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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디자인과 경영

창조적 비움을 디자인하는 무인양품

김경묵,조성환 | 258호 (2018년 10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무인양품의 ‘무인(無印)’은 ‘특징(브랜드)이 없다’는 뜻으로 특정한 정체성이 없다는 의미다. 특징 없는 상품이 어떻게 좋은 상품(양품)이 될 수 있을까? 그 답은 노장사상에서 비롯된 없음의 철학과 비움의 효용에서 찾을 수 있다. 특징이 없기 때문에 특징 있는 것과 어우러질 수 있고 비어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다. 하라 켄야는 이런 없음의 철학을 텅 빈 그릇으로 시각화하고, 절제와 생략으로 디자인했다. 무인양품은 단순한 미니멀리즘이 아니라 없음의 철학을 비움의 디자인으로 구현한 문화디자인이자, 인문디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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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용품을 판매하는 일본 기업 무인양품1 의 가장 큰 특징은 브랜드명에 기업의 철학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무인양품(無印良品)은 의미상으로 ‘무인’과 ‘양품’으로 나뉘는데 무인에 이 기업의 철학이 담겨 있다. 양품은 무인의 철학을 구현한 좋은(良) 상품(品)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무인양품의 상품에는 무인이라는 사상(sign)이 부여돼(de) 있는 셈이다. 이 사상이 무인양품의 모든 상품에 스며들어 있다. 그래서 무인양품의 디자인 철학자인 하라 켄야 2 는 “무인양품은 단순한 제품이 아니라 하나의 사상” 3 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무인이란 무엇인가?

무인양품, 특징이 없는 상품
무인(無印)의 인(印)은 인상적(印象的)이라고 할 때의 인으로, 명사로는 도장을 의미하고 동사로는 찍는다는 뜻이다. 우리 인상에 찍히는 것이 인(印)이다. 우리 인상에 찍히는 것은 대개 그것의 특징이다. 그래서 인은 특징을 의미하기도 한다. 결국 무인이란 ‘두드러진 인상이나 이렇다 할 특징(印)이 없다(無)’는 뜻이다. 기업의 인상이나 특징을 브랜드라고 한다. 그래서 무인은 브랜드가 없다는 의미도 된다. 영어로 무인을 No Brand라고 번역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그래서 무인양품은 ‘특징 없는 좋은 상품’이라는 뜻이고, 영어로는 ‘No Brand Quality Goods’로 표기한다.

무인양품을 영어로 MUJI라고 쓴다. 無는 일본어로 ‘무(Mu)’라고 읽는다. 우리말과 발음이 같다. 印은 ‘시루시(Sirushi)’라고 읽는데 無(무)와 印(시루시)이 합쳐져서 無印이 되면 연음이 돼 발음이 변한다. ‘무시루시’가 아니라 ‘무지루시’로 된다. 이 중에서 ‘무지’만 따서 영어로 표현한 것이 MUJI이다. 그래서 MUJI는 특징이 없다는 뜻인 ‘무인’의 약자에 해당하는 셈이다. 양품에 해당하는 영어 표기는 없다. 철학을 보여주는 무인을 강조한 브랜드명이다.

비움의 디자인
무인의 철학은 무인양품의 정체성을 나타낸다. 그것은 특징이 없다는 정체성이다. 그런데 이런 정체성은 대단히 추상적이다. 딱히 손에 잡히는 내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눈으로 볼 수 있는 시각화가 필요하다. 무인양품의 아트디렉터 하라 켄야는 그것을 ‘비움’으로 형상화했다. 4

지극히 합리적인 생산 공정에서 태어난 무인양품의 상품은 매우 간결하지만 이것은 스타일에 있어서 미니멀리즘은 아닙니다. 다르게 말하자면 ‘텅 빈 그릇’과 같은 것입니다. 단순하면서도 여백이 있기에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는 유연함이 그 속에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자원 절약, 저렴한 가격, 심플, 익명성, 자연 지향 등의 다양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만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으며 이 모든 것을 마주하는 무인양품이 되고자 합니다. 5

이 글의 제목은 ‘What is Muji?’다. 즉, 무인양품의 정체성을 말하고 있는 글이다. 그 정체성을 하라 켄야는 텅 빈 그릇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무인이라는 없음의 철학을 ‘비움(emptiness)’으로 시각화한 것이다. 그리고 그 효용을 다양한 생각을 수용하는 유연성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MUJI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없음과 비움 사이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가 있을까? 특징이 없는 것과 텅 빈 것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그리고 무인양품은 왜 이런 철학과 디자인을 기업의 정체성으로 삼은 것일까? 여기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없음과 비움에 담긴 철학적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만큼 무인양품은 철학적인 기업이기 때문이다.

허무(虛無)의 효용
철학사에서 비움과 없음을 주제로 삼은 철학자는 노자와 장자다. 비움은 한자로 허(虛)라고 하고, 없음은 무(無)라고 한다. 허와 무는 공자나 맹자 같은 유학자에게는 주목받지 못했지만 노자와 장자에게는 철학의 근본 개념이었다. 그것은 무시돼야 할 부정적 대상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긍정적 가치였다. 가령 노자는 허와 무의 효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방을 쓸 수 있는 것은 방이 비어 있기(虛) 때문이다. 이처럼 ‘있음(有)’이 이로울(利) 수 있는 것은 ‘없음(無)’이 쓰임(用)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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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방을 쓴다고 할 때 실제로 사용하는 것은 방의 외적인 형태(有)가 아니라 그 안에 들어있는 텅 빈(虛) 공간이다. 따라서 방의 본질은 방의 외형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인해 확보되는 내부 공간에 있다. 이 공간은 비어 있다는 점에서는 허(虛)이지만 형태나 내용물이 없다는 점에서는 무(無)다. 노자는 이 허와 무야말로 방을 방이게 하는 근원적 요소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는 그릇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찰흙을 반죽해 그릇을 만드는데 그 ‘무’에 그릇의 쓰임이 있다. - 『도덕경』 제11장

그릇은 내용물을 담는 유형의 도구를 말한다. 그런 점에서 유다. 그런데 뭔가를 담으려면 그 안이 비어 있어야 한다. 즉 ‘허=무’의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마치 방이 그러하듯이 자신을 비움으로써 뭔가를 채울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노자가 본 세상의 모습이다. 세상은 비움과 채움, 있음과 없음같이 상반되는 현상들의 어우러짐으로 이뤄져 있다. 음과 양이나 하늘과 땅도 이러한 상반적 조화의 관계를 나타내는 개념이다.

앞에서 살펴본 ‘What is Muji?’에서 “무인양품의 상품은… 다르게 말하자면 텅 빈 그릇과 같은 것입니다. 단순하면서도 여백이 있기에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는 유연함이 그 속에서 태어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 데는 이러한 철학적 원리가 숨어 있다. 즉, 비어 있음의 포용성과 유연성, 보편성이다. 이 점을 강조한 철학자는 노자를 이은 장자다.

가능성과 창조성
장자는 노자의 허무 철학을 역동적인 인간의 삶 속에 적용했다. 없음과 비움을 경영자의 최고 덕목으로 본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지인(至人)은 자기가 없고(無己) 마음이 비어 있어서(虛心) 변화에 대처할 수 있다(應物) 7 ”고 했다.

여기에서 지인(至人)이란 ‘최고의 경지에 있는 사람’으로, 기업으로 말하면 최고경영자에 해당한다. 무기(無己)는 ‘특정한 정체성이 없다’는 뜻으로 무인양품으로 말하면 무인에 해당한다. 허심은 그런 지인의 마음 상태는 거울처럼 텅 비어 있다는 뜻으로 무인양품의 비움에 해당한다.

거울은 대상이 오기 전에는 비어 있다가 대상이 오면 있는 그대로 비추고 대상이 지나가면 원래 상태로 되돌아온다. 따라서 거울의 정체성은 대상에 반응하는 작용 그 자체에 있지, 어떤 구체적인 내용(특징)에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텅 빈 거울은 열린 태도와 무한한 가능성을 상징한다. 거울은 외부로부터의 자극을 배제하지 않고 수용하려는 개방적인 태도를 취한다. 동시에 거기에는 텅 빈 그릇처럼 다양한 대상을 수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잠재돼 있다. 하라 켄야가 비움을 가능성과 창조성으로 설명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8

물러서는 자기
무인양품의 무인은 바로 이러한 아이덴티티를 말하고 있다. 그것은 구체적인 내용이나 특징을 갖고 있는 채워진 아이덴티티가 아니라 하나의 가능성과 창조성으로서의 비어 있는 아이덴티티다. 그래서 무인(無印)은 장자가 말하는 무기(無己)와 상통한다. 무인이 특징 없는 특징을 의미하듯이 무기는 자기 없는 자기를 나타낸다. 그것은 자기다움이 없는 자기이다. 자기다움이란 특정한 내용과 개성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자기다움이 없는 자기는 일견 소극적이고 진부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특징적인 자기다움이 없기 때문에 다른 모든 자기다움과 어우러질 수 있다. 장자식으로 말하면 모든 사태에(物) 적응할(應) 수 있다. 마치 무색의 바탕은 모든 색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래서 다양성을 포용할 수 있고, 어디에나 통용될 수 있으며, 영속성을 지닌다. 없음의 아이덴티티는 가능성과 창조성뿐만 아니라 통용성과 영속성도 지니고 있다. 9

무인양품의 비전이 ‘이것이 좋다(これがいい)’가 아니라 ‘이것으로 좋다(これでいい)’를 추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것이’에는 강한 자기주장이 들어 있다. 주어를 나타내는 ‘이’에는 근대적인 개인 관념이 반영돼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개인의 개성과 의지, 때로는 집착까지 담겨 있다. 그래서 ‘이’라는 말에는 뚜렷한 자기 정체성이 표현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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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이것으로 좋다’는 이것이면 됐다, 이것으로 충분하다는 뜻으로 여기에는 세계 전체를 위한 절제나 양보의 의미가 담겨 있다. 하라 켄야는 이것을 “한발 물러선 이성”, 또는 세계의 균형을 만들어 가는 “탄력적 이성”이라고 했다. 세계 전체의 미래를 생각해 인간의 욕망을 억제하는 이성인 것이다. ‘나아가는 자기’ ‘두드러진 자기’가 아니라 ‘물러서는 자기’ ‘숨어 있는 자기’인 셈이다. 그러나 이 물러섬과 감춰짐이 지속적인 나아감과 드러남을 보장한다. 10

무인양품의 디자인이 ‘No Design’을 표방하는 것은 이러한 아이덴티티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No Design은 디자인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고도의 디자인을 한다는 의미다. 그것은 절제와 생략의 디자인이다. 그러나 단순한 절제나 생략이 아니라 미래지향적인 절제이자 창조적인 생략이다. 그래서 No Design은 궁극적인 디자인이다. 이것이 무지이즘(Mujiism)과 미니멀리즘(minimalism)의 차이다.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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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양품이 그리는 세계
무인양품의 모든 상품에는 이러한 없음의 정체성과 비움의 디자인이 스며들어 있다. 그래서 7000종이나 되는 상품들이 제각각 따로 존재하지 않고 조화롭게 어우러져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 말하자면 무지월드(MUJI WORLD)인 셈이다.

무지월드에는 무인양품만의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 그래서 무인양품 매장에 들어가면 마치 다른 세계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준다. 어떤 이는 고고학박물관에 들어온 것 같다고 했다. 이것은 아마도 무인양품의 상품 하나하나가 자기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은은하게 속삭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태고시대의 유물들처럼 말이다. 그래서 무인양품이 자아내는 세계는 ‘소리치는 세계’가 아니라 ‘속삭이는 세계’다. 12

무인양품이 그리는 세계는 우리에게 하나의 라이프 스타일을 제안한다. 그것은 흔히 미니멀 라이프(Minimal Life)라고 일컬어진다. 13 소박함과 담백함을 추구하는 절제된 생활양식이다. 그러나 하라 켄야의 디자인 철학을 따르자면 미니멀 라이프보다는 엠티 라이프(Empty Life)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겠다. 검소와 절약을 넘어선 창조와 지속의 생활양식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문화를 파는 기업
무인양품은 흔히 제품을 파는 기업이 아니라 철학과 문화를 파는 기업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무인양품이 단순한 산업디자인을 넘어서 인문디자인의 차원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하라 켄야는 이것을 문화디자인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의 머릿속에는 인문디자인 개념이 이미 잠재돼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문화디자인을 언급하는 대목을 들어보자.

전후(戰後) 괴멸적인 타격에서 재기하여 국력의 부흥에 총력을 기울이려고 하고 있던 일본의 목표는 경제의 흥성이지 생활 의식의 성숙은 아니었다. 맛의 좋고 나쁨이 아니라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것. ‘문화가 아니라 우선 산업’이라는 일본의 가치척도는 20세기 후반에 모든 것에 걸쳐 은연중에 힘을 발휘하고 있고, 오늘날에도 지속저음(Basso Continuo)처럼 사회의 기층에 낮게 울려 퍼지고 있다.

… 전후(戰後) 일본의 산업이 세계의 제품공장으로 변한 것이 산업디자인과 문화디자인을 분단시키고 말았다. 14

여기에서 하라 켄야는 20세기 일본 기업의 성공과 한계의 원인을 디자인의 관점에서 분석하고 있다. 성공 요인은 디자인과 산업의 만남이고, 한계 원인은 디자인의 산업에의 종속이다. 이것을 그는 “문화가 아니라 우선 산업” 또는 “산업디자인과 문화디자인의 분리”라고 말하고 있다. 반면에 문화디자인은 이 글에서 말하는 인문디자인과 다르지 않다. 인문디자인은 산업디자인과 문화디자인의 접점에 있는 디자인을 말한다. 무인양품은 산업디자인이 아닌 인문디자인을 지향하고 있다.

무인양품의 메시지
하라 켄야가 묘사하고 있는 전후(戰後) 일본의 모습은(“괴멸적인 타격에서 재기해 국력의 부흥에 총력을 기울이려 했다”) 한국전쟁의 폐허로부터 재기하고자 경제 개발에 전력을 기울였던 60∼70년대 한국의 모습과 흡사하다. 다만 한국은 20세기 말에 들어와서야 디자인을 산업에 접목하기 시작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한국의 산업 우위의 정도, 즉 문화나 디자인이 산업에 종속되는 현상은 일본보다 훨씬 심하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한국의 인문디자인이 일본의 그것에 훨씬 못 미치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 하라 켄야는 규격화와 대량 생산 중심의 산업디자인에서 디자이너의 개성이 억압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여기에서 디자이너의 개성이란 창의적 예술성을 말한다. 즉, 획일화된 산업이 개성 있는 디자인을 죽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창조적인 디자이너의 탄생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지적 역시 우리의 기업문화도 예외는 아니다. 아니, 한국 사회 전체가 아직도 가능성과 창조성보다는 효율성과 획일성을 중시하는 것이 사실이다.

아마도 무인양품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동안 한국 기업은 무인과 같은 인문적 측면은 소홀히 하고 양품을 만들어 이익을 남기는 데 치중해왔다. 효율과 성장 중심의 산업화를 추진해왔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무인양품은 무인이라는 철학과 문화를 디자인하는 과정에서 양품이 자연스레 나온 것이다. 철학과 문화 없이 과연 좋은 상품이 가능할까? 무인양품은 이에 대해 “아니다”라고 대답한다. 왜냐하면 철학과 문화가 담긴 기술이라야 지속 가능한 상품을 만들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필자소개
김경묵 인문디자인경영연구원 원장 formook@naver.com
김경묵은 사단법인 한국조직경영개발학회 인문디자인경영연구원 부회장 겸 원장, 인문학공장 대표, 국민대 겸임 교수다. 삼성전자 수석디자이너로 일했다.
조성환 인문디자인경영연구원 상임이사 hansowon70@nate.com
조성환은 사단법인 한국조직경영개발학회 인문디자인경영연구원 상임이사, 인문학공장 편집팀장이다. 와세다대와 서강대에서 수학했으며 철학 박사다.
  • 김경묵 김경묵 | -(현)성균관대 초빙교수, 사단법인 한국조직경영개발학회 인문디자인경영연구원 부회장 겸 원장, 인문학공장 대표, 디자인철학 자문위원
    -(전)삼성전자 수석디자이너
    formoo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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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성환 조성환 | -사단법인 한국조직경영개발학회 인문디자인경영연구원 상임이사, 인문학공장 편집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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