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과 제국
Article at a Glance
헤라클레스 숭배의 본질
이탈리아의 주요 궁전이나 명승지, 박물관, 미술관에 가보면 헤라클레스 상이나 그림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단순히 헤라클레스가 전사들을 위한 신, 혹은 힘으로 집이나 가정을 지켜주는 신이어서가 아니다. 헤라클레스 숭배의 본질은 영웅을 향한 존경과 추앙이다. 폭력과 분쟁, 전쟁이 빈번해지는 약육강식의 시대에 헤라클레스는 제우스의 아들이라고 불렸다. 하지만 역사가 플루타르코스는 이런 헤라클레스의 신적 가계(家系)를 부정했다. 헤라클레스야말로 ‘날 때부터’ 신이 아니라 ‘죽어서’ 신이 된 영웅임을 강조하고 싶어서였다. 헤라클레스는 영웅이란 환경을 탓하지 않고 자신의 능력으로 운명에 도전하며 그 성과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아 신으로까지 추앙받는 존재임을 말한다. 소위 ‘금수저’ ‘흙수저’ 논란으로 갈등과 반목이 만연한 현 시대에 곰곰이 되새겨볼 교훈이다.
편집자주
그리스·로마 문명은 르네상스의 모태였고 서구 문명과 현대사회를 만든 힘입니다. 로마제국과 르네상스의 이야기가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생생한 교훈을 던져주는 이유는 서구 문명과 현대사회가 지닌 공통성 때문입니다. 그리스 문명과 로마제국을 만든 사람들과 그들 세계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통해 인간과 사회에 대한 통찰을 키워나가시기 바랍니다.
영웅과 제국
피렌체 남쪽에 있는 피티(Pitti)궁전은 메디치가의 라이벌이었던 피티가가 메디치가의 권위에 도전하기 위해 세운 저택이다. 하지만 제대로 착공도 하지 못하고 건설이 끝났다. 정작 피티 저택을 진짜 궁전으로 개조하고 완성한 사람은 메디치가의 군주 토스카니 대공 코시모 1세(Cosimo I, 1537∼1574)였다. 피티가로서는 통탄할 일이지만 그들에겐 다행스럽게도 궁전의 이름은 지금까지도 메디치궁전이 아닌 피티궁전으로 불린다. 이 피티궁전 안쪽 깊숙한 곳에 경호원들이 대기하던 방이 있다. 금장에 붉은 벨벳의자가 놓인 이 방의 천장과 벽에는 온통 헤라클레스의 신화를 묘사한 그림으로 도배가 돼 있다. 경호원의 방이니 세계 최고의 전사이자 무신을 아이콘으로 삼은 것은 당연하다 싶다. 하지만 이곳만이 아니다.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궁전과 저택의 입구나 복도 곳곳에 헤라클레스의 조각상이 버티고 서 있다. 이탈리아의 주요 궁전이나 박물관, 미술관에 헤라클레스 상이나 그림이 없는 곳이 없다. 몇 개씩 있는 곳도 부지기수다.
명승지를 비롯해 이탈리아의 수많은 장소에서 각양각색의 크고 작은 헤라클레스가 발견된다는 사실은 헤라클레스가 결코 전사들을 위한 신, 혹은 힘으로 집이나 가정을 지켜주는 신만이 아님을 말해준다. 어찌 보면 헤라클레스는 오늘날 할리우드 영화에서 조금 퇴색하기는 했지만 굳건히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근육질 스타의 원조 중의 원조다. 그런 스타성이 헤라클레스를 스타로 만든 것일까? 그것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로마의 역사가 플루타르코스는 헤라클레스 숭배의 본질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헤라클레스 숭배의 본질
플루타르코스의 명저 <영웅전> 제1편은 미노타우로스를 죽인 영웅 테세우스 편이다. 그리고 테세우스 편의 첫 이야기는 헤라클레스의 무용담으로부터 시작한다. 테세우스 편은 사실상 헤라클레스와 테세우스의 합편인데, 헤라클레스와 테세우스의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이 신화로 변신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멋진 사례다.
헤라클레스가 등장한 시대는 원시시대 이후로 형성돼온 씨족 또는 부족사회가 분화하고 해체되던 시기였다. 촌락에는 상류의 권력자와 귀족층이 생기고, 부자와 가난한 사람도 생겼다. 상류층과 하류층에서 모두 자기 가족, 집단에서 도태되거나 이탈하는 사람이 발생했다. 권력가, 귀족가문에서는 권력계승이나 상속에서 소외되는 사람과 서자들이 발생했고, 하류층에서는 빈곤으로 몰락하거나 노비가 되는 사람이 생겨났다. 어떤 이들은 새로운 삶을 위해, 혹은 강제로 공동체에서 떠나야 했다. 이들은 강도나 도적 떼와 같은 사회불안 세력이 되기도 하고, 야심가들은 이들을 규합해 더 크고 위협적인 군사집단이 되기도 했다.
사회가 분화하면 개개인과 마찬가지로 공동체와 공동체 간에도 힘의 차이가 발생한다. 집단이 집단을 정복해서 멸망시키기도 하고 지배하기도 한다. 약육강식이란 단어가 사람들의 머리 위로 맴돌기 시작했다. 치안이 불안해지고 폭력과 소요 사태, 분쟁, 전쟁이 점점 빈번해졌다. 치안이 불안해졌다는 건 치안을 유지하는 기능이 필요해졌다는 걸 의미한다. 헤라클레스는 새로운 수요를 깨닫고 해결사이자 용병이 됐다.
헤라클레스는 강도를 소탕하고, 용병이 돼 지역 분쟁에도 끼어들었다. 그의 해결 대상에는 사람이 아니라 동물도 있었다. 부에 대한 욕구와 도구를 만드는 기술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은 산야를 개간하고 거주지를 넓혀갔다. 그 과정에서 사자, 곰, 멧돼지가 인간과 충돌하게 됐다. 그는 농부와 목동의 의뢰를 받아 이런 맹수를 사냥했다. 헤라클레스의 전설에서 가장 유명한 이야기가 그의 10가지 모험이다. 10가지 모험에서 첫 번째 과업이 네메아의 사자 사냥이다. 네메아의 사자는 거대하고 칼과 창이 들어가지 않는 단단한 피부를 지닌 괴수였다. 그 사자와 대적한 헤라클레스는 무기 대신 자신의 괴력을 이용해 사자의 목을 졸라 죽인다. 그리고 사자 발톱을 빼고 가죽을 벗겨 자신의 갑옷으로 삼는다. 이후 네메아의 사자 가죽은 수많은 전투에서 헤라클레스를 보호해줬고 그를 상징하는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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