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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를 창출하려면 ‘올바른 방향’이 중요. 좋은 인재 들여오고, 규제 대못을 빼라

한근태 | 249호 (2018년 5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15세기부터 20세기까지 세계화의 역사는 폭발적으로 부가 증가하는 과정으로 가득하다. 당시 우수한 인력의 유입, 적극적 해외 진출과 금융업의 발전, 획기적인 기술 발견, 제도의 정비, 에너지 확보 같은 요인들이 산업 발전의 중요한 계기가 됐다. 경제사의 한 획을 그은 사건들을 되짚어봄으로써 미래의 국부를 창출하는 지혜를 얻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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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자소인(貧者小人)이란 말이 있다. 가난하면 소인이 된다는 말인데 가난하면 부자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는 의미로 해석하면 된다. 개인만 그런 게 아니라 국가도 그렇다. 대한민국같이 강대국 사이에 낀 나라일수록 더 그렇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눈치를 보는 역사였다. 힘을 기르지 않으면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부국강병을 통해 강대국이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그런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어떻게 해야 부를 키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강대국으로 거듭날 수 있을까? 책 『부의 역사』가 해법을 제시한다.

첫째
좋은 인력의 유입이다. 좋은 인력이 들어와야 한다. 좋은 인력이 들어오면 발전하고, 좋은 인력이 빠져나가면 쇠퇴한다. 기업도 그렇고 국가도 그렇다. 1492년 스페인에서 일어난 사건이 이를 말해준다. 1492년에는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외에도 중요한 두 가지 사건이 발생했다. ‘레콘키스타(Reconquista)의 완성’과 ‘유대인 추방령의 선포’다. 레콘키스타는 재정복을 뜻한다. 8세기에서 15세기에 걸쳐 이베리아반도를 점령한 이슬람왕국을 몰아낸 국토회복운동이다. 이슬람은 1492년 최후 거점 그라나다를 내주고 완전히 무릎을 꿇었다. 다음으로 유대인 추방령 알람브라칙령(Alhambra Decree)은 유대인뿐 아니라 이슬람 무어족 수십만 명을 에스파냐에서 강제로 쫓아냈다. 에스파냐에서 쫓겨난 유대인은 네덜란드의 독립, 영국의 발흥, 16∼19세기 삼각무역, 미국 성장 등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다.

당시 에스파냐에는 유대인 25만 명 정도가 살았다. 근데 왜 이런 칙령을 발표했을까? 겉으로 드러난 명분은 종교적 이유지만 사실은 경제적 이유 때문이다.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는 데 공을 세운 영주와 기사들에게 유대인 재산을 주기 위한 것이다. 결국 유대인은 빈털터리로 쫓겨난다. 오스만튀르크로 9만, 모로코로 2만, 알제리로 1만, 포르투갈로 6만 명의 유대인이 이동했다. 돈이 궁했던 포르투갈은 인당 1두카트씩 세금을 받고 이들을 받아들이지만 얼마 후 다시 쫓아낸다. 이들의 주류는 포르투갈을 거쳐 네덜란드에 자리를 잡아 16∼17세기 네덜란드의 황금기를 이끈다. 이 사건으로 에스파냐는 병들고, 네덜란드는 번영한다. 사람의 이동이 부의 이동으로 이어진 것이다.

사람의 이동에는 종교도 영향을 끼친다. 프랑스는 종교적 갈등이 특히 심했던 나라다. 종교혁명 이후 신교세력이 점점 커지자 1549년 앙리2세는 신교도 색출에 나선다. 하지만 효과가 없었고 오히려 색출 과정에서 갈등만 깊어졌다. 프랑스의 신교도는 위그노라 불렸는데 지도자 장 칼뱅이 프랑스 출신이어서 프랑스에 급속히 퍼졌다. 특히 정당한 방법에 따른 부의 축적을 옹호하는 교리가 위그노 귀족들에게 매력적이었다. 결정적 사건은 성 바르톨로메 축일이 있던 1572년 8월24일에 발생한다. 이날 위그노를 믿는 나바라 왕자와 가톨릭을 믿는 프랑스 공주의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모인 위그노 귀족 4000명이 척살되고 10월까지 7만 명이 죽임을 당한다. 배후는 앙리 2세의 미망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였다. 그녀는 메디치 출신으로 교황 클레멘스의 조카였다. 이 학살로 위그노 30만 명이 프랑스를 탈출해 네덜란드와 영국, 독일 지역으로 흩어졌다. 위그노의 탈출로 프랑스의 경쟁력이 약해진다. 산업은 무너지고, 국민들은 굶주렸다. 인구가 70%까지 줄어든 곳도 많았다.

만약 에스파냐가 유대인 추방령을 내리지 않았다면 지금의 스페인은 어떨까? 만약 프랑스가 종교적 관용을 베풀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종교적 관용을 베푼 네덜란드는 부자 나라가 된다. 사람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는 유대인뿐 아니라 청어잡이를 위한 독일 어부, 30년 전쟁을 피하려는 신교도, 가톨릭교도까지 다 받아들였다.

둘째
글로벌화와 금융업의 발전이다. 자국이 아닌 세계로 눈을 돌린 국가들이 부자가 된다. 포르투갈이 그렇다. 포르투갈은 인구 140만 명 정도였는데 남들보다 빠른 1415년부터 해외 원정을 시작한다. 238척의 배와 4만5000명 병사를 이끌고 아프리카 북부 세우타를 침략한다. 유럽 국가가 바다를 건너 다른 대륙을 무력으로 제압한 첫 사례다. 제국주의 침략의 시작이다. 항해왕으로 불리는 엔히크(1394∼1460년)는 해양력을 키우는 데 집중했다.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금과 노예를 데리고 온다. 얼마 후 아프리카 동해안은 상아해안, 황금해안, 노예해안으로 불린다. 남진을 계속하던 포르투갈은 1488년 희망봉을 발견하고 1498년 5월 서유럽인 최초로 인도 땅을 밟는다. 처음 항해를 하고 온 그들은 크게 환영을 받는다. 후추를 가득 싣고 왔기 때문이다. 향신료 외에 인도의 좋은 면직물도 가져왔다. 이를 통해 이들은 투자금의 60배 수익을 올렸다. 이들의 항해는 콜럼버스 발견과 함께 가장 위대한 발견으로 꼽힌다. 포르투갈에 자극을 받은 에스파냐, 영국, 프랑스도 식민지 건설에 나서면서 모두가 식민지를 통해 부를 축적하는 데 혈안이 된다.

식민지 건설과 삼각무역 등으로 돈이 생기면서 금융업도 발달한다. 식민지 건설에 따른 막대한 투자와 투자에 따른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니즈 때문이다. 영국은 커피하우스가 그 역할을 한다. 1650년 영국에 처음 소개된 커피하우스는 1페니만 내면 무한정 앉아 토론을 즐길 수 있어 남성들의 사교장소로 각광을 받았다. 한때 520개 업소가 북적이면서 비즈니스 장소가 됐다. 온갖 사람이 모여 새로운 소식과 정보를 교환하면서 사람과 돈이 몰렸다. 특히 런던항 근처 커피하우스에는 선주, 선장, 상인, 보험 브로커들이 새로운 정보와 소식을 찾아 모여들었다. 어떤 사업가는 커피하우스를 통째로 빌려 사무실로 쓰기도 했다. 에드워드 로이드의 커피하우스가 그랬는데 바로 칠판 서비스 덕분이다. 선박들의 출발과 도착 예정일, 도착 뒤 배당률 등을 칠판에 적어두자 이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몰렸다. 이 정보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자 로이드는 1669년 아예 부정기 정보지인 로이드뉴스를 발행한다. 1페니씩 받던 한 장짜리 정보지에는 외국 사정과 전쟁 소식, 재판, 의회 사정, 항해 정보 등이 실렸다. 1713년 로이드 사망 후 커피하우스를 물려받은 사위들이 1734년 로이드 리스트를 창간, 항해와 해상보험 소식을 집중적으로 다뤘고 선박 등기 업무로 손을 뻗었는데 이게 오늘날 세계 상선의 4분의 1이 등록돼 있는 로이드 선박등기소의 시발점이다. 이어 1771년 보험업자 79명이 100파운드씩 출자해 로이드 클럽을 만들었는데 손해보험사의 대명사 로이드 해상보험의 탄생이다. 100만 명 이상의 전문 인력이 근무하는 영국 금융서비스 산업은 커피하우스에서 시작됐다. 금융업의 발전이 부를 가속화한 셈이다. 처음에는 식민지를 이용한 삼각무역으로 돈을 벌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돈이 돈을 벌었다.

셋째
기술의 발전이다. 뭐니 뭐니 해도 부의 원동력은 기술과 기술을 활용한 산업 발전이다. 삼각무역 등으로 돈을 번 영국이 산업혁명을 일으킨 것은 제임스 와트가 증기기관을 발명하고 이를 산업화해서 면직물 산업을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이전 영국은 인도에서 면을 수입했지만 산업혁명 이후에는 거꾸로 인도에 면제품을 수출해 돈을 벌었다. 기술 개발로 싼값에 석탄을 채굴하고, 석탄은 철강 산업의 발전으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자동차와 철도 산업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미국의 부흥 역시 산업의 발전 덕분이다. 미국 산업의 삼총사는 철강, 석유, 금융이고 이 산업의 주인공은 록펠러, 카네기, 모건이다. 카네기는 영국 여행길에 헨리 베서머의 공장을 방문한 뒤 철강업 진출을 결심하고, 피츠버그에 철강공장을 세우고, 1901년 이 회사를 4억8000만 달러에 모건에게 넘긴다. 록펠러는 석유의 잠재력을 알아보고 석유산업을 일으킨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업체를 사들이거나 짓밟는 방식으로 생산, 정제, 저장, 송유, 판매까지 모두 다 갖게 된다. 범위의 경제와 규모의 경제를 모두 달성하면서 정제시장의 95%를 차지했지만 반독점법 위반으로 34개의 회사로 쪼개진다. 70년대까지 석유시장을 지배했던 7개 시스터즈 가운데 엑손과 모빌, 걸프 등이 스탠더드 오일의 후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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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근태

    한근태kthan@assist.ac.kr

    - (현) 한스컨설팅 대표
    -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 교수
    - 대우자동차 이사 IBS 컨설팅 그룹 상무
    - 한국리더십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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