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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와 정조를 통해 본 리더십

城을 쌓은 숙종, 체계를 쌓은 영조

노혜경 | 239호 (2017년 12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조선 후기 숙종은 도성방어론을 국정과제로 내세우며 사람들을 도성 정비에 투입했다. 주민들이 번듯하게 조성된 성벽을 보며 외적이 쳐들어와도 최소한 서울은 안전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갖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서울의 지리적 환경이나 구조로 볼 때 축성 작업만으로 수도를 완벽하게 방어하기란 현실적으로 힘들었다. 눈에 보이는 성을 쌓는 데 주력한 숙종과 달리 영조는 눈에 보이지 않는 체계를 마련하는 데 힘썼다. 요즘 말로 ‘서울 방어계획’ 정도로 풀이되는 『수성절목(守城節目)』을 발표, 서울 주민 모두에게 구체적인 방어구역과 위치를 지정해 국방의 역할을 담당하도록 했다. 자신이 몸소 도성 방어의 중책을 맡고 있다는 ‘자부심’을 갖게 된 백성들은 영조의 도성방어책을 신뢰하게 됐고, 더 나아가 영조라는 임금을 신뢰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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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가장 큰 이슈가 되고 있는 문제는 국방과 외교다. 북핵 위험으로 인해 국방력 강화와 함께 주변국과의 공조가 절실해지고 있는데 이것이 무역문제와 얽히면서 그야말로 사면초가에 빠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전쟁에 대한 공포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조선시대에 가장 큰 혼란을 가져온 것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었다. 두 차례의 전쟁을 치르고 난 뒤의 상황은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변화로 이어졌다. 이 때문에 역사학계에서는 이를 기점으로 조선 전기와 후기를 나누고 있다. 그런데 이 두 전쟁을 통해 조선의 백성들이 느꼈던 가장 큰 충격과 실망감은 바로 국왕이 도성을 버리고 도망쳤다는 사실이다.

조선은 원래 ‘나라를 대표하는 왕이 살아 있다’는 자체가 큰 의미를 지녔던 시대였다. 그래서 임금이 도성과 백성을 버리고 도망을 가더라도 자기 한 몸을 보호해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종묘사직 보존 차원에서 의미가 있는 일이라 여겼다. 그러나 조선 후기가 되면서 이런 인식에 변화가 생겼다. ‘한 번만 더 왕이 도망치면 국가를 유지하지 못한다’라는 의식이 공유되기 시작했고, 위기감 또한 확산됐다. 이런 문제의식으로 인해 나온 방안이 바로 ‘도성방어론’이었다.


도성방어론 등장 배경

17세기 전반 이전까지의 생각으로는 유사시에 도성을 버리고 안전한 성으로 들어가서 종묘사직을 보전하는 대비책은 강화도나 남한산성을 이용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수도를 떠나 인근 지역으로 도망가는 방안이었다. 그런데 17세기 후반에 접어들며 이런 생각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수도인 서울을 지켜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당시 조선의 상황은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으로 상업이 발달하고 시장이 늘어났으며, 모든 상품이 서울에 몰려 부(富)가 집중되고 있었다. 서울에 무시할 수 없는 재화가 쌓이게 되면서 이제는 전쟁이 난다고 서울을 버리고 도망갈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한 호응으로 숙종은 서울 도성을 새로 쌓고, 서울 근교인 강화나 개성, 양주 등의 병력과 산성을 정비하고 확충했다. 또 서울을 중심으로 북한산성과 남한산성을 새로 쌓고 도성을 정비하기 위한 일련의 사업을 벌였다.

그러나 서울의 지리적 환경이나 구조로 볼 때 수도인 서울을 완벽하게 방어할 수는 없었다. 아니, 불가능했다. 이는 숙종뿐 아니라 대신들도 모두 아는 사실이었다. 숙종의 기본 입장은 도성이 지나치게 넓고 견고하지 못해서 지키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숙종은 “당초에 도성을 축성할 때 이것을 지키려는 계책에서 나온 방안이 아니기 때문에 견고하지 못하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도성을 수축하고 도성수비 대책을 내놓기는 했지만 여전히 도성수비를 차선책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1704년(숙종 30년) 3월, 삼각산에 고유제를 지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 도성 축성은 1710년(숙종 36년)까지 6년 동안 일시 정지와 재개를 반복해 서울의 동서남북 도성을 거의 마무리했다. 큰 사각형의 번듯한 돌로 바꾸고 보수해서, 이때 새로 조성된 부분을 보면 이전에 했던 돌과는 확연히 구분될 정도로 멋있게 만들어졌다. 그러나 재정 부족과 가뭄 때문에 공사는 자주 중단됐다. 성벽을 높인다거나 방어시설을 확충하는 등의 구조적 변경도 하지 못했다. 그저 인테리어만 바꾸는 정도였다. 여기에는 성곽의 신축과 개축을 하지 못하게 하는 청나라와의 조약으로 인해 청나라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한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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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혜경hkroh68@hotmail.com

    - (현) 호서대 인문융합대학 교수
    - 강남대, 광운대, 충북대 강사
    -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
    - 덕성여대 연구교수
    - <영조어제해제6>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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