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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R5. 미술관의 통념 깬 프랑스 마그재단

'돈 말고 열정' 아티스트 놀이터로 출발, 살아 숨 쉬는 예술 플랫폼으로 우뚝 서다

고성연 | 236호 (2017년 11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프랑스 마그재단 미술관은 당대에 활발히 활동하던 아티스트들의 작품 세계를 제대로 반영하기 위한, ‘영감 넘치는 놀이터’로 기획되고 조성됐다. 창립자 부부는 비즈니스가 아닌 오로지 아티스트들을 위한 공간을 만들고자 했고, 그 순수한 열정과 진정성을 이해한 친구 아티스트들이 가세하면서 역설적으로 대중에게 가장 사랑받는 미술관을 탄생시켰다. 마그재단 미술관의 성공 요인은 다음과 같다. ▲ 다채로운 개성을 가진 다국적 작가들의 주도로 만들어졌다. ▲ 아티스트들과 남다른 친분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관계의 미학’이 작용했다. ▲ 자연과의 조화가 빼어난 한적한 마을, 생폴드방스를 택함으로써 ‘힐링 미술관’의 본보기가 됐다. ▲ 과거의 명작만 다루는 것이 아닌 현존 작가들과 꾸준히 협업하면서 동시대 문화 플랫폼로서의 경쟁력을 확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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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디 푸른 지중해를 품고 있기에 흔히 ‘코트다쥐르(Côte d’Azur, 프랑스어로 ‘푸른 해안’이라는 뜻)’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프랑스 남동부 지역. 2014년 여름, 이 일대를 잔잔하게 수놓은 이름 하나가 있다.

앙티브(Antibes)에 있는 피카소뮤지엄, 니스(Nice)의 명소 샤갈뮤지엄과 마티스뮤지엄, 비오트(Biot)에 위치한 페르낭레제뮤지엄 등 이 지역의 주요 공공 미술관에서 잇따라 개최한 전시 제목에 공통적으로 ‘마그(Maeght)’라는 단어가 포함돼 있었다. 니스에서 20㎞ 정도 떨어진 성곽마을 생폴드방스(Saint-Paul de Vence)에 자리한 사립 미술관, 마그재단 미술관(The Maeght Foundation)의 탄생 50주년을 기념해 인근의 국공립 미술관들이 너도나도 마그재단과 연관된 전시를 마련했다.1

‘마그’는 반세기 전인 1964년 마그재단 미술관을 설립한 마그 부부의 성을 딴 것인데 사실 프랑스 근현대 미술사에 조예가 깊지 않다면 익숙하게 들릴 리 없다. 하지만 2014년 마그재단 미술관에 축하의 손길을 내민 이웃 미술관들의 전시 목록을 훑어보면 미술 문외한이라도 웬만하면 들어봤을 법한 쟁쟁한 이름들과 나란히 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호안 미로(Joan Miró) 추모전, 알렉산더 칼더(Alexander Calder) 추모전,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추모전 등이 하나같이 마그재단 미술관 50돌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로 기획됐다.

이쯤 되면 궁금해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도대체 마그라는 부부의 정체가 무엇이길래, 또 이 재단의 존재가 얼마나 대단하길래 이처럼 20세기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거장들을 한꺼번에 ‘호출’할 수 있었던 것일까? 더욱이 내로라하는 국공립 미술관들의 적극적인 외조를 받으면서 말이다.

그 이유는 마그재단 미술관이 엄연히 사립임에도 공공 미술관의 성격을 띠고 있고, 실제로 그런 대접을 받고 있는 흔치 않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근현대 미술의 보고(寶庫)인 마그미술관은 프랑스에서 시민들의 공공재로 자리매김한 사립 미술관의 효시이자 창조적 산실의 본보기로 여겨진다. 그렇다고 실제로 공공 미술관처럼 중앙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펀딩을 받지는 않는다. 해마다 방문객 15만∼20만 명을 꾸준히 끌어모으면서 스스로의 힘으로 존속해왔다. 미술관은 공공의 영역에 속한다거나, 엄청난 거부들이 돈을 쏟아부어 기부 방식으로 운영된다는 고정관념을 깬 사례다.

‘예술이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신념을 굳게 지녔던 창립자 부부는 상업 화랑으로 돈벌이에 꽤 성공했지만 비즈니스 논리에서 벗어나 오로지 아티스트들을 위한 공간을 만들고자 했고, 그 순수한 열정에 공감한 친구 아티스트들과의 협업으로 세상에 둘도 없는 미술관을 탄생시켰다. 독립적인 사립 미술관이지만 공공재 반열에 올랐을 정도로 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해온 마그재단 미술관의 저력은 다름 아닌 ‘진정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예술을 향한 사랑과 창조적 열의를 바탕으로 한 우정의 반석 위에 세워진 이래 반세기 넘게 독특한 존재감과 자생력을 발휘해온 마그재단 미술관의 뜻깊은 발자취를 분석해보자.

 

자연과의 공존, ‘힐링’을 부르는 생폴드방스의 숨은 명소

성벽으로 둘러싸인 외관, 그 안에 고풍스러운 느낌이 묻어나는 아기자기한 집들이 경사를 타고 올라가면서 밀도 있게 들어서 있고, 한가운데 꼭대기에는 교회당이 우뚝 서 있는 생폴드방스.

마치 외부와 단절된 중세의 요새를 떠올리게 하듯 평화로운 고요함이 흐르는 이 마을은 러시아 출신 유대인으로 프랑스로 망명했던 샤갈이 여생을 보냈을 뿐만 아니라 고흐, 마티스, 피카소 같은 걸출한 예술가들이 사랑해 마지않았던 곳이다.

프랑스에서도 아는 사람만 안다는 ‘숨은 명소’ 마그재단 미술관은 생폴드방스에서도 특히나 한적한 외곽의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숲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양 끝이 살짝 올라간 반달 모양의 하얀 지붕과 분홍빛 도는 연갈색 벽돌이 인상적인 건물이 짙은 녹음 속에서 자태를 드러낸다. 건물 자체는 다소 낡고 수수한 편이지만 그 앞에 펼쳐진 잔디밭 위에 여기저기 놓인 조각 작품들은 한눈에 딱 봐도 범상치 않은 아우라(aura)를 풍긴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는 이 조각들은 모빌의 발명가로 잘 알려진 미국 조각가 칼더를 비롯해 스페인의 조각 거장 에두아르도 칠리다(Eduardo Chillida), 독일계 프랑스 조각가 장 아르프(Jean Arp) 등 미술사에 길이 남을 세계적인 아티스트들의 작품들이다. 그뿐인가. 본관 입구 쪽 벽은 샤갈의 모자이크가 장식하고 있고, 건물 중정(Patio)에 자리한 수조의 타일은 피카소와 함께 큐비즘의 창시자인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의 솜씨이며, 심지어 카페가 들어서 있는 건물 외벽에도 프랑스 입체주의 작가 페르낭 레제(Fernand Léger)의 부조 작품이 달려 있다.

미술관 본관 뒤편으로 가면 더욱 놀라운 풍경이 시야를 사로잡는다. 커다란 소나무들 사이로 낮은 돌담길이 마치 미로처럼 이리저리 얽혀져 있고, 그 사이사이에 동심을 불러일으키는 생기발랄하고 귀여운 조각들이 놓여 있다. 스페인에서 가장 대중적인 사랑을 받아온 20세기 미술가로 꼽히는 호안 미로의 조각 정원이다. 이름하여 ‘미로의 미로(The Miró Labyrinth)’. 이 미려한 정원 뒤쪽으로는 생폴드방스의 아름다운 풍광이 한눈에 들어온다.

미술관 안뜰은 스위스 초현실주의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의 차지다. 작가 특유의 길쭉한 작품들로 채워진 ‘자코메티의 뜰’이 커다란 나무를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다. 과연 유럽에서 자연과 가장 이상적인 조화를 이루는 미술관 목록에 빠짐없이 올라갈 만한 매혹적인 풍경들이다.

 

20세기 최고 예술가들의 놀이터, 독보적 성공 사례가 되다

이렇듯 대가들의 작품으로 가득 차 있는 공간을 사전 정보 없이 본 사람이라면 어마어마한 예산을 투입해 지은 미술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20세기 최고의 아티스트들을 한데 모아놓은 국립미술관이 아니라면 엄청난 부호가 화려한 컬렉션을 담아내기 위해 돈을 쏟아부어 만든 사립 미술관이지 않겠냐는 추론이 나오는 게 자연스럽다. 사립 미술관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뉴욕 구겐하임(Guggenheim)미술관이나 지난 2015년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 억만장자 사회사업가 일라이 브로드(Eli Broad)의 지원으로 문을 연 현대미술관 브로드(The Broad)의 축소판처럼 말이다.

마그재단 미술관의 배경 스토리는 좀 다르다. 물론 예술을 사랑하고 후원하자는 마음에서 미술관을 지었다는 점은 비슷하다. 하지만 애초에 설립자 가문이 세상을 좌지우지할 만큼 거부(巨富)도 아니었을뿐더러 어떻게든 돈을 끌어모아 고가에 사들인 소장품들을 과시적으로 잔뜩 풀어놓은 것도 아니다. 수많은 미술관들이 그렇듯이 이미 타계한 전 세대 거장들의 작품들이라든가 작가들이 유명해진 다음에 거금을 투자해 소장하게 된 수집품들을 모아놓은 사례는 아니라는 얘기다.

마그재단 미술관은 오로지 당대에 활발히 활동하던 아티스트들의 작품 세계를 제대로 반영하기 위한 터전, 다시 말해 그들의 영감 넘치는 놀이터로 기획되고 만들어졌다. 작가들도 직접 나섰다. 그래서 마그재단 컬렉션 중 상당수는 오로지 이 전시 공간만을 위해 창조됐다. 샤갈의 모자이크, 미로의 정원, 자코메티의 뜰, 브라크의 타일 작품이 바로 그 살아 있는 예다. 세상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미술관이 많지만 다수의 작가들이 처음부터 주도적으로 동참해 미술관 자체를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만들어낸 사례는 극히 드물다.

의도된 바는 아니었지만 이 순수한 창조적 협업은 훗날 엄청난 자산 가치로 보답받았다. 미술관을 만드는 데 동참한 마그 가문의 아티스트 친구들은 당시 무명작가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작품 한 점에 오늘날 기준으로 수십억, 수백억 원에 거래될 정도의 비싼 몸값을 자랑하지도 않았다(지구촌을 온통 흔들어놓은 대규모 전쟁을 두 차례나 거쳤던 만큼 오늘날처럼 일부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들 대부분이 훗날 20세기를 이끈 작가들로 남게 됐고, 현재는 함부로 가치를 따질 수 없을 정도의 명장 대열에 올라 있다.

일례로, 자코메티의 ‘걸어가는 남자(Walking Man I, 1960년 작)’라는 청동 조각상을 살펴보자. 이 조각품은 2010년 소더비 경매에서 1억430만 달러(당시 환율로 1200억 원대)에 팔리면서 당시 경매 최고가를 경신했는데, 마그재단 미술관 안뜰에는 제작 시기나 스타일이 유사한 자코메티의 작품들이 30점 넘게 설치돼 있다.

“당시 자코메티는 이 미술관을 둘러싼 햇빛의 느낌과 어울리도록 뜰 안의 작품들을 갈색빛이 돌게 제작했다고 해요. 그 역시 이 미술관의 일부라고 할 수 있죠.”

필자가 만난 마그재단 미술관의 커뮤니케이션 담당자 샤를렌 소코로프(Charlène Sokoloff)는 당시만 해도 자코메티가 이 정도의 가치를 누릴 줄 아무도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렇게 설명했다. 창립자의 열정과 헌신이 작가들의 우정과 만나 수십 년 뒤에 막대한 가치를 창출해내고 미술관 자체도 국보급 예술 작품으로 평가받는, 미술 경영사에 길이 남을 만한 희소한 사례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적인 가치를 꿰뚫어 보는 안목이 남달리 빼어났던 마그 부부, 그들은 어떻게 작가들과 끈끈한 유대를 맺으면서 아트 생태계의 창조적 허브 역할을 했던 것일까? 그 배경을 파악하려면 먼저 어린 시절부터 전쟁통 속에서도 예술을 몹시 사랑했던 비즈니스맨 에메 마그(Aimé Maeght)의 삶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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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사 기질을 가진 자수성가형 사업가, 에메 마그

코트다쥐르가 낳은 미술계의 혁신가로 알려진 에메 마그는 원래 프랑스 북부 아즈부르크(Hazebrouck) 출신이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불과 여덟 살의 나이에 철도 노동자였던 부친과 집을 동시에 잃었고, 그의 가족은 적십자의 구호 활동 덕에 멀리 남쪽으로 이주할 수 있었다. 시와 그림, 재즈 등을 사랑했던 소년 에메는 프랑스 남부 가르주(州)를 대표하는 도시 님(Nîmes)의 예술 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아티스트가 되고픈 열망을 품게 됐다.

하지만 그에게는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었다. 고민을 거듭하다 그는 결국 꿈을 접고 인쇄업을 생계 수단으로 택했고, 석판 인쇄 기술을 배웠다. 칸(Cannes)에 있는 인쇄소에서 커리어를 시작한 그는 어느 날 교회 성가대에서 남부 출신 무역상의 딸 마거리트 드바에(Maguerite Devaye)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이 둘은 이듬해 바로 결혼했다. 1928년, 에메가 22살, 마거리트가 19살이었던 해였다.2

20대 초반에 첫아들까지 얻으면서 의욕이 넘쳐흘렀던 에메 마그는 1932년 칸에서 떠오르던 해안 지구에 ‘아르떼(Arte)’라는 자신만의 스튜디오 겸 프린트숍을 열었다. 인쇄 작업도 했지만 디자인 가구와 그래픽 작업도 판매하는 곳이었다.

“언젠가부터 미술품도 전시하기 시작했어요. 당시 니스 등 남프랑스 일대에는 파리에서 온 아티스트들이 많았는데, 그들의 작품을 전시하면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자연스럽게 일종의 갤러리가 된 셈입니다.” 마그재단 미술관에서 만난 올리비에 케플렝(Olivier Kaeppelin) 관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흥미롭게도 그에게 본격적으로 사업의 물꼬를 트는 계기를 제공한 인물은 당시 프랑스 화단을 대표하던 작가 피에르 보나르(Pierre Bonnard)였다. 그는 어느 날 마그의 스튜디오에 자신이 그린 석판을 가져와 채색 작업을 거쳐 인쇄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프랑스 유명 샹송 가수이자 영화배우였던 모리스 슈발리에(Maurice Chevalier)의 콘서트 프로그램용이었다.3  이를 계기로 친분을 갖게 된 에메 마그는 보나르에게 당돌한 제안을 내밀었다. 그의 그림을 판화로 만들어 진열하고 작품이 팔릴 때마다 판매 수수료를 받는 계약을 맺자는 제안이었다.

마그의 일솜씨와 감각을 눈여겨봤던 보나르는 흔쾌히 동의했고, 그렇게 그들은 비즈니스 파트너이자 친구가 됐다. 이미 70대를 바라보는 원로 작가였던 보나르는 마그의 인생 멘토가 돼주기도 했다. “보나르는 내 삶의 전환점이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나는 다른 많은 아트 딜러들과 비슷한 길을 갔을 것이다.” 에메 마그는 훗날 이런 회상을 남겼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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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민한 인쇄업자에서 입지전적인 갤러리스트로 거듭나다

실제로 에메 마그는 그저 수완 좋은 아트 딜러나 인쇄업자로만 머물지 않았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창의적이고 의미 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늘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난 뒤 나치에 대적한 프랑스의 전설적인 레지스탕스 장 물랭(Jean Moulin)이 니스에 위장용 갤러리를 열었을 때는 그를 돕기도 했다. 물랭을 체포하려고 온 유럽이 야단법석이었던 무렵, 마그 집안은 보나르의 조언으로 코트다쥐르의 또 다른 마을 방스(Vence)로 피신했는데, 이때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를 만나게 된다. 이 시기에 마티스는 마거리트 마그의 목탄 초상화를 수십 점 남기기도 했다.5

마침내 전쟁이 막을 내리자 에메 마그는 마티스와 보나르로부터 파리에서 갤러리를 열고 자신들과 활동하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는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리하여 1945년 겨울,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마그갤러리(Galerie Maeght)’를 파리 뤼 드 테헤랑(Rue de Téhéran)에 열게 된다. 길고 참혹했던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파리에서 갤러리를 꾸리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전후 건축 붐이 일면서 석판화 작품에 대한 수요가 높아질 것이라는 예상이 들어맞은 데다 해가 갈수록 주목을 받은 마티스의 상승세와 더불어 마그갤러리도 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다.

다방면에 조예가 깊었던 마그는 문학과 예술을 접목한 문예지를 발간하고 다양한 출판물을 발행하는 등 문인들을 위한 활동도 함께 펼쳤다. 시와 회화를 융합하는 방식으로 편집을 대하는 그의 시도는 상당수 아티스트들로부터 호응을 얻었다. 마거리트 마그는 단순한 내조자가 아니라 ‘환상적인 영업맨’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갤러리를 성장시키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1947년 초, 인생의 멘토로 삼았던 보나르가 세상을 떠났지만 마그 부부는 슬픔을 뒤로 하고 갤러리를 키우는 데 집중했다. 특히 현대미술의 혁명가로 불리는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과 초현실주의 시인 앙드레 브레통(André Breton)을 큐레이터로 내세운 초현실주의 미술전이 대성공을 거뒀다. 마그갤러리와 활동하는 아티스트 리스트는 갈수록 풍부해졌다. 샤갈, 레제, 브라크, 미로, 칼더, 자코메티, 칸딘스키 등이 이에 포함됐다.

사실 당시만 해도 이들 전부가 각광받던 스타 작가는 아니었지만(특히 브라크와 자코메티는 별다른 대접을 받지 못하던 때였다고 한다) 마그 부부는 자신들의 감과 안목을 믿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파블로 피카소가 빠져 있던 이유는 이미 충분히 ‘잘나가고’ 있었던 데다 까다로운 요구 사항이 많아서였다는 얘기가 전해지기도 한다.6

이 밖에 젊은 세대 작가들도 합류했는데 미국 미니멀리즘 화가인 엘스워스 켈리(Ellsworth Kelly)나 벨기에 아티스트 피에르 알레친스키(Pierre Alechinsky), 스페인 작가 안토니 타피에스(Antoni Tàpies) 등이 있었다. 1950년대에 들어서자 마그갤러리는 뉴욕의 가고시안처럼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시대의 흐름을 이끌어가는 갤러리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절망을 딛고 품은 새로운 꿈, 아티스트들의 지원 사격을 받다

1953년, 쾌속 행진에 급제동이 걸렸다. 사업 문제가 아니라 개인사의 비극 때문이었다. 마그 부부의 11살짜리 둘째 아들 베르나르가 백혈병을 앓다가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7  마그 부부는 깊은 상심에 빠진 나머지 코트다쥐르로 돌아와 생폴드방스에 있는 집에서 머물면서 두문불출했다. 특히 에메 마그는 애초에 사업가보다는 아티스트가 되기를 원했던 만큼 별다른 미련 없이 은퇴를 염두에 뒀다. 이때 마그 부부에게 진심 어린 위로를 전함은 물론이고 원기를 북돋워주려고 애썼던 존재가 바로 그들의 아티스트 친구들이다.

그중 보나르에 이어 마그 부부의 새로운 멘토 역할을 했던 브라크는 생폴드방스로 찾아왔다. 예술을 향한 에메 마그의 열정을 잘 아는 그는 비즈니스 논리를 벗어난 순수한 차원에서 뭔가를 하고 싶어 해왔으니 이제 이곳에서 그 꿈을 펼치면 어떻겠냐는 조언을 건넸다.

“투기적인 목적을 배제한, 아티스트들이 최상의 빛과 공간을 누리면서 그림과 조각 작품을 보여줄 수 있도록 돕는, 그런 일을 해보게나. 내가 돕겠네.”8

동시대를 살아가는 아티스트들이 자유롭게 창조적 영감을 펼쳐놓을 수 있는 특별한 공간!

귀에 딱 와서 꽂힐 만한 말이었다. 당시 프랑스에는 현존하는 아티스들만을 위한 사유(私有) 공간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브라크만이 아니었다. 마티스, 미로, 레제 등이 모두 적극적으로 돕겠다고 나섰다. 레제는 이런 말을 던졌다. “자네가 그 일을 추진한다면, 내가 진흙 반죽을 가져가겠네. 돌에 페인트칠이라도 기꺼이 할 걸세.”9  비록 레제와 마티스는 프로젝트가 시작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들의 진심이 담긴 말년 작품들을 마그재단 미술관에서 볼 수 있다.

미로의 경우에는 자신의 이름을 딴 정원에 들여놓을 벽화와 조각을 만드는 데만 열중한 게 아니라 미술관 설계 자체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그는 마그 부부에게 마요르카섬에 새로 지은 자신의 스튜디오를 설계한 바르셀로나 출신의 건축가 호세 루이스 세르트(Josep Lluís Sert)를 소개했다. 동향이면서 미로의 친구였던 세르트는 반전(反戰) 메시지를 담은 피카소의 화제작 ‘게르니카(Guernica)’가 전시됐던 1937년 파리 만국박람회 스페인관의 설계를 담당하기도 했다. 그는 스페인 내전이 프랑코 정권의 득세로 끝나자 망명하다시피 미국행을 택했던 인물이었다.

먼저 미국에서 구겐하임, 필립스 컬렉션 같은 사립 미술관들을 둘러보면서 영감을 얻은 마그 부부는 1956년 마요르카를 방문했다. 4면이 네모인 상자형 미술관에서 벗어난 지붕과 빛을 중시하는 세르트의 건축 스타일에 매료됐다. 그리고 이듬해 그에게 정식으로 설계 작업을 의뢰했다. 멀리 미국에 있던 세르트 역시 아티스트들을 사랑하는 마그 부부의 마음과 자세에 감복해 흔쾌히 수락했다. 샤갈의 수려한 모자이크와 대형 회화 작품, 물고기 모양을 모티브로 한 브라크의 모자이크 타일로 된 수조, 미로와 자코메티의 조각품들을 위한 야외 정원과 안뜰 공간이 그의 설계도 안에 포함돼 있었음은 물론이다.

이 프로젝트가 ‘신의 계시’와도 같다는 확신이 들게 할 만한 사건(?)도 있었다. 건설용 부지의 땅을 고르게 만드는 정지(整地) 작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죽은 아들의 이름과 같은 성 베르나르(St. Bernard)에게 헌정된 예배당의 잔해를 발견한 것이다. 마그 부부는 미술관을 지으면서 이 작은 예배당을 재건했다. 그 안의 창문을 장식한 보랏빛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은 브라크가 맡았다. 이렇게 해서 1964년 7월28일, 여러 아티스트들의 영감과 진심을 담은 작품들로 채워진 마그재단 미술관이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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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품들의 붙박이 보관소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역동적인 플랫폼

“This is not a museum!”

유명 소설가이기도 했던 앙드레 말로(André Malraux)는 프랑스 문화부 장관 자격으로 마그재단 미술관의 개관식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그가 낭독한 연설문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10 ‘미술관이 아니라는’ 속뜻은 그저 예술 작품들을 한데 모아 놓은 평범한 미술관이 아니라는 것이다.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현재’의 미술이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플랫폼을 현재의 아티스트들과 함께 만들어낸, 유례를 찾기 힘든 시도였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주장이다.

탄생 배경에서부터 차별될 수밖에 없는 마그재단 미술관의 가치이자 성공 요인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1. 20세기 예술사를 써 내려간 보석 같은 ‘다국적’ 작가들의 주도로 만들어졌다. 보통 지역 기반의 미술관은 자국 작가들을 중심으로 세워진다. 설립자 부부는 프랑스 국적을 지니고 있었지만 마그재단 미술관의 컬렉션을 보면 작가 국적이 다양하다. 브라크나 레제 같은 프랑스 작가들도 있지만 스위스 출신인 자코메티, 러시아에서 망명한 유대인 샤갈, 스페인을 대표하는 작가 미로와 건축가 세르트, 벨기에 아티스트 폴 뷰리, 미국이 낳은 칼더 등이 있다. 유럽과 미국을 무대로 활동한 갤러리 가문답게 다국적 아티스트들로 구성한 결과, 다채로운 개성과 예술성을 모두 잡은 20세기 최고 작가들의 컬렉션으로 남게 됐다.

2.단순한 자본의 힘이 아니라 아티스트들과 남다른 친분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창조적 협업의 결과물이었다는 점을 주목할 만하다. 공공이든, 사립이든 세계적인 수준의 미술관 컬렉션은 대개 꾸준한 수집의 산실이거나 아티스트들이 미술관이나 컬렉터의 의뢰를 받아 탄생한다. 그런데 마그재단의 컬렉션은 오히려 아티스트들이 적극적으로 나서 미술관 자체를 예술품으로 빚어낸 ‘관계의 미학’이 작용한 경우다. 메세나 활동의 전범으로 여겨지는 르네상스 시대의 메디치 가문이 20세기에 작은 규모로 환생한, 하지만 보다 능동적인 협업의 예를 보는 듯하다.

3. 당시 예술의 중심지였던 파리가 아니라 자연과의 조화가 빼어난 한적한 마을 생폴드방스를 택함으로써 ‘힐링 미술관’의 본보기가 됐다. 사실 예술이란 자연을 재현하거나 모방하고, 그 위대함을 찬양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하지만 20세기 중반에만 해도 대도시가 아니라 고요한 자연 속에 ‘힐링’ 콘셉트로 지어진 수준급 미술관은 드물었다. 마그재단 미술관은 독일 노이스의 인셀홈브로히미술관(Museum Insel Hombroich, 1987년 개관), 덴마크 루이지애나 현대미술관(Lousiana Museum of Modern Art, 1958년 개관)과 더불어 자연과 공존하고 소통하는 유럽 최고의 ‘힐링 뮤지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프랑스에서 파리 다음으로 인기 관광지인 니스를 옆에 둔 지리적 이점도 있지만 사실 남프랑스는 워낙 이름 있는 미술관들이 많이 포진하고 있는 지역이라 경쟁도 만만치 않다. 하지만 자연미를 머금은 마그재단 미술관을 보기 위해 일부러 생폴드방스를 찾는 ‘힐링족’이 꽤 많다.

4. 과거를 화려하게 수놓은 ‘올드 마스터(old master)’들에게만 기대지 않고 현존 작가들과 꾸준히 협업함으로써 동시대 문화 플랫폼으로서의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 이는 애초에 문화유산이 되기를 원한 게 아니라 ‘살아 있는 예술(living art)’에 초점을 맞춘 설립자 가문의 뜻을 이어가는 행보이기도 하다. 개관식 당시 앙드레 말로의 연설문 내용처럼 미술관을 지을 때 마그 부부는 단순한 저장고처럼 예술 작품들이 박제되듯이 보관되는 게 아니라 생생히 살아 숨 쉬는 아티스트들의 영혼을 느낄 수 있는 역동적인 공간을 의도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과거에 살지 않으셨어요. 무엇보다 동시대 아티스트들을 중요하게 여기셨지요. (중략) 작가들이 완전한 창작의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했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자원들을 아낌없이 제공하셨어요.”11

마그 부부의 장남으로 현재 마그재단 미술관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는 아드리앙 마그(Adrien Maeght)는 이렇게 말했다.

특히 마지막 가치를 지키기 위해 마그재단 미술관은 한 가지 원칙을 세워두고 있다. 20세기 미술사의 큰 획을 그은 작가들의 값어치를 따지기 힘든 작품을 900점 넘게(포스터나 프린트까지 합하면 1만 점 이상) 소장하고 있음에도 결코 상설 컬렉션에 지나치게 기대지 않는다는 원칙이 그것이다. 그래서 소장품은 일부만을 바꿔가며 공개하면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참신한 동시대 작가의 전시나 주요 작가의 회고전 등을 1년에 세 차례 정도 개최하는 방식을 고수한다. 대가들의 작품에만 의지해 대중이 접할 수 있는 컬렉션과 전시 콘텐츠에 변화를 주지 않았다면 결코 연간 15만∼20만 명의 방문객을 꾸준히 유치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시사점

‘문화의 세기’로 일컬어지는 21세기에 미술관의 역할은 갈수록 부각되고 있다. 사립 미술관의 범람이라고 할 만큼 세계 도처에서 개인 브랜드를 내세운 전시 공간이 많이 생겨나고 있기도 하다. 학교 교육도 중요하지만 미술관은 문화와 역사를 습득할 수 있는 배움터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창의적 유전자를 깨우쳐주는 플랫폼 역할을 한다.12  반세기도 더 전에 태어난 마그재단 미술관의 신화 같은 스토리는 미술관의 존재 이유, 예술 경영의 본질, 사립 미술관이 채울 수 있는 공백이 과연 무엇인지를 곱씹게 한다.

정부나 막강한 재력을 지닌 기업의 지원 없이 규모 있는 미술관을 운영한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모기업이 따로 없는 마그재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1981년 에메 마그가 타계하면서 자신의 컬렉션 중 5분의 4가량을 재단에 기증했고 자산도 남겼지만 연간 350만 유로에 이르는 운영 자금을 충당하기란 만만치 않다. 더구나 아무리 기본 컬렉션이 탄탄하더라도 의미 있고 창의적인 기획 전시도 해야 하고, 새로운 작품도 구매해야 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미술관은 은근히 돈 들어갈 일이 많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지금은 대부분 일상적인 운영에서 손을 뗐지만 마그 가문의 후손들 사이에 불협화음도 없지 않
았다.13

하지만 분명한 점은 ‘예술이 세상을 바꾼다’는 믿음으로 아티스트들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고 그들과 소통하며 창조적 터전을 일궈낸 ‘정신’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가짐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진정성은 변해서도 안 되고, 좀처럼 변할 수도 없다. 프랑스와 유럽 전역에서 가장 사랑받는 문화예술 공간인 마그재단 미술관은 이미 공공재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국내 첫 미술품 경매회사인 서울옥션과 가나아트갤러리 설립자인 이호재 회장은 마그재단을 자신의 롤모델로 여긴다. 마그 가문과 개인적인 친분도 있는 이 회장은 3년여 전, 사재와 수집 미술품을 출연해 가나문화재단을 출범했을 때도 이 점을 밝힌 바 있다.

“20세기 중반에 현대미술을 주도했던 화상(畵商) 중 한 명이 에메 마그였죠. 상업 화랑으로 출발했지만 공익성을 띤 미술관을 만든 마그재단이나 스위스 바이엘러재단을 보고 느낀 바가 많았습니다. 미술관을 만들면 전시도 전시지만 작가들에 대한 기록을 정리하고 보존할 수 있게 되고, 그런 자료화는 미술 생태계는 물론 국가 차원의 문화 발전에 꼭 필요한 일이니까요. 더 의미 있는 점은 그 모든 행보가 예술을 사랑하고 아티스트들을 아끼는 자세에서 비롯됐다는 것이지요.”

이호재 회장의 말처럼 미술관이나 갤러리를 운영하는 경영자들은 결국 모든 무게는 예술 그 자체에 둬야 한다는 본질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미술품 공익화’라는 전범을 남긴 마그재단 미술관의 신화도 작가들을 사랑하고 예술의 가치를 제대로 알리고 싶은 열망에서 자연스럽게 잉태된 것이 아닌가. 미술관을 ‘말하는’ 방식은 저마다 다를 수 있지만 경쟁력의 근본이 ‘진정성’임은 두고두고 새겨야 할 진리다.   
 

 

DBR mini interview 

"내년엔 한국 작가 소개 전시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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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팔레 드 도쿄(Palais de Tokyo), 프랑스 문화부 예술국장 등을 거쳐 2011년 마그재단 미술관을 이끌게 된 올리비에 케플랭 관장은 증축 프로젝트를 통해 재정을 강화하고 보다 다채롭고 수준 높은 전시를 기획하고자 하는 포부를 지니고 있다. 한국 작가들에 대한 관심과 지식도 많은 편. 2014년에는 부산비엔날레 전시 총감독을 맡기도 했다.
 

마그재단 미술관은 반세기 넘는 긴 세월 동안 정부 보조금이나 기업체와의 소속 관계없이 독자적인 사립 미술관으로 존속해왔다. 미술계에서도 독특한 사례 아닌가?

그렇다. 우리는 공적인 사명을 지니고 있지만 세제 혜택 말고는 정부 지원 없이 운영되는 사립 미술관이다. 브랜드를 낀 재단 미술관하고도 다르다. 운영위원회에 11명이 있는데, 그중 3명이 정부 관계자라는 점이 우리의 독특한 위치를 설명해준다. 자신이 사회로부터 받은 것을 돌려주고 싶어 했던 설립자는 사재를 들여 미술관을 지었고, 그 과정에서 당대 아티스트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했다는 점에서도 흔치 않은 사례다.
 

연간 운영 예산의 규모는 어느 정도이며 어떻게 자생력을 유지하고 있는가?

350만 유로 정도인데 이 중 80% 정도는 입장권 판매에서 나오는 수익으로 충당한다. 나머지는 소장품 대여, 행사 장소 대여, 기부금 등에서 얻는 수익이다. 하지만 창의적인 기획 전시도 해야 하고, 작품도 새로 구매해야 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결코 쉽지 않은 구조다.


최근 진행했던 전시 중 대표적인 사례는?

2013년 ‘예술과 철학’을 주제로 진행했던 전시 ‘Les adventures de la vérité’가 굉장한 호응을 얻으면서 이 전시 하나만으로 13만 관람객을 모았다. 50주년을 맞이해 마그재단 미술관을 설계한 건축가 ‘호세 루이스 세르트’ 회고전, 올여름 독일 작가 ‘A. R. Penck’전도 평이 좋았다. 내년에는 한국의 이배 작가를 소개하는 전시를 개최할 예정이다.


 

 
고성연 아트 전문 자유기고가 amazingk@daum.net

필자는 아트, 디자인, 미디어, 식문화, 여행, 디지털 트렌드 등 다채로운 라이프스타일 콘텐츠를 다루는 저널리스트다. 한국경제신문 기자를 거쳐 런던 임페리얼대(Imperial College London)에서 ‘디자인싱킹(design thinking)’ 전공으로 경영학석사(MBA) 과정을 밟았다. 『영국의 크리에이터에게 묻다』 『CJ의 생각』 등을 저술했다. 『하버드비즈니스리뷰(HBR) 코리아』 에디터를 지냈으며 현재 『스타일 조선』의 아트+컬처 에디션 총괄 디렉터, 콘텐츠 크리에이터, 서비스디자인 컨설턴트 등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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