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se Study 朝鮮 : 병자호란

淸과의 화친 거부해 놓곤 나 몰라라 인조와 대신들, 호란을 불러 들였다

210호 (2016년 10월 lssue 1)

Article at a Glance

 

병자호란이 일어나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기까지 조선의 대응, 특히 리더의 판단과 행동은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사람들은 어려운 위기가 닥칠 것이라고 예상되더라도 그것이 멀리 있을 경우에는 존재를 부정하거나 과소평가한다. 그것에 대한 걱정과 스트레스를 피하기 위해 자신의 뜻대로 현실을 통제할 수 있을 거라는통제 환상(illusion of control)’을 갖기도 하고 긍정적인 면만 생각하고 부정적인 현실을 애써 외면하기도 한다. “설마 그렇게 되겠어?” “그런 위험도 있지만 상황이 내 의도대로 전개될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예측된 위기의 경우에는 대처할 시간이 충분하다고 착각해 시간을 낭비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막상 위기가 눈앞에 닥치게 되면 어찌할 바를 몰라서 주저앉아 버리는 것이다. 당시 리더였던 인조나 대신들 중 많은 이들이 보인 태도가 바로 이랬다.

위기의 징후를 감지하고 대처해야 하는 리더들은 위기 신호에 주목하는 법을 배우고 그러한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위기를 인정하는 것을 백안시하는 분위기도 몰아내야 한다. 조선의 병자호란에서 뼈저리게 배워야 할 교훈은 이것이다. 

 

편집자주

조선에서 왕이 한 말과 행동은 거의 모든 것이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 여러 가지 기록 중 비즈니스 리더들이 특히 주목해봐야 할 것은 바로 어떤 정책이 발의되고 토론돼 결정되는 과정일 것입니다. 조선시대의 왕과 마찬가지로 기업을 이끄는 리더들 역시 고민하고 판단하며 결정을 내리고 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미 해당 정책이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 알 수 있는 상황이기에 더욱 면밀히 성공과 실패의 요인들을 분석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정통한 연구자인 김준태 작가가 연재하는 ‘Case Study 朝鮮에서 현대 비즈니스에 주는 교훈을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대들이 매번 사소한 문제를 따지고 다투느라 이렇게 위태로운 치욕을 맞게 되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어찌 오늘날 이와 같은 상황이 되었겠는가.”

 

1637(인조15) 118일 남한산성. 청나라에 대한 항복이 사실상 결정됐던 즈음, 삼사(三司)1 의 관원들이 몰려와 청나라에 보낼 국서에 잘못된 글자가 있다며 발송을 하루 늦추자고 주장했다. 그러자 최명길이 그들을 꾸짖은 것이다. 나라의 존망이 위태로운 때에 글자가 적절하니 마니 하면서 트집을 잡는 모습이 한심해 보였으리라. 바로 이러한 태도들이 쌓여 전쟁을 초래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흔히병자호란은 명()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잡은 후금(後金)이 칭제건원(稱帝建元)2 하면서 과거 형제관계였던3 조선에게 군신관계를 요구하자 존주대의(尊周大義)4 와 재조지은(再造之恩)5 을 버릴 수 없던 조선이 여기에 반발했고, 청이 이를 제압하려는 과정에서 발발한 것으로 이해된다. 물론 틀린 평가는 아니지만 단선적이다. 병자호란은 당시 조선의 집권층이 국제질서의 변화를 읽지 못하고, 청과의 관계에서 오는 위기 신호들을 오판했으며, 예상되는 위기에 대비하지 않고, 심지어 최고 리더가 위기를 조장하기까지 하면서 악화된 상황의 결과물이었다. 위기 대응의 총체적인 부실이라는 케이스로 검토해볼 사건인 것이다.

 

1. 위기의 신호를 읽지 못하다

카산드라(Cassandra)의 저주라는 말이 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트로이의 공주로 아폴론 신으로부터 앞날을 예언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 받았지만 자신의 구애를 거부한 그녀에게 화가 난 아폴론은 아무도 그녀의 예언을 믿지 않도록 저주를 내렸다. 위기가 닥쳐온다는 징조, 위험신호도 이와 같은 경우가 많다. 분명히 크고 작은 시그널들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놓친다. 아니, 보았다고 하더라도 제때에, 올바른 방향에서 대처하지 못하곤 한다.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하는 습성, 긍정적인 면만 부각하고 부정적인 면은 애써 무시하려는 경향, 숲은 보지 못하고 눈앞의 나무만 보는 좁은 시야, 눈앞에 닥칠 때까지 일을 미루려는 게으름 등 다양한 요인들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1627(인조5), ‘이괄의 난(1624)’으로 인한 충격을 채 수습하기도 전에 조선은 정묘호란을 맞았다. 명과의 결전을 앞두고 가도(?, 평안북도 철산군)에 구축된 명군 기지를 섬멸하고 배후의 위험요인을 제거하기 위해 조선으로 진군한 후금은 형제의 관계를 맺는 것으로 전쟁을 종결시킨다. 명나라의 핵심 번국인 조선의 복속을 받았다는 것을 홍보함으로써 명나라 중심의 국제질서를 흔들 수 있게 됐고 조선으로부터 얻은 개시(開市, 국경에 여는 무역시장)와 세폐(歲幣, 공물)를 통해 물자 공급처를 확보하는 등 소기의 성과를 거뒀기 때문이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오랑캐라고 무시하던 후금을 형으로 모셔야 하는 상황이 탐탁지 않았지만 나라의 안위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런데형제의 예()’라는 명분으로 임시 봉합된 양국의 관계는 이내 흔들리게 된다. 1633(인조11)부터 실록에는 양국의 충돌에 관한 기사가 자주 나타난다. 인조 11 125일 후금은 아예 조선이 보내온 공물의 수령을 거부했는데양이 점점 적어지고 질도 나빠졌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후에도 후금은 번번이 공물의 양이 줄었다며 힐난하고(실제로 조선은 이러저러한 이유를 들며 애초 약속했던 양보다 세폐를 줄여서 보냈다) 사신들에 대한 대우가 나쁘다고 문제 삼았다. 개시를 열겠다는 정묘호란 당시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을 따졌고, 도망간 포로를 쇄환하지 않는 점을 지적했다. 그런데 이럴 때마다 조선의 조정은 단순하게 접근하고 미봉책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조선의 성의와 진심을 문제 삼는 후금의 국서를진의는 폐물을 증가하기 위한 데에 있다고 파악하고6 물리적인 이익을 약간 늘려주는 정도로 후금의 불만을 해소하려 들었다.

 

그런데 후금의 뜻은 그것이 아니었다. 물론 경제적인 요구, 외교적인 무례에 대한 불만 표시가 담겨 있긴 했지만 근본적인 질문은조선이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니냐였다. 정묘호란 때 맺은 화의를 배반하고 명과 함께 자신들을 공격할 수도 있다는 의심이었다. 하지만 조선은 이에 대한 대답을 하지 않았고 결국 전쟁의 시위는 당겨지고만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조선 조정은 왜 위기의 신호를 읽어내지 못했을까. 무엇보다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했던 습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개별 사건의 단편만 바라봤기 때문이다. 사건의 점들이 선으로 연결될 때 어떤 그림이 그려지는가. 사건과 사건의 이면에 그것들을 관통하는 어떤 의도가 존재하지 않는가. 그것을 예상하고,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위험을 미리 예측하고 대응하지 못했던 것이다.

 

 

 

2. 리더가 위기를 키우다

게다가 조선의 문제는 다름 아닌 최고 리더, 인조였다. 이 기간 동안 인조는 위험 신호를 인지하고 대응하기는커녕 오히려 위기를 심화시키고 사태를 악화시켰다. 그는 원하는 정보만 들으려 했고 임금으로서 책임을 지려 하지 않았다. 늑장 대응으로 일관하기까지 했다.

처음 후금이 조선에서 보낸 공물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수령을 거부했을 때 인조는 후금을 강하게 비난하며 절교하겠다는 의사를 밝힌다. “지금 저들이 이리처럼 한없는 욕심을 품고 우리가 보낸 폐물을 되돌려 보내면서 우리에게 폐물을 더 낼 것을 협박하였다. 심지어는 글을 보내 우리를 업신여기니 방자하여 무례하기가 그지없다.”7

 

신하들이호인(胡人)들이 바라는 바는 오로지 예단을 늘리는 것에 있는데, 국서(國書)를 통해 엄격한 말로 거절하였느니 난폭한 저들이 화가 나 갑작스레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 올 것은 필연적인 사세입니다. 우리는 믿는 것도 없이 경솔하게 호랑이와 이리의 노기를 촉발한 격이니 위태하다 하겠습니다라며 인조의 방침에 반대하고 우호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진언했지만 인조는오랑캐의 본심이 이미 드러났는 데도 경들은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그들이 성을 내지나 않을까나 염려하고 있구나라며 물리쳤다.8 최명길이 나서서 필사적으로 만류해도9 듣지 않았고 마침내 단교를 통보하는 사신이 후금으로 출발했다.

 

다행히 사신은 평안도에 주둔하고 있던 도원수 김시양과 부원수 정충신에 의해 발이 묶인다. 전쟁이 일어날 경우 조선의 군사력으로는 후금을 상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두 사람은 단교를 재고해달라는 간곡한 상소를 올렸고10 그제야 인조는 조치를 철회한다. 그러면서도제 멋대로 사신을 머물러 있게 하고 조정을 지휘하려 들었으니 이들을 참수하여 경계로 삼지 않는다면 무너진 기강을 회복할 수 없을 것이라며 김시양과 정충신을 처벌하겠다고 나섰다. 뒷일을 생각하지 않은 채 기분 내키는 대로 일을 벌여놓고 감당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것 같아 보이자 그 책임을 다른 이에게로 돌린 것이다.

 

인조의 태도는 이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오늘날 병사들이 목숨을 걸고 맞서 싸운다면 저 교만한 오랑캐를 무찌르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자는 없으니 치욕을 참고 구차히 살지 말고 정의를 위해 앞장 서 대장부의 뜻을 이룩하자! … 만약 오랑캐가 침략해 오면 과인이 전선 앞에 서서 병사들을 격려할 것이라며 임금이 장병을 격려하는 의식을 미리 연습하겠다고 해 놓고서 실천하지 않았다.11 백성들의 궐기를 요청하는 교지를 내렸으면서도
12
정온이 적의 침입에 대한 대비책을 올리자지나치게 염려하는 것 같다13 고 했고 수도를 방위하는 훈련도감의 군사를 충원하자는 건의에 대해서도 그럴 필요가 없다며 거부했다.14 사간원에서 군량조달과 군수품 배분, 국경지역 병력 증대에 관한 의견을 제시하자 비변사에서 알아서 할 일이라고 답했다.15 오랑캐를 방비하라고 평안감사에게 보낸 교지가 후금에게 탈취됐을 때도 한가로운 모습을 보였고16 의주부윤 임경업이 적정을 정찰해 온 자에게 상을 주기를 청했으나 인조는 이를 거절했다.17 그리고 두 달 가까이 전쟁에 대비하기 위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가 전쟁을 막기 위해 후금에 외교사신을 보내자는 의견이 나오자나라를 도모하는 도리는 대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대신이 막아낼 수 있다고 한다면 답서를 보낼 필요가 없다고 답했다.18 한마디로 무능과 무책임의 전형을 보여줬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위기와 마주선 리더는 세 가지 유형의 대응양상을 보인다. 적절한 대응, 부적절한 대응, 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대응이 그것이다. 인조는 세 번째에 해당되는데, 그렇다면 왜 위기가 닥칠 것이라는 사실을 뻔히 알았으면서도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던 것일까? 그저 인조가 무능한 군주여서일까? 그런데 사실, 이러한 모습은 우리 주위에서도 쉽게 나타난다. 어려운 위기가 닥칠 것이라고 예상되더라도 그것이 멀리 있을 경우에는 존재를 부정하거나 과소평가한다. 그것에 대한 걱정과 스트레스를 피하기 위해 자신의 뜻대로 현실을 통제할 수 있을 거라는통제 환상(illusion of control)’을 갖기도 하고 긍정적인 면만 생각하고 부정적인 현실을 애써 외면하기도 한다. “설마 그렇게 되겠어?” “그런 위험도 있지만 상황이 내 의도대로 전개될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예측된 위기의 경우에는 대처할 시간이 충분하다고 착각해 시간을 낭비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막상 위기가 눈앞에 닥치게 되면 어찌할 바를 몰라서 주저앉아 버리는 것이다. 병자호란을 초래한 인조, 경제 대공황을 대비하지 못한 허버트 후버, 위기를 관리하지 못해 몰락의 길을 수많은 기업들과 같은 거창한 사례가 아니더라도 개개인의 일상사에서도 이와 유사한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잇몸에 피가 나고 통증이 있는 것을 괜찮겠지 하고 참고 있다가 신경치료를 받고 임플란트까지 하게 되는 일처럼 말이다. 현실을 부정하고 결정을 유예하면 두려움은 잠시 지연되고 고민은 잠깐 미뤄지겠지만 그로 인해 더 큰 비용을 치러야 하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마찬가지로 위험은 멀리 있으면 있을수록 신속히 대책을 강구해야 하는 것이다.

 

 

3. 형식에 집착해 골든타임을 놓치다

아무튼 최고리더인 임금이 이렇다 보니 조정의 위기대응 시스템도 정상적으로 작동할 리가 없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한 해 전인 1635년까지는 아예 주목할 만한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고, 1636(인조14) 2월 후금이 칭제건원을 하고나서야 비로소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자는 말이 나오기 시작한다. 당시 후금의 칸 홍타시는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황제로 즉위하면서조선과는 형제의 나라이니 이 문제를 의논하지 않을 수 없다19 고 사신을 보냈다. 자신들과 함께할지, 아니면 거역할지 양자택일하라는 것이다. 대명의리를 절대적인 가치로 여기고 있던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이것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고, 이를 거부하기로 한 이상 청의 침입에 대비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위기가 뻔히 예상됐던 상황에도 조선은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오랑캐 사신이 성을 내고 갔으니 우리나라는 끝내 오랑캐의 침략을 당할 것입니다. 마땅히 방어할 방도를 강구해야 합니다20 라는 상소가 올라왔고온 나라가 황황하여 아침저녁을 보장할 수 없는데 전하께서는 구중궁궐에 아무 말 없이 깊이 앉아 있기를 전과 다름없이 하고 있으며, 묘당의 신하들도 아무렇지 않게 편안히 있는 것을 지난날과 다름없이 하고 있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이미 오랑캐의 손발을 묶을 계책이 서 있는 것입니까?”라며 무사안일의 태도를 질타하는 주장도 개진됐다.21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분연히 일어나 오랑캐를 물리치자는척화(斥和)’의 말잔치만 벌였을 뿐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다. 최명길만이참으로 조정의 뜻이 척화에 있다면 어찌 논의하는 말들이 몽롱하여 한 가지도 시행함이 없단 말입니까. 정해놓은 계책도 없이 이리저리 둘러대는 말에 불과합니다라며간원의 말을 받아들여 나가 싸우거나 물러나 지킬 계책을 정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신의 말을 받아들여 전쟁의 화를 완화시킬 계책을 세우지도 않으니 적들이 쳐들어오면 하루아침에 생령이 어육이 되고 종사(宗社)는 파천(播遷)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위기에 대비할 것을 진언했을 따름이다.22 최명길은 전방에 지휘부를 설치해 임전무퇴의 각오로 싸울 것을 천명하고, 오랑캐의 정황을 탐색하며 화의의 여지가 있다면 외교 관계를 유지하면서 후일을 도모할 것을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더욱이 이때의 조선 조정은 청으로 보내는 외교 서한에후금이라고 부를 것인가, ‘이라 부를 것인가의 문제에 몰두해 있었다. ‘이라고 부르게 되면 황제를 칭한 저들의 참호를 인정해주는 것이니 불가하다는 의견과 화친을 유지하기 위해이라는 국호 정도는 인정해주자는 의견이 대립하며 또 두 달 넘는 시간을 허비했다.23 형식에 집착하고 명분논쟁을 벌이느라 목전에 다가온 전쟁의 위협은 보지 못했던 것이다. 청군의 출병이 임박했다는 정보가 들어왔을 때조차 조선은 우물쭈물했는데 최명길은 이를 강하게 비판했다. “무엇 때문에 우리 스스로 많은 사단을 만들고 시일을 끌어가면서 오랑캐로 하여금 괴이하고 의아해 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것입니까. 근래에 오랑캐는 본디 별다른 뜻이 없었는데 우리나라가 먼저 스스로 도리를 잃은 것이 많습니다. 봄에 보내기로 한 세폐를 아직 다 수송하지도 않았으니 우리의 신의는 도리어 오랑캐만도 못한 것입니다.”24 이 위기를 초래한 것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12, 청군이 조선의 국경을 넘었다.

 

전쟁이 발발한 뒤에도 조선의 대응은 한심했다. 전세가 기울어지고 청나라에 항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든 상황을 모면하려고만 한 것이다. 김상헌, 정온 등과 같이 멸망할지언정 결사항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 기개와 절의라도 평가하겠지만, 그렇지도 못하면서 오랑캐에게 머리를 숙였다는 비난을 피하고자 어느 하나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일을 지연시키면서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특히, 인조 15 1, 실록의 기록은 답답함의 연속이다. 청에 보내는 국서에()’자를 쓸지 말지를 논의하느라 하루25 , 국서를 보낼지 말지를 논쟁하느라 하루26 , 국서에 써진 글자의 잘잘못을 따지느라 하루27 를 허비했다. 신하들의 반대로폐하라는 칭호를 빼서 보냈으나 청군이 접수를 거부하자 부랴부랴 글자를 추가하기도 했다.28 남한산성에 있던 백성과 병사들이 하루에도 수없이 굶어죽고, 얼어 죽던 상황에서 말이다. 게다가 항복 조건을 협상하는 과정에서도 다른 부분, 가령 국가와 백성에게 큰 부담이 되는 공물량을 줄일 생각은 하지 않았고, 오로지 인조가 남한산성 밖으로 나가 항복하는 것을 피하는 데만 집중하면서 또 며칠을 낭비했다.29 인조가 청으로 끌려갈까봐 걱정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와 같은 위기를 겪었다면 위기가 종료된 뒤에는 잘잘못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통해 위기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대응력과 복원력(corporate resilience)을 키우는 데 주력해야 하는 법이다. 체계적인 프로세스를 정립하고 위기관리 시스템을 정비해야 한다. 그래야 같은 위기를 반복해 겪지 않고, 어떤 위기에도 망설이지 않고 대응할 수 있는 힘을 갖추게 된다. 그런데 조선은 전쟁이 끝나자마자 책임소재를 가리는 일에만 주력했다. 인조는대신들이 즉시 가부를 결정하지 않아 상황이 이렇게 되었다며 한탄하고30  “남한산성에 군사를 이끌고 온 수령, 배를 이끌고 먼저 달려온 자, 태만하여 나중에 도착한 자, 끝끝내 오지 않은 자를 모두 조사하여 아뢰라며 대대적인 징계에 나섰다.31 위기대응 실패에 대한 반성은 그 어디에도 없는 채로.

 

  

 

4. 변화된 환경에 맞는 변화된 방법을 찾지 못하다

끝으로 이와 같은 총체적인 부실에는 외부환경의 요인도 작용했다. 병자호란 전후로 이뤄진 명-청 교체는 판 자체를 뒤집고 게임의 규칙을 바꿔버리는 거대한 환경변화였다. 이러한 변화가 생겨날 경우, 그리고 그로 인해 파생된 위기가 닥칠 경우, 기존의 방식은 더 이상 소용이 없어진다. 동아시아의 절대강자였던 명나라가 쇠락하고 조선이 오랑캐라고 무시했던 여진족이 중원 제패를 앞두면서 당시 조선은 개국 후 그때껏 경험해보지 못했던 국제질서와 마주해야 했다. 명이라는 유일의 초강대국과의 관계 속에서 구축됐던 사대질서는 임진왜란 등 기존의 조선이 겪었던 위기를 극복하게 해 준 힘이었지만 새로이 변화된 환경은 그것이 오히려 장애요인으로 작용하게 됐다. , ‘역량파괴적 환경변화(competence-destroying environmental change)’ 속에서 존주대의, 사대주의라는 기존의 성공공식은 환경의 변화에 대응하는 것을 가로 막았고 심지어 덫이 돼 버렸다. 기존 체제를 근본적으로 재설계해 청이 주도하게 될 신국제질서에 편입하고, 여기에 걸맞은 변화된 방식을 채택해야 위기를 극복할 수 있지만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이 아예 막혀버린 것이다.

 

병자호란 전후로 이뤄진 명-청 교체는 판 자체를 뒤집고

게임의 규칙을 바꿔버리는 거대한 환경변화였다.

 

물론 병자호란 당시 조선의 사대부들이 강조했던 대의명분은 지금의 관점으로 함부로 재단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의 배경에 어두운 국제인식이 자리하고 있었던 점은 아쉬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척화파의 거두 김상헌은 청과의 화친에 반대하며의리가 아닌 이해를 가지고 논한다 하더라도 강포한 이웃의 일시적인 사나움만 두려워하고 천자의 군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이는 원대한 계책이 못 된다32 고 주장했다. 굳이 명나라와의 의리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향후 명나라의 응징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청과 화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당시, 명나라 곳곳에서 반란이 창궐하고, 청이 명을 압도하고 있었음을 생각할 때 국제정세를 읽지 못한 순진한 발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의 사대부들이 척화를 고집하다가 전쟁의 참화를 초래하고 굴욕적으로 항복하게 된 것에는 이러한 어두운 인식도 주요한 요인이 됐을 것이다.

 

서울 송파구 잠실동에 위치한 석촌호수가에는 청나라의 요구로 만들어진 삼전도비가 아직도 남아 있다. 비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처음에는 미욱하여 알지 못하고 스스로 재앙을 불러왔는데 황제의 밝은 명령 있음에 자다가 깬 것 같았다.”33 청나라에 대한 굴욕적인 표현이지만 사실도 이와 다를 것이 없었다. 조선에 닥치는 위기의 신호를 알지 못했고 오히려 대책도 없이 위험을 키우다가 병자호란이라는 재앙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전쟁의 참화를 겪고 나서야 비로소 지난 과오를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과연 깨달았을까?

 

요즘도 국가든, 기업이든위기대응은 매우 중요한 과제로 여겨진다. 불확실성이 갈수록 증폭되면서 예측 가능한 위기뿐만 아니라블랙 스완과 같이 도저히 일어날 거라 상상하지 못했던 위기에 대한 대처 능력도 요구되고 있다. 그런데 병자호란의 사례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예측 가능한 위기조차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리먼 사태를 촉발로 2008년 전 세계에 불어닥친 금융위기를 두고 대다수 경제학자들과 금융기관, 금융정책당국은 파국을 예상하지 못했다고 변명했지만 금융거품이 언제든 터질 것이라는 위험 징후는 분명히 존재했다. 신호를 무시했거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을 뿐이다. 신호들이 연결돼 만들어낸 거대한 그림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위기 신호에 주목하는 법을 배우고 그러한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이다. 위기를 인정하는 것을 백안시하는 분위기도 몰아내야 한다. 미셀 부커는 그의 저서 <회색 코뿔소가 온다(The Gray Rhino:How to Recognize and Act on the Obvious Dangers We Ignore)>에서 위기를 회색 코뿔소에 비유했다. 코뿔소가 언제, 어떻게 나에게 달려들지는 알 수 없지만 코뿔소가 존재하는 영역에 들어선 이상 그것은 0.1%라도 벌어질 가능성이 있는 일이라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둬야 한다. 그리고 내 시야에 코뿔소가 나타났을 때, 위기가 분명히 닥칠 것으로 예상됐을 때는 재빨리 행동에 옮겨야 한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시간을 낭비하다가는 순식간에 나를 향해 돌진하는 코뿔소를 보게 될 것이다. 위기도 마찬가지다. 위기를 예상하고, 그것이 주는 신호에 주목하고, 인지된 위험에 따라 자원을 적절히 배분하며 효과적인 대응에 나서야 한다. 위기 앞에는 망설임도, 외면도 있어서는 안 된다.

 

 

 

김준태 성균관대 동양철학문화연구소 연구원 akademie@skku.edu

 

필자는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정치외교학과 한국 철학을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를 거치며 10여 년간 한국의 정치사상과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철학을 연구했다. 특히 현실 정치에서 조선시대를 이끌었던 군주와 재상들에 집중해 다수의 논문을 썼다. 저서로는 주간지에 연재한 역사 칼럼세종과 정조의 대화를 보완해 엮은 <왕의 경영>, 올바른 리더십의 길에 대해 다룬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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