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관점에서 본 신뢰
Article at a Glance - 인문학
신(信)의 정의 : 사람의 말. 말은 곧 마음의 표현으로 신(信)은 ‘본래의 마음’이자 ‘한마음’이며 ‘인의예지(仁義禮智)’라고 할 수 있음 신(信)의 중요성 : 한마음을 가진 사람은 손해를 보더라도 마음을 바꾸지 않고 남과 경쟁하지 않음 : 모두가 하나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살면 서로 사랑하는 ‘군자’의 삶을 살지만 만물일체의 진리를 잊어버린 사람은 욕심에 사로잡혀 서로 경쟁하는 ‘소인’의 삶을 살게 됨 :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잠들기 직전에 가장 왕성해 지는 이유는 잠을 잘 때가 욕심이 가장 적은 때이기 때문. 결국 한마음, 신(信)이야 말로 창의력의 원천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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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信)은 사람(人)과 말(言)을 합한 글자다. 글자 그대로 사람의 말을 뜻한다. 말은 곧 마음의 표현이다. 마음 중에는 본래의 마음도 있고 욕심도 있다. 본래의 마음은 본심, 양심, 진심, 충심, 성심, 공심(公心), 인의예지 등으로 불린다. 본래의 마음은 모든 사람이 다 함께 가지고 있는 마음이므로 한마음, 천심(天心) 등으로도 불린다. 욕심은 탐욕, 욕정, 탐심, 사심(私心), 사심(邪心)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본심은 변하지 않는 마음이지만 욕심은 이해득실에 따라 늘 변하는 마음이다.
신(信)은 만물일체를 뜻하는 ‘한마음’의 다른 말이다
말이 마음의 표현이라고 했을 때의 마음은 욕심이 아닌 본심을 뜻한다. 본심에서 나오는 말은 변하지 않는 마음에서 나온 말이므로 언제나 믿음직스럽다. 본심에서 나오는 말은 한마음에서 나오는 말이므로 하나임을 확인하는 듬직한 말이다. 어느 드라마에서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을 했다. “제가 아버지에게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그러고는 아버지를 향해 “아버지!” 하고 불렀다. 그러자 그 아버지도 말을 했다. “아들아. 내가 ‘아들아’ 하고 부르는 것은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고는 아들을 향해 “아들아!” 하고 불렀다. 사람의 말이란 그런 것이다. 한마음을 드러내는 것이 말이다. 그래서 가장 미더운 것이 사람의 말. 신(信)이다.
본래의 마음은 한마음이지만 맹자는 특히 이를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네 글자로 설명했다. 네 글자로 설명했다고 해서 마음이 넷인 것은 아니다. 한마음은 자녀를 대하는 부모의 마음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부모는 자녀를 남으로 여기지 않는다. 자녀를 따뜻하게 안아주는 부모의 마음이 인(仁)이다. 그러나 때로는 자녀가 잘못을 저지를 때 회초리로 때리기도 한다. 그때 부모의 마음이 의(義)다. 맹자는 의를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이라 했다. 자녀를 때리는 부모의 마음은 잘못을 저지르는 자녀의 행동이 밉고 부끄럽기 때문이다. 부모는 자녀에게 양보를 한다. 맛있는 음식도, 좋은 옷도 양보한다. 그 마음이 예(禮)다. 또 부모는 자녀를 보기만 해도 어떤 상태인지 안다. 자녀에게 좋은 일이 있는지, 어려운 일이 있는지, 배가 고픈지, 어디가 아픈지, 금방 안다. 그러한 마음을 지(智)라 한다.
이 네 가지로 설명된 마음은 하나의 마음일 뿐 넷인 것은 아니다. 하나의 마음뿐이지만 평소에는 따뜻하게 안아주다가도 잘못을 저지르면 회초리로 때리기도 하고 먹을 것이 있으면 양보하기도 한다. 또 자녀가 처한 상황을 보기만 해도 어떤 상황인지 바로 알아차린다. 이를 맹자는 인의예지의 네 가지로 설명했을 뿐이다. 부모와 자녀는 하나이기 때문에 부모는 자녀를 믿고 자녀는 부모를 믿는다. 인의예지는 다 믿는 마음이므로 신(信)이다. 인이 신이고, 의가 신이며, 예가 신이고, 지 역시 신이다.
중국 한나라 때에는 음양오행설이 발달했는데 인의예지를 오행으로 배열하기 위해 신을 첨가해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으로 부르고, 이를 오상(五常)이라 했다. 오행은 오방(五方), 오장(五臟), 사계절 등을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때 인의예지신으로 이름 붙이기도 한다. 예를 들면 조선시대 때 동쪽의 대문을 흥인지문(興仁之門), 남쪽의 대문을 숭례문(崇禮門), 서쪽의 대문을 돈의문(敦義門), 북쪽의 대문을 홍지문(弘智門)이라 이름 붙이고 가운데에 보신각(普信閣)을 둔 것이 그 예다. 다만 풍수지리학으로 볼 때 동쪽에 있는 산인 낙산이 산세가 약해서 동쪽의 문을 강조해 한 글자를 덧붙여 네 자로 하고, 동쪽에 무묘(武廟)인 동묘를 세웠다. 동묘는 관우를 모신 사당이다.
모든 존재는 본디 하나다
모든 존재는 본래 하나로 연결돼 있다. 하나의 나무를 여러 토막으로 잘라 꺾꽂이라는 형태로 심어 여러 그루의 나무로 만든 경우를 생각해보자. 원래의 나무는 여러 그루의 나무로 바꼈다. 한 그루의 나무가 여러 그루의 나무이고, 여러 그루의 나무가 한 그루의 나무다. 이를 망각하지 않고 있다면 여러 그루의 나무 각각은 다음과 같이 생각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다. 그러므로 서로 믿고 서로 사랑하는 것은 본질적이다. 모두가 하나이기 때문에 한두 그루의 나무가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니다. 한 그루의 나무가 살아 있으면 다 살아 있는 것이다. 그것을 알고 그렇게 사는 것이 영생(永生)이다. 영생의 삶을 살면 죽음이 없다. 죽음이 없는 삶보다 더 행복한 것은 없다.’
그런데 모두 하나라는 사실을 망각해버리면 정반대의 삶이 되고 만다. 우리 모두는 각각 남남이 된다. 남남이기 때문에 남이 먹어버리면 나는 굶어야 한다. 경쟁하고 싸우는 것이 삶의 본질이다. 남남끼리는 믿을 수 없고 사랑할 수 없다. 모두 남남이 돼 각각의 삶을 살면 어쩔 수 없이 늙어야 하고 죽어야 한다. 늙어 죽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영생이란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산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불행하다.
사람의 삶도 그렇다. 사람도 원래 모두 하나다. 형제는 남남인 것 같지만 한 부모의 세포를 나눠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다. 사촌도 하나고 육촌도 하나다. 이렇게 확대해 가면 모든 사람이 하나다. 하나인 것은 사람뿐만이 아니다. 동식물을 포함한 모든 존재가 하나다. 사람의 유전자와 아메바의 유전자가 97% 정도 같다고 한다.중국 송나라 때 발달한 성리학(性理學)에서는 모든 동식물이 하나일 뿐만 아니라 모든 물체가 하나라고 설명한다. 성리학에서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모든 사람은 본래 하나이기 때문에 한마음을 가졌다. 그 한마음이 본마음이고, 그 본마음이 인(仁)이다. 한마음은 하나마음이고 하늘마음이며 천심이다. 하늘마음은 모든 존재에게 다 들어 있다. 하늘마음은 만물을 살리는 마음이므로 하늘마음을 받아서 생긴 모든 생물체는 살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 살고 싶은 마음을 성(性)이라고 한다. 성(性)은 마음()과 삶(生)을 합한 글자이므로 ‘살고 싶은 마음’이란 뜻이 된다. 사람의 마음도 그렇다. 모든 사람은 공통적으로 하늘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두 살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
사람의 본마음은 성(性)이지만, 특히 사람에 국한해서 말할 때는 인(仁)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모든 생물체의 본마음이 성(性)이기 때문에 인(仁)이 성(性)이다. 인을 성이라고 할 수 있지만 성을 인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성은 모든 생명체에 통용되는 용어고 인은 사람에게만 통용되는 용어기 때문에 사용범위가 다르다. 본래 하나인 관계는 모든 생물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모든 물체와도 하나다. 모든 물체의 본질은 리(理)라는 말로 표현한다. 물리(物理)란 모든 물질의 본질을 말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생물체에 포함되고 모든 생물체는 물질에 포함되므로 인(仁)은 성(性)에 포함되는 개념이고 성(性)은 리(理)에 포함되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인(仁)을 성(性)이라고 해도 되고, 인(仁)을 리(理)라고 해도 되며, 성(性)을 리(理)라고 해도 된다. 성(性)을 리(理)라고 한다는 뜻에서 성리학(性理學)이라는 명칭이 나왔다. 그러나 성(性)을 인(仁)이라 하면 안 되고, 리(理)를 인(仁)이라 해도 안 되며, 리(理)를 성(性)이라 해도 안 된다. 역시 사용범위가 다르기 때문이다. 생물체가 살고 싶어 하는 것은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물질에 관성이 있는 것과도 같다. 물체의 현 상태를 유지하려는 관성이 살아 있는 존재의 살고 싶어 하는 마음과 통한다. 모든 생물체는 추우면 몸을 웅크리고 더우면 몸을 편다. 그렇게 하는 것이 삶을 유지하는 방법이다. 이는 물체에도 적용된다. 모든 물체는 더우면 펴고 추우면 웅크린다.
사람은 원래 만물과 하나다. 독립된 개체가 아니다. 이를 만물일체라는 말로 표현한다. 사람 중에는 원래가 모두 하나라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고 사는 사람도 있지만 이를 잊어버리고 각각 남남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도 있다. 모두 하나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사는 사람은 한마음을 가지고 서로 사랑하며 살지만 잊어버린 사람은 욕심을 가지고 각각 남남이돼 무한히 경쟁하며 산다. 전자가 군자이고 후자가 소인이다. 군자는 영생하고 소인은 사멸한다. 군자는 행복하고 소인은 불행하다. 군자는 진실하게 살고 소인은 거짓되게 산다.
개체로서 독립한 인간이 직면한 건 무한 경쟁뿐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대부분 소인의 모습으로 살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본주의 시대에 개인주의로 살고 있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서구 근대정신에서 왔다. 그것은 서구의 르네상스 운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르네상스 운동은 신(神)으로부터의 해방운동이었다. 신은 사람과 사람을 하나로 이어주는 끈이었다. 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사람이 형제이듯이 사람들은 하나의 신으로 연결돼 있었으므로 모두 형제였다. 형제 중에는 부모의 권위를 이용해 권력을 독점하는 사람도 있고 부모를 내세워 다른 형제들의 재산을 가로채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에게 속아 넘어간 다른 형제들은 실상을 알지 못하고 부모 때문에 고통을 받게 됐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부모가 싫어지고 부모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진다.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난 것도 이와 같다. 중세 때의 성직자들 중에는 신의 권위를 이용해 권력을 독점하는 사람도 있었고 신을 내세워 다른 사람들의 재산을 가로채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사람에게 속은 사람들은 실상을 알지 못하고 신 때문에 고통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을 싫어하게 됐고 신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신으로부터의 해방운동은 그래서 일어난 것이다.
신은 마음속에 있다. 신이 사람을 하나로 연결하는 것은 마음을 하나로 연결하는 것이다. 대밭에서 자라고 있는 대들이 지하에서 하나의 뿌리로 연결돼 있는 것처럼 사람들도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로 연결돼 있다. 하나로 연결돼 있는 마음이 본마음이고 한마음이며 하늘마음이다. 신으로부터의 해방은 하늘마음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신으로부터의 해방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연결고리를 끊는 것이다. 연결고리가 끊어지면 사람은 모두 개체로서 독립하게 된다. 개인주의가 성립한 것은 이 때문이다.
사람이 개체로서 독립을 하면 몸이 중심이 된다. 개체로서 독립하는 것은 사람의 몸이기 때문이다. 몸을 본질적인 것으로 판단하면 마음은 몸속에 들어 있는 몸의 한 요소로 파악된다. 오늘날 물질주의가 발달한 까닭은 몸이 물질이기 때문이고 자본주의가 발달한 까닭은 몸이 살아가는 데 돈이 가장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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