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manitas & Managing Yourself

후회하는 사람은 늘 2등이다. 보불전쟁의 프랑스처럼

137호 (2013년 9월 Issue 2)

 

 

 

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기 바랍니다.

 

 1866 73, 헝가리의 수도 프라하에서 동쪽으로 50마일쯤 떨어진 쾨니히그레츠에서 프로이센군과 오스트리아군이 격돌했다. 양국 모두에게 이 전투는 곧 다가올 20세기의 국운을 건 전투였다. 프로이센은 프리드리히 2세 치하에서 강국이 됐다. 곧 독일을 통일할 기세였다. 그러나 나폴레옹에게 일격을 당하면서 여지없이 무너졌다. 절치부심한 독일은 혁신적으로 군대를 개선하며 다시 강국이 되기 위해 몸부림쳤다. 이때 참모총장이 돼 군제개혁을 주도한 인물이 몰트케였다.(조카인 몰트케도 1차대전 당시 독일의 참모총장이 됐다. 둘을 구분하기 위해 대몰트케, 소몰트케라고도 한다)

 

독일군 참모총장 몰트케

 

현대적인 군대와 전술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몰트케는 재미난 이력을 지니고 있다. 우선 그는 독일인이 아니라 덴마크인이었다. 그러나 도대체 전쟁이란 긴장감이 없는 소국 덴마크에서는 뜻을 펼칠 수가 없다고 해서 독일군에 투신했다. 그리고 덴마크와의 전쟁에서 두각을 나타내 참모총장으로까지 승진했다. 또 하나 그는 현장 지휘관을 전혀 해본 적이 없는 장군이었다. 심지어 소대장조차도 해보지 않았다.

 

어쨌든 몰트케가 통솔하는 참모본부가 구심점이 돼 프로이센은 다시 강해졌다. 불안해진 나라는 인접국인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왕가가 지배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그리고 프로이센이 싫은 독일의 몇몇 제후국들이었다. 전쟁을 피할 수 없다면 망설일 것 없이 속전속결과 각개격파로 끝내야 한다. 철혈재상 비스마르크는 빌헬름 1세를 설득해 선수를 쓰게 했다. 그 결과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전쟁(·오 전쟁)이 발발했다.

 

프로이센에 반기를 든 작센주도 오스트리아군에 가담했다. 비스마르크는 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그는 정치가이지 군대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몰랐다. 후일담이지만 그는 빌헬름 1세와 함께 최전선까지 와서 형식상의 최고 사령부를 구성했는데 겸양의 의미였는지 소령 복장을 했다고 한다. 아무튼 비스마르크는 전쟁에 관한 문제는 모두 몰트케에게 넘겼다.

 

신성로마제국 이후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유럽 최대의 제국이었다. 객관적인 전력, 병력과 군사재정 모두 프로이센의 2배가 넘었다. 열정이 넘치는 프로이센에 비해 낡고 노쇠한 왕국 특유의 병폐가 드러나고 있었지만 결코 만만히 볼 수 있는 전력은 아니었다. 일부 군대는 훈련이 아주 잘돼 있었고, 무장도 훌륭했으며 장교들의 투지와 정신력도 좋았다. 그래도 11 대결이라면 프로이센군이 강하고 승리할 자신감이 있었다.

 

하지만 그 다음을 생각해야 했다. 다행히 프랑스는 독·오 전쟁에 참전하진 않았다. 그러나 프로이센군이 오스트리아군에게 패배한다거나 설령 승리하더라도 상당한 손실을 입는다면, 혹은 장기전에 빠져든다면 프랑스는 프로이센의 등 뒤를 치고 싶은 욕망을 이겨내지 못할 것이다. 결국 프로이센은 빠르고 압도적인 승리를 거둬야 한다. 이것이 전쟁터에 가 본 적도 없는 장군 몰트케에게 떨어진 전술적 과제였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과제냐는 것은 바로 1년 전에 끝난 미국의 남북전쟁(1861∼1865)을 보면 알 수 있다. 남북전쟁에서 강선(腔線)이 도입된 새로운 소총이 사용됐다. 사거리와 정확도가 5배 이상 증가한 이 소총은 총알을 총구에서 밀어 넣어 장전하는, 그래서 1분에 5발 사격도 힘든 전장식 소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의 일제사격으로 1개 연대를 전멸시키는 가공할 위력을 보여줬다. 강선이 도입된 대포와 쇠공이 아니라 날아와 폭발하는 폭발탄을 날리는 신형 포탄 역시 전쟁터를 갈가리 찢었다. 남북전쟁의 희생자는 인구비례를 무시하고 단순 비교를 해도 미국이 1,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의 희생자를 합친 것보다 많았다. 그런데 문제는 남북전쟁이 끝날 때까지도 미국의 장군들은 이 살육전을 피할 수 있는 전투방식을 찾아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 5년의 전쟁 사이에 무기는 더 진화했다. 소총병 200명 이상의 위력을 발휘하는 기관총이 등장하고 총알을 총구가 아닌 뒤에서 장전하는 후장식 소총이 등장했다. 독일인 드라이제가 만든 이 소총은 현대 소총처럼 노리쇠를 당겨 개방하고 총알을 넣은 뒤 노리쇠를 밀어 장전하는 방식(볼트액션식)이었다. 이 방식은 1분에 12발 이상의 사격을 가능하게 했다. 총알을 한 발씩 장전하는 것이 아니라 카트리지에 8발 정도의 총알을 넣고 한 발씩 사격할 수 있는 반자동 연발소총도 개발됐다. 1분에 40발 이상의 사격도 가능했다. 다행히 이 총은 실전에 별로 투입되지 않았다. 당시 산업능력으로는 총알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독일군에게 또 하나 다행이었던 건 오스트리아군이 후장식 소총을 도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때의 생산력으로는 총과 대포를 모두 생산할 수 없었다. 우선순위를 정해야 했는데 오스트리아는 총보다 신형 대포를 택했다. 반면 프로이센은 총을 선택했다. 총과 대포를 나누어 가졌지만 양군의 살상력은 남북전쟁보다도 몇 배는 강해졌다. 누가 이기든 맞붙어 싸우면 전장은 피로 뒤덮일 것이다.

 

 

대포위 전술

 

고민하던 몰트케는 대포위 전술이란 방안을 내놓았다. 군을 3부대로 나누어 분산시킨다. 오스트리아군이 전혀 탐지할 수 없는 넓은 범위로 말이다. 오스트리아군은 옳다구나 하고 각개격파를 시도할 것이다. 다 합쳐도 오스트리아 전력의 절반밖에 안 되는 부대가 다시 3분의 1로 줄었으니 당연하다. 그때 프로이센은 나머지 2개 부대를 철도로 이동시킨다. 한창 전투 중에 생각지도 않았던 적군이 갑자기 나타나는 건 불가능하다고 여기고 있을 오스트리아군 앞에 프로이센 2개 군이 출현, 좌우를 협격한다는 작전이었다.

 

생각처럼 간단한 작전은 아니었다. 철도로 대병력을 수송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열차 한 대가 마차 1000대분의 화물을 수송할 수 있다.(적재량만이 아니라 속도를 감안한 계산이다.) 하지만 철도의 약점은 철도가 깔린 곳으로만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철도역 옆에서 전투를 벌이지 않는 이상 (물론 철로에서 전투가 벌어지면 철도 작전은 끝이다) 철도로 운송한 화물은 다시 마차로 옮겨야 한다. 철도의 속도를 맞추려면 열차 1량당 마차 1000대가 대기해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 철도나 교량이 끊어지거나 고장이 발생하기라도 하면 대혼란은 불을 보듯 뻔하다. 병사와 총은 도착했는데 총알이 오지 않는다면? 참모본부의 장교들은 온갖 지혜를 짜내 꼼꼼하게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정작 현실에서는 작전 수립 때 생각하지 못한 온갖 사고와 지체, 혼란이 발생했다. 제일 심각한 문제는 식량이었다. 먹을 것이 제때 도착하지 않았다. 쾨니히그레츠에서 오스트리아군과 조우한 프로이센군은 즉시 전투에 들어갔는데, 싸우지 않으면 굶어죽을 판이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빵도 오지 않는데 2군과 3군은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까? 불안한 가운데 전투가 시작됐다. 처음에는 프로이센군이 공세를 유지했지만 단단하게 구축한 오스트리아군의 방어선에 저지됐다. 강력한 오스트리아군 대포는 프로이센의 기동을 저지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적진으로 파고들어 오스트리아군의 방어대형을 무너트리려고 했던 프로이센 기병대의 시도는 사람과 말을 찢어버리는 폭발탄의 위력 앞에 번번이 분쇄됐다.

 

프로이센군의 예봉이 꺾였다. 2배가 넘는 병력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군을 두려워해서 움츠려 있던 오스트리아군은 프로이센의 병력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오스트리아군은 공세로 나왔고 프로이센군이 밀리기 시작했다. 이제 믿을 것은 2군과 3군의 출현뿐이었다. 하지만 2군과 3군은 깜깜 무소식이었다. 통신이 발달하지 않던 시절이라 어디에 있는지, 언제 도착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프로이센군은 약속된 시간에 나타나지 못했지만 전투를 더 극적으로 만들었다. 프로이센군이 거의 포기할 때쯤 영화처럼 그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덕분에 오스트리아군은 더 놀랐고 더 무참하게 붕괴했다. 오스트리아군 손실은 23400명 전사에 19800명이 포로가 됐다. 프로이센군 사상자는 9172명이었다.

 

소총으로 대포를 이기다

 

철도를 이용한 대포위 전술도 새로웠지만 신형 무기의 선택에서도 프로이센군이 승리를 거뒀다. 사상자의 85%가 총알에 의해 발생했다. 오스트리아군의 신형 대포도 가공할 위력을 보여줬지만 10만이 넘는 병사들이 뿜어내는 소총 화력이 대포를 압도했다.

 

이 놀라움이 의외의 전쟁사를 낳는다. ·오전쟁에서 오스트리아의 패배를 목격한 인접국 프랑스는 후장식 소총의 생산과 보급에 돌입했다. 반면 프로이센군은 오스트리아군이 채택했던 신형 대포 장착에 주력했다. ·오전쟁을 치르며 오스트리아군의 포격에 큰 감명을 받기도 했지만 이미 후장식 소총 보급을 완료했던 터라 신형 대포로 눈을 돌린 것이기도 했다. 이에 따라 1870년에 벌어진 보불전쟁에서는 역으로 프로이센군의 대포가 독일을 승리로 이끄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특히 전쟁의 절정이자 보불전쟁의 상징처럼 된 스당 포위전에서 독일군의 대포는 결정적인 위력을 발휘했다.

 

보불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는 대포의 부족을 처절하게 반성하고 포병화력 강화에 노력했다. 그 결과 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군은 독일군의 2배에 달하는 포병화력을 갖췄다. 하지만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여전히 밀렸다. 이번에는 다시 대포가 아니라 기관총이 문제였다. 독일군의 기관총 전술은 경이로울 정도로 정확하고 파괴적이었다. 소부대의 돌파전술도 한 수 위였다. 다행히 대포의 성능이 크게 발달한 덕에 프랑스 포병은 빼앗긴 진지를 초토화하고 보급망을 차단해서 독일군의 추가 공세를 저지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그들은 수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쾨니히그레츠전투로 오스트리아는 군사강국에서 탈락했다. 남은 강국은 프랑스였는데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전반까지 프랑스의 전쟁은 말 그대로 전쟁 잔혹사였다. 그 이유는 위의 사례에서 보듯이 언제나 뒤늦은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나 프랑스가 뒤늦은 선택을 한 이유는 뭘까. 분석이 아니라 후회에 의한 결정을 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많은 사람들은 아쉬움, 후회에 그친다. 그리고아 이것을 빠트렸네” “이것을 놓쳤네하는 식으로 뒤늦은 선택을 한다. 그게 아니다. “왜 그것을 소홀히 했을까? 왜 그것의 중요성이 보이지 않았을까라는 부분을 검증해야 한다. 개인이든 조직이든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다. 타인의 성공에서도 교훈을 얻고 실패에서도 교훈을 얻는다. 진정한 교훈은 언제나 자신의 모든 것에 대한 반성과 성찰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뒤늦게 빠트린 물건을 줍는 대신 밝아진 시각으로 지금 필요한 것, 미래에 필요한 것을 찾아야 한다. 그것을 하지 못하면 언제나 흘린 물건을 줍는 영원한 2등이 될 수밖에 없다.

 

 

임용한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yhkmyy@hanmail.net

필자는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에서 한국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과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 등 다수의 책과 논문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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