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주의 거울
Article at a Glance – 인문학
카밀루스 장군은 ‘로마의 두 번째 창건자’로 칭송을 받았다. 로물루스가 기원전 753년 로마를 처음으로 창건한 인물이었다면 카밀루스는 외적의 침입으로 무너질 뻔했던 로마를 구한 탁월한 장군이었기 때문이다. 카밀루스 장군은 단 한번도 집정관(Consul)의 자리에 오른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려 다섯 번이나 독재관(Dictator)을 지냈다. ‘독재관’은 외적의 침입 등으로 비상시국에 처했을 때 국가의 모든 권력과 결정권을 거머쥐는 자리다. 보통 집정관 출신이 독재관으로 임명돼 전쟁을 지휘했다. 하지만 카밀루스 장군만은 예외였다. 이런 카밀루스 장군도 젊은 시절 실수를 저질렀다. 첫 번째 전투에서 승리한 뒤 우쭐해서 사두마차를 타고 로마에 개선장군으로 귀환했다. 로마 시민들은 이런 카밀루스 장군의 모습을 보고 경계했다. 이후 카밀루스 장군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고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 <군주론>의 저자 마키아벨리는 카밀루스의 생애를 통해 참된 군주의 모습을 발견했다. 카밀루스 장군은 적절한 처신으로 시기심을 일으키지 않는 귄위를 가진 현자였다.
편집자주
고전의 지혜와 통찰은 현대의 지성인들에게 여전히 큰 교훈을 줍니다. 메디치가문의 창조 경영 리더십과 마키아벨리 연재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김상근 연세대 교수가 ‘군주의 거울’을 연재합니다. 인문학 고전에서 시대를 뛰어넘는 깊은 통찰력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사두마차를 타고 가는 남자
소(牛)가 경작과 단백질 섭취를 위해 인류에게 필요했던 동물이었다면 말(馬)은 전쟁을 위한 도구였습니다. 말을 타고 전쟁에 임하면 훨씬 유리했습니다. 적진을 향해 빨리 달려갈 수도 있고, 머나먼 원정길도 쉽게 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위대한 장군들의 모습은 일반적으로 기마상(騎馬像)으로 표현됩니다. 중세 기사들도 대부분 말을 타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습니다. 포세이돈(Poseidon)은 ‘바다의 신’으로 알려져 있지만 ‘말(馬)의 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포세이돈의 조각을 보면 종종 말을 타고 있거나 사두마차(四頭馬車)를 몰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돼 있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위대한 장군이라 할지라도 말 한 마리의 등에 오르는 것에 만족해야만 했습니다. 사두마차는 포세이돈 신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최초로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사두마차를 타고 당당히 로마로 입성했던 장군이 있었습니다.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Marcus Furius Camillus, 기원전 446∼365년)라는 인물입니다. 카밀루스 장군은 ‘로마의 두 번째 창건자’로 칭송을 받았습니다. 로물루스가 기원전 753년에 로마를 처음으로 창건한 인물이었다면 카밀루스는 외적의 침입으로 무너질 뻔했던 로마를 구원했던 탁월한 장군이었습니다. 카밀루스는 평생 단 한 번도 집정관(Consul) 자리에 오른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시민들은 국가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카밀루스를 독재관(Dictator)으로 임명했습니다. 그것도 다섯 번씩이나 독재관을 지냈는데 그것은 로마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이었습니다. ‘독재관’은 나라가 외적의 침입 등으로 비상시국에 처했을 때 한 사람에게 모든 권력과 결정권을 일임하는 제도였습니다. 임기는 반드시 6개월을 넘지 못하도록 했고 보통 두 명의 집정관 중에 한 명이 독재관으로 임명돼 전쟁을 지휘하곤 했습니다. 카밀루스는 단 한 번도 집정관 자리에 오른 적이 없는데 무려 다섯 번이나 독재관을 지냈고 모든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어 로마가 처했던 누란(累卵)의 위기에서 벗어나도록 했습니다. 그야말로 ‘전쟁의 신’이었고 포세이돈이 타던 사두마차를 끌고 개선식을 받을 만한 충분한 자격을 갖춘 인물이었습니다.
<영웅전>의 저자 플루타르코스는 로마의 위대한 장군 카밀루스를 그리스의 테미스토클레스 장군과 대비시켰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영웅전>의 백미인 비교 부분이 ‘테미스토클레스 vs. 카밀루스’편에는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플루타르코스가 왜 하필 테미스토클레스와 카밀루스를 대비시켰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게 됐습니다. 두 명 다 유능한 장군이었고 외적의 침입을 물리친, 탁월했던 지휘관이라는 공통점이 있긴 합니다만 성격과 품성이 서로 달랐고, 생의 마지막에 맞이했던 임종의 모습도 완전히 달랐습니다. 조국 아테네를 배신했던 테미스토클레스는 황소의 피를 마시면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는데 카밀루스는 마지막까지 로마 시민들의 존경을 받다가 노환으로 평온하게 임종을 맞이했습니다.
테미스토클레스와 카밀루스를 비교할 근거가 없어졌으니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테미스토클레스와 카밀루스를 다른 자료와 비교해서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회에서 테미스토클레스를 플라톤의 <국가>와 비교해 봤습니다. 카밀루스의 생애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 비교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왜 카밀루스를 마키아벨리의 책 <군주론>을 통해 분석하려는 것인지 대해서는 나중에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카밀루스가 어떤 인물이었고, 어떤 역동적인 삶을 살았는지 알아야겠지요?
프란체스코 데 로시 ‘카밀루스의 생애’, 1545년 작품. 피렌체 베키오 궁전. 사두마차를 타고 있는 카밀루스의 당당한 모습이 잘 표현돼 있다.
카밀루스의 파란만장했던 생애
카밀루스는 기원전 5세기∼기원전 4세기의 인물입니다. 카밀루스 시대의 로마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제국의 로마와는 그 모습이 상당히 달랐습니다. 로마는 이제 겨우 200년 정도의 역사를 가진 작은 나라에 불과했습니다. 원래 로마인들은 이탈리아 반도의 원주민이 아니라 외부에서 유입돼 온 정착민이었습니다. 남의 땅을 비집고 들어온 외부인이었기에 로마인들에 대한 이탈리아 원주민들의 반감과 경계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영토를 확장하기 위한 전쟁은 불가피했고 자기 땅을 지키겠다는 원주민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이 혼란의 와중에 카밀루스라는 불세출의 지도자가 등장한 것입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외부의 혼란이 극심하면 내부의 혼란도 덩달아 증대합니다. 로마도 그랬습니다. 아직 나라의 틀이 잡히지 않은 상태였으니 권력구조에 대한 합의도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전통 귀족들은 원로원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켜나갔고 일반 평민들은 호민관(Tribune) 제도를 만들어 귀족들의 권력 독점을 견제하고 저항했습니다. 원로원 중에서 두 명의 지도자를 뽑아 집정관(Consul)으로 임명하는 제도도 사실 권력 독점을 막으려는 고육책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권력을 혼자서 독점하지 못하도록 두 사람에게 권력을 나누어 놓은 것입니다. 그것도 모자라 평민들은 호민관을 무려 6명이나 임명해 그들의 권리를 지키도록 했습니다. 소수의 지배를 받는 것보다 2명의 집정관(원로원 대표)과 6명의 호민관(평민 대표)의 통치를 받는 것이, 그래도 약간의 위안이 됐던 모양입니다. 권력구조와 통치방식에 대한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나라에서 관직에 오르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카밀루스도 그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여러 차례 관직에 오를 기회가 있었지만 모두 사양했습니다. 플루타르코스는 이런 카밀루스의 처신 때문에 “그의 권위는 시기심을 유발하지 않았다”고 평가합니다. (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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