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자 이어령과 공학자 진대제의 만남
Article at a Glance
‘인간의 추상화 능력을 배운 로봇’의 등장은 사람들에게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만들고 있다. AI(인공지능)는 패턴을 인식하고 사람처럼 학습하고 판단한다. 이제 인간이 하는 대부분의 지적 활동은 AI가 대체할지도 모른다. 산업의 붕괴, 양극화의 심화 등 재앙이 닥칠 수 있다는 우려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더 먼 곳을 봐야 한다. 탈산업주의 시대로 넘어가는 총체적 패러다임의 변화를 봐야 한다. 그리고 그 새로운 패러다임 안에서의 인간, 인생을 고민해야 한다. AI와 인간의 공존 속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가치관, 새로운 윤리적 문제를 따져보고 기준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탈산업화 시대, ‘의식주 해결’의 인간에서 ‘진선미 추구’의 인간으로 완전히 변화하는 과정을 생각하며 ‘새로운 인간관’과 ‘새로운 인생론’을 수립해야 할 때다. 혹자는 인간이 스스로 창조주가 된 것 아니냐고 염려하지만 어쩌면 AI가 대부분의 ‘작업’과 ‘노동’을 해결해주는 시대, 우리는 ‘진짜 인간’이 될지도 모른다. |
편집자주
이 기사의 제작에는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인턴연구원 최시영(고려대 경영학과 3학년), 신은경(미국 매캘러스터대 경제학·아시아학과 3학년), 노서영(중국 칭화대 국제정치학과 3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2016년 3월, 평소 바둑을 즐기던 사람부터 흰 돌과 검은 돌을 구분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볼 줄 모르던 사람들까지 TV 앞에 모여 앉았다. 인공지능 ‘알파고’가 인간 바둑 최고수 중 한 명으로 꼽히는 한국의 이세돌 9단에게 도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4대1로 알파고의 압승이었다. 이 결과에 놀란 건 바둑계 인사들, 한국 사람들뿐만이 아니었다.
전 세계의 인공지능 과학자들과 인문학자들은 물론 평범하게 하루하루를 살던 모두가 충격에 빠졌다. 때마침 영국에서 ‘금융용 인공지능’에 밀려 500명의 금융 투자 자문가들이 해고됐다는 소식이 들려왔고1 , 미국의 100년 된 로펌에서 세계 최초로 인공지능을 인간 변호사 대신 채용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2 예상보다 빠른 기술의 진보, 그것도 인간의 ‘추상화 능력’을 배워버린 기계의 등장에 ‘터미네이터 시리즈’나 ‘매트릭스 시리즈’처럼 디스토피아를 그린 영화가 현실이 되는 것 아니냐는 농담 반 진담 반의 얘기가 한참 떠돌았다. 구글이 진짜로 ‘스카이넷’3 을 만들고 있다는 우려 아닌 우려도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 같은 우려 섞인 농담을 뒤로 하고 사람들 사이에서는 다소 진지한 질문도 나오기 시작했다. ‘인간은 이제 창조주가 된 것인가? 아니면 보이지 않던 신이 AI(인공지능)로 대체되는 것인가’ ‘AI와 인간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가?’ ‘인간처럼 사유하는 로봇이 등장한 시대에 인간다움은 무엇인가?’ ‘이제 인간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치명적이고 놀라운 기술의 발달이 다시 가장 인간적이고 철학적인 질문을 끄집어내게 만든 셈이다.
산업사회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는 인공지능의 시대에는 사람들의 세계관과 인간관, 그리고 인생론도 변할 수밖에 없다. 윤리, 가치, 정의, 그리고 ‘인간다움’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는 얘기다. DBR은 이번 호 스페셜 리포트로 ‘인생론’을 다루면서 이와 관련한 통찰과 해답을 줄 수 있는 석학들을 찾아봤다.
두 사람이 적격이었다. 한 명은 80세가 넘은 고령에도 AI의 역사와 현 발달단계를 꿰뚫고, 인문학자로서 세계의 변화와 인간 삶의 변화를 고민하고 예측하고 있는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현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 이사장), 다른 한 사람은 1980년대 초반 미국에서 소프트웨어와 인공지능, 그리고 로봇에 대해 연구하고 국내 최고 대기업의 경영자로 놀라운 성과를 내기도 했던 진대제 전 정보통신부 장관(현 스카이레이크 인베스트먼트 CEO)이었다. 장마가 막 시작되던 2016년 6월 말, 평창동의 한 레스토랑에서 만난 두 전직 장관의 대담을 기록해 재구성했다.
1. 알파고, 인공지능, 그리고 인간
진대제(이하 진):요즘 건강은 어떠신가.
이어령(이하 이):나이가 들어서 기억력은 예전만 못하지만 추리력이 남아 있다. 젊을 때에는 내가 양치를 했는지, 안 했는지 그냥 기억을 했는데 이제는 헷갈릴 때가 있다. 이럴 때 나는 칫솔을 만져서 젖어 있는지를 확인한다. 젖어 있다면 방금 전 양치질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인간은 늙어서 기억력이 약해져도 추론은 더 잘하는 것 같다. 지금까지의 AI는 기억력은 인간이 따라갈 수 없는 수준이었지만 추론은 잘하지 못했다. 맥락을 알아내는 걸 못했다. 그런데 알파고가 하는 그 ‘딥러닝’은 이걸 하기 시작했다.
2차 세계대전 독일 암호 분석부터 시작해 냉전시대 소련, 지금 러시아의 언어를 완벽하게 번역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투자가 이뤄지면서 AI 붐이 일었다. 그런데 엄청난 투자를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word by word’로 해석하는 방법을 썼기 때문이다.
이런 접근으로는 ‘맥락적 번역’이 전혀 이뤄질 수 없다. 예를 들어 ‘GO(바둑을 의미하는 일본어로 현재는 영어로도 바둑을 의미)의 천재 이세돌’을 번역해보라고 하면 ‘이동의 천재 이세돌’식으로 번역한다. ‘GO’를 맥락에 맞게 ‘바둑’으로 해석하지 못하고 일반적으로 활용되는 ‘이동’이란 뜻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과거 AI가 주로 정확하고 디테일한 데이터 입력 위주의 ‘expert system’이었는데 이런 접근은 실패했다.
그런데 지금 시대의 AI는 이런 방식이 아니다. 문장을 입력하면 ‘나무탐색(tree-search)’4 과정을 거쳐서 올바른 결과가 나오면 승인하고 그렇지 않으면 거부한다. 이렇게 AI가 경험을 쌓는다. 글자 하나하나를 인식하는 게 아니라 전체 그림을 보고 ‘대충’ 번역하기 시작한 것이다. 옛날에는 하나하나 다 분석하려고 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이런 방식으로는 숟가락과 주걱을 구분할 수 없다. 그런데 돌파구가 열렸다. 바로 인간의 뇌였다. 학자들이 인간의 뇌를 연구해보니 정보를 필터링해서 ‘대충’ 인식하고 있었다.
이어령 (재)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 이사장은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60년대부터 언론사의 논설위원으로 활동했고 1966년부터 이화여대 문리과대 교수 및 석좌교수로 재직, <축소지향의 일본인> <디지로그> 등의 저서를 쓰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지식인이자 인문학자로 살아왔다. 또한 1988년 서울올림픽 개폐회식 기획·연출, 새천년준비위원회 위원장, 2002년 월드컵조직위원회 식전문화 및 관광협의회 공동 의장, 유네스코 세계문화예술교육대회 조직위원회 위원장 등을 맡아 굵직한 국가적 이벤트를 담당했다. 1990년대 초대 문화부 장관으로 재직하며 국내 최고 예술교육기관인 ‘한국예술종합학교’ 설립을 주도했다. 최근까지도 지속적인 저술 활동을 하며 <지성에서 영성으로> <생명이 자본이다> <언어로 세운 집> <知의 최전선> 등을 펴냈고 현재 AI와 관련된 새로운 저서를 집필 중에 있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의 얼굴을 기억할 때 ‘인상’을 보고 대충 기억하면서 사람을 식별해냈다. 눈 크기가 몇 센티미터인지, 눈썹이 몇 개인지를 따지면 오히려 더 식별이 안 된다. 그래서 범인을 잡을 때에도 몇몇 특징만 잡아놓은 몽타주를 뿌리는 게 사진을 뿌리는 것보다 더 효과가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과거 AI 접근 방식으로 고양이와 개를 구분하려면 전 세계의 모든 고양이와 개를 입력해야 했다. 하지만 3살짜리 어린 아이는 고양이와 개를 쉽게 구분한다. 고양이와 개의 특징을 ‘대충’ 인식하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이 그동안 ‘대충대충 하는 게 문제다’라고 했는데 과거 AI가 한계에 부딪혔던 것은 바로 그 ‘대충대충’을 못했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직관의 영역이다. ‘딥러닝’은 일종의 ‘특징 표현’이다.
과거 AI는 스스로 학습한다기보다는 스스로 데이터를 입력하는 방식이었다. 예를 들면, 암 치료 등 의료와 관련된 데이터를 학술지에서 가져와 입력하는 방식이었다. 이건 한계가 있다. 이게 바로 방금 말한 ‘expert system’이라는 거다. 알파고를 만든 하사비스가 첫 대국 승리 후 했던 얘기가 ‘알파고는 expert system이 아니라 범용’이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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