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와 정조를 통해 본 리더십
Article at a Glance
조선시대에 어머니가 후궁 출신인 왕이 꽤 있지만 영조처럼 모친이 미천한 경우는 드물었다. 이것은 영조에게 심한 콤플렉스가 됐다. 하지만 영조는 이런 콤플렉스를 자신만이 겪는 고통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후궁 대우 개선책을 법제화했다. 자신의 모친인 숙빈 최씨처럼 후궁의 신분에서 왕을 배출한 경우, 그에 대한 예우로 사당과 무덤을 격상시키고 그 제사를 국가의례로 공식화한 것이다. 후궁 대우 개선책을 세우고 법으로 만든 것이 정치적인 결단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영조는 자신과 같은 고통을 겪는 많은 사람이 있다는 걸 깨닫고, 그들의 고통을 자신이 해결하는 데에서 왕으로서의 사명과 책임을 다하려 했다. |
사람이라면 누구나 크고 작은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인간의 심리가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무의식적인 감정적 관념, 욕망, 기억 등이 현실에서의 행동이나 지각에 나타난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도 유명 인물들의 콤플렉스 때문에 여러 사건 사고가 일어나고 그 여파가 역사를 바꿀 정도로 파급 효과가 큰 경우도 볼 수 있다. 특히 조선시대는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던 만큼 부모의 신분, 특히 어머니의 신분이 자식에게 미치는 영향은 상상을 초월했고, 이것이 크나큰 콤플렉스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왕실 친척과 의정부 사이의 분쟁
1733년(영조 9) 11월5일의 일이다. 영조와 대신들 간에 논쟁이 벌어졌다. 왕실 친척과 의정부 사이의 분쟁 때문이었다. 사건은 왕실 친척인 해흥군(海興君) 이강(李?)이 고관들의 회의 장소였던 빈청(賓廳)에 난데없이 들어와 대신의 좌석에 자리를 잡자, 의정부에서는 “아랫사람이 윗전을 잘못 인도했다”며 종친부 서리를 잡아가둔 데서 시작됐다. 이강의 동생은 형의 복수를 하겠다며 오히려 의정부의 서리를 잡아가뒀다.
원래 빈청은 대신들만의 회의실이었기 때문에 종친이라도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그래서 왕실 친척을 직접 처벌하지 않고 대신 종친부 서리를 가둔 것인데, 오히려 의정부 서리를 다시 가두는 것으로 보복하는 것은 엄연히 종친의 권력 남용이라고 볼 수 있다. 삼정승들은 모두 “이강이 의정부를 모욕했으니 처벌해야 한다”고 건의했지만 영조는 용서하자고 했다. 영조는 이강의 종을 가두는 것 정도는 괜찮지만 종친부 서리를 바로 가두는 것이 문제가 있었다며 서로 양보해서 덮자고 했다. 그러나 대신들은 완강히 거부했다. 그러자 영조는 늘 자신이 신임하고 있던 박문수를 쳐다보며 자신을 좀 도와달라는 눈짓을 보냈다.
하지만 박문수는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의정부 편을 들면서 종친들의 행태를 비난했다. 순간 영조가 폭발해 버렸다. “너희들이 내가 왕자로 들어와서 이 자리를 차지했다고 종친까지 멸시하느냐”며 영조는 책상을 마구 두드리며 부들부들 떨더니 당장 박문수를 유배 보내라고 소리쳤다. 정승들은 너무 놀라 말 한마디 못하고 허둥지둥 자리를 피하고 말았다.
실제로 대신들의 행동이 너무한 것도 아니었다. 사고를 친 종친을 두고 왕과 대신이 티격태격하는 것은 조선시대에 수백 번도 더 벌어진 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가 세자가 아닌 왕자 츨신 왕이라서 나를 무시하느냐”는 말도 이상하다. 왕자 신분에서 세자로 선택되고, 그 이후 세자가 왕이 되는 것은 정상적인 순서다. 영조가 이렇게 말한 데에는 다른 뜻이 있었다. 왕자인 게 문제가 아니라 어떤 어머니의 아들이었느냐가 문제였던 것이다.
천민 출신 숙빈 최씨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는 무수리 출신이었다고 해서 흔히 ‘최 무수리’라고 불리기도 한다. 무수리는 궁궐에서 필요한 물을 떠다주고 허드렛일을 하는 천인을 말한다. 그러나 최씨가 무수리 출신이었다는 증거는 명확하게 남아 있지 않다. 다만 <한중록>을 보면 최씨가 침선방에서 일했다는 기록이 있다. 침선방은 궁중에서 사용하는 의복을 바느질하는 곳인데, 영조가 침선방에서 일했던 어머니의 고생을 생각해서 누비옷을 입지 않았다고 한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보면, 무수리인지 아닌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침선방에서 바느질하는 일에 직접 종사했던 궁녀였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다. 무수리들은 천인 출신이 많았는데, 궁녀라고 다 천인 출신은 아니었다. 그래서 최씨가 노비 출신이라는 설도 있지만 그것도 확실하지는 않다. 그러나 최소한 가난한 집안 출신이라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숙빈 최씨는 서학동 여경방에 살았는데 이곳은 지금의 태평로 주변이다. 1761년(영조 37)에 영조는 숙빈 최씨가 살았던 집을 찾아서 국가 유적으로 보존하도록 조치를 취했다. 자신이 직접 쓴 현판을 들고 집을 방문했는데, 당시 그 집에는 백모라는 천민이 살고 있었다. 영조는 그 사람을 면천시켜줬고, 그 집에다 현판을 걸었다. 천민이 다 가난한 것은 아니지만 천민이 살고 있었다는 내용을 보면 이 집이 작고 천민에 가까운 가난한 사람이 살던 집이었다고 추정할 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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