판 관리는 경력 관리의 일부
기업의 채용과정에 평판이 이처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은 직장인의 경력 관리에도 평판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성공적인 경력 관리에는 반드시 평판 관리가 포함돼야 한다.
박사과정 진학을 앞두고 커리어 코칭을 받았던 S씨는 학력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있었다. 지방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 공채로 입사했지만, 자신의 학벌이 동료들에 비해 뒤처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때문에 그는 누구보다 자기계발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자신의 학벌을 높여줄 수 있는 야간 대학원에 진학해 주경야독 끝에 석사 학위도 받았다. 그는 끊임없이 동료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업무나 자신의 경력에 굳이 필요하지 않은 박사과정을 염두에 둔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S씨의 일과 직장생활에 대한 만족감은 결코 높은 수준이 아니었다. S씨는 회사 내에서 자신의 실력과 열정을 인정받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오히려 동료들과의 관계는 점점 더 소원해졌다. 성과 측면에서도 몇 년째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다.
코칭 과정을 통해 S씨는 자신의 경력상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를 살펴봤다. S씨에게 부족한 것은 이미 만들어진 ‘스펙’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였다. 부족한 학벌을 채우기 위해 대학원을 다니고 박사과정에 도전하겠다는 S씨의 계획은 이미 경력 연차가 10년을 넘어선 그에게 크게 도움이 되는 선택이 아니었다. 그렇게 열심히 자기계발을 하는데도 중간 정도의 성과에 머무르는 이유도 중간 관리자로서 필요한 ‘관계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경력 관리’를 ‘스펙 관리’로 오인하곤 한다. 때문에 자격증을 딴다거나 무언가를 배우는 등 자기계발에 포커스를 맞추는 경우가 많다. 나아가 소위 ‘학력 물타기’ 용 편입이나 대학원 진학을 시도하기도 한다. 물론 경력의 초기 단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스펙 관리’도 분명 의미있는 활동이다. 그러나 직급이 올라갈수록, 경력이 쌓일수록 ‘스펙’의 위력은 점차 흐려지게 마련이다.
직급이 올라갈수록 ‘스펙 관리’보다 ‘성과 관리’가 중요해지고, 나아가 ‘사람 관리(관계 관리)’가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 결국 이 세 가지가 합쳐지면 자기 관리가 되고, 자신의 커리어 경로(Career Path)와 결합된 자기 관리가 곧 경력 관리가 된다.
경력사원 채용 시 평판 조회를 한다고 해서 평판 관리가 회사를 옮길 때에만 적용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일반적으로 평판은 장기간에 걸쳐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쁜 평판은 하루 아침에 만들어질 수도 있다. 특히 도덕성에 관한 안 좋은 평판은 커리어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며 한 번 만들어진 나쁜 평판은 쉽게 되돌리기 어렵다. 때문에 어떤 면에서 평판을 ‘관리’한다는 것은 모순적인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다. 평판 자체에 신경을 쓰는 일을 평판 관리로 해석하는 것은 매우 좁은 시각이다. 평판 관리는 성과와 관계에 관한 포괄적인 개념으로 접근해야 한다.
무엇을 관리해야 하나?
대개 기업에서 평판 조회를 한다고 하면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접근한다고 볼 수 있다.
첫째, 후보자의 입사서류 등에 기재된 사항의 사실 관계를 확인하는 일이다. 이는 학력이나 경력 사항에 거짓이 없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때로는 신용 상태에 대한 조회를 하기도 한다. 몇 년 전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신정아 사건처럼 학력이나 경력을 위조하는 일이 발생하면 기업의 이미지에도 손상이 간다. 실제로 대학 중퇴를 졸업으로 기재한다거나 근무기간을 조금씩 늘려 쓴다거나 혹은 일부러 누락시켜 입사가 거절되는 지원자들을 간혹 볼 수 있다. 처음부터 솔직하게 기재했다면 문제가 되지 않을 내용도 나중에 조회를 통해 밝혀지면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둘째, 실제로 함께 일했던 사람들의 평가를 확인하는 일이다. 이는 성과, 이직 사유, 도덕성, 대인관계, 업무 태도 등에 대해 주변 인물들의 평을 듣는 일로, 사실 관계 확인보다 훨씬 복잡한 과정이다. 때로는 단순히 같이 일했던 사람들이 후보자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를 살펴보는 게 될 수도 있다. 반면 구체적인 역량에 관한 검증을 목적으로 할 수도 있다. 또 직업 생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개인사에 관한 내용이 포함될 수도 있다.
앞서 언급한 K씨처럼 공금횡령과 같은 재직 중 특별한 사건사고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자기도 모르게 만들어진 나쁜 평판이 커리어에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는 거의 전적으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A씨는 매우 열정적인 임원이었다. 일에 대한 의욕과 목표가 매우 높아서 회사 내에서 그의 부서는 가장 늦게까지 불이 꺼지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부서 목표 달성을 앞세우다 보니 다른 부서와의 갈등과 마찰도 심했다. 직원들은 힘들어했지만 A씨는 언제나 목표보다 높은 실적을 냈고 자부심 또한 대단했다. 최근 회사의 최고경영진이 갑자기 바뀌었는데, 이 과정에서 몇몇 임원들에 대한 보직해임이 단행됐다. 그런데 A씨도 리스트에 포함됐다. 앞만 보고 달려온 A씨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일,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지만 돌이킬 수는 없었다.
문제는 사내 평판이었다. 실적이 좋은 건 인정하지만, 누구도 A씨와 함께 일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A씨가 맡은 부서에서는 유난히 퇴사자가 많이 발생했다. 동료 임원들 사이에서도 A씨는 싸움닭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새로운 경영진은 당장의 실적보다 자신들의 연착륙을 희망했기에 A씨를 중임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