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주의 거울
Article at a Glance – 인문학
그리스 최고의 위기인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를 구한 장군은 페리클레스.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를 구한 장군은 파비우스 막시무스. 이들은 모두 아테네와 로마가 경국(傾國)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등장한 영웅이다. ‘군주의 거울’로 손색이 없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영웅전>의 저자 플루타르코스는 이들을 다르게 평가했다. 평가의 기준은 무엇일까. ‘과연 인간은 개선(改善)될 수 있는 존재인가, 아니면 단지 개악(改惡)될 뿐인가.’ 페리클레스는 아테네는 더 이상 이전의 방식으로 통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위기를 극복해 전형적인 영웅의 모습을 보여줬다. 반면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승리의 환호성 때문에 이성의 귀가 멀었다. 그렇게 신중하고 관후했던 사람이 타렌툼의 승리 이후부터 갑자기 자신을 신격화하고 자신보다 40여 년이나 어린 장군의 명성과 인기를 질투했다. 플루타르코스는 초지일관하는 모습을 보여준 페리클레스를 ‘군주의 거울’로 제시했다. |
편집자주
고전의 지혜와 통찰은 현대의 지성인들에게 여전히 큰 교훈을 줍니다. 메디치가문의 창조 경영 리더십과 마키아벨리 연재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김상근 연세대 교수가 ‘군주의 거울’을 연재합니다. 인문학 고전에서 시대를 뛰어넘는 깊은 통찰력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위기의 시대에 탄생하는 영웅
위기가 닥치면 영웅이 탄생하기 마련입니다. 난세가 영웅을 만듭니다. 수나라 백만 대군이 고구려를 침공하자 살수대첩의 영웅 을지문덕이 탄생했고, 임진왜란이 터지자 성웅 이순신이 등장한 것도 그 이치입니다. 위기가 닥치면 사람들은 외부의 공격에 맞서기 위해 단결하는 경향을 보이고, 그 집단적 자위의식이 영웅의 탄생을 유도하게 됩니다. 영웅이 없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위기가 없다는 뜻이기에, 영웅 부재의 시대를 굳이 애도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절체절명의 위기가 계속되는 절망의 시대에 영웅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차라리 재앙이라 불러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도 위기의 징후가 포착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스 최고의 위기는 아마 페르시아 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터졌던 ‘펠로폰네소스 전쟁’이었을 것이고 고대 로마의 최대 위기는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이 코끼리 부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를 유린했던 ‘포에니 전쟁’일 것입니다. 그야말로 ‘시대의 변곡점’이라고 할 수 있는 위기의 시대였습니다. 먹느냐 먹히느냐의 두 갈림길만이 그리스와 로마의 앞길에 놓여 있었습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배한다면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속국이 될 것이 분명했습니다. ‘포에니 전쟁’에 직면했던 로마 역시 카르타고의 한니발을 꺾지 못하면 로마라는 나라 자체가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아테네와 로마의 이런 위기 속에 등장했던 인물이 바로 페리클레스와 파비우스 막시무스입니다. 아테네와 로마가 경국(傾國)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등장했던 이 두 명의 영웅은 지금도 모든 지도자들의 ‘군주의 거울’로 간주되기에 손색이 없는 인물들입니다. 공정한 평가를 통해 후대 지도자들에게 탁월한 리더의 모델을 제시하고자 했던 <영웅전>의 저자 플루타르코스는 객관적인 인물 평가로 유명했습니다. 들추어보면 흠이 없는 지도자는 없었기에 그의 예리한 비판을 피해 갈 수 있는 영웅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아테네를 이끌었던 페리클레스에 대해서는 단 한번도 비판적인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페리클레스가 그만큼 위대한 영웅이었다는 뜻이고, 후대의 지도자들이 반드시 본받아야 할 덕목을 두루 갖춘 인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페리클레스는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아테네의 위기와 영웅 페리클레스의 등장
차라리 페르시아 전쟁 때가 훨씬 나았다고 아테네 사람들은 입을 모아 한탄했습니다. 페르시아 전쟁 때 무려 500만 명이 넘는 외국 군대가 그리스에 쳐들어 왔지만, 그래도 이렇게 힘들지는 않았다며 아테네 사람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습니다. 그야말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최악의 전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전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살육전에 가까웠습니다. 상대방이 전멸할 때까지 싸우는 전쟁을 반문명적인 행동으로 간주하던 그리스 사람들에게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 자행된 섬멸전은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상대방이 백기 투항을 해도 군인들은 물론 그 가족들까지 모두 살해하는 참혹한 전쟁이 자행된 것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가을이 되면 전투를 중단하고 들판에서 자란 곡식을 추수하기 위해 임시 휴전을 했습니다. 저녁노을이 찾아오면 휴식과 숙면을 위해 전투를 종료하는 것이 상식이었습니다. 그러나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스파르타와 아테네 군대는 야간 기습작전을 감행했고 겨울이 지나도록 봉쇄를 풀지 않는 작전을 구사하기도 했습니다. 식량이 떨어져서 인육을 먹는 처참한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페리클레스(Pericles, BC 495∼429)는 이런 위기의 시대에 아테네를 ‘탁월함’으로 이끌었던 지도자였습니다. 플루타르코스는 아예 작심을 한듯이 1절부터 페리클레스의 ‘탁월함’을 극구 칭찬하면서 “탁월함으로 충만한 업적은 곧장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그 탁월함을 우러러 보게 만드는 동시에 그 일을 달성한 사람을 본받고 싶게 만든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페리클레스야말로 아테네 최고의 ‘군주의 거울’로 손색이 없는 인물이란 뜻입니다.
페리클레스는 아테네 귀족 집안 출신으로 철학자이자 과학자였던 아낙사고라스(Anaxagoras, BC 510∼428)의 제자였습니다. 일식(日蝕) 현상을 과학적으로 설명했던 아낙사고라스의 제자답게 페리클레스는 언제나 합리적인 판단력과 미신에 미혹되지 않는 타고난 논리력을 갖추게 됐습니다. 특별히 그는 절대로 감정에 휘둘리는 법이 없이 논리적인 연설을 할 수 있는 천부적인 능력을 타고 났고, 이것이 그의 리더십 발휘에 큰 도움이 됐습니다. 페리클레스의 명연설은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잘 기록돼 있습니다.
페리클레스는 자신을 통제하는 일에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테네 의회와 자기 집을 오갔을 뿐 다른 곳으로는 아예 발걸음을 떼지 않았다고 합니다. 관직에 있는 때는 친구와의 저녁식사도 모두 거절했고 모든 개인 살림 지출을 직접 관리해서 아내와 아들의 불평이 터져나올 정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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