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경영

작은 승리 큰 효과, 불패신화 정기룡의 지혜

128호 (2013년 5월 Issue 1)

 

 

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기 바랍니다.

 

1592 414일 부산진에 상륙한 왜군은 세 길로 나누어 서울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이 중 3군인 구로다 나가사마(黑田長政)의 부대는 경상도의 서남부 지방인 김해, 합천, 거창 등지를 지나 추풍령으로 북상했다. 경상도에서 충청도를 진출하는 길을 막는 조선군의 주력은 이일의 부대였는데 424일 상주 전투에서 이일 부대는 적의 주력인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의 부대를 만나 처참하게 붕괴되고 말았다.

 

그 외 지역에는 약간의 조선군이 있었지만 병력은 극히 적었다. 구로다의 진로에 있는 경상우도 방어사 조경의 부대 역시 병력은 겨우 400명에 불과했다. 손발을 맞춘 단위부대도 아니었다. 장교고 사병이고 여기저기서 끌어모은 병력이었다. 그래도 가끔 자원해서 찾아오는 용사가 있었다. 상주 전투가 발발하기 직전에 정기룡이라고 하는 종8품의 하급 무관이 조경 부대를 찾아왔다. 훗날상승장군(常勝將軍)’이라 불리는 정기룡은 무과에 급제한 뒤 5, 6년 전에 북방 국경지대에서 잠시 근무한 적이 있었다. 조경은 그를 돌격대장으로 임명했다.

 

약한 적을 먼저 쳐야 하는 이유

 

조경과 정기룡은 추풍령 아래 금산에서 왜군과 첫 전투를 벌였지만 패배하고 말았다. 겨우 병력을 수습한 그들은 428일 추풍령 고개에서 다시 왜군을 공격했다. 정기룡은 말을 타고 적진에 돌입해 적군 50명을 베었다. 조선군이 승기를 잡았지만 왜군은 그 와중에 조선군 지휘관 조경을 발견하고 그를 급습했다. 조경의 호위대는 와해됐고 조경은 왜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이 광경을 본 정기룡은 말을 돌려 적진을 돌파하며 조경을 구하러 달려갔다. 왜군이 조경을 바로 살해하지 않고 포로로 잡으려고 했던 게 다행이었다. 왜군 한 명이 막 조경을 묶으려고 할 때 정기룡이 돌입하더니 그 왜군을 처치하고 조경을 말에 태워 빠져나왔다. 추풍령 전투 역시 패전으로 끝났지만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이 배출한 최고의 무장이며 60여 번이 넘는 전투에서 한 번도 패전한 적이 없다는 상승장군 정기룡의 데뷔전이 됐다.

 

추풍령 전투에서 정기룡이 정말 왜군을 50명이나 죽였을까? 삼국지의 한 장면 같은 그의 무용담은 과장됐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그가 왜군의 진영을 휘저으며 전투를 벌였던 건 사실이다. 그리고 그 후에도 정기룡은 몇 번 더 화려한 무용담을 발휘한다. 그러나 이런 무용담 속에는 한 가지 숨은 비밀이 있다. 조선군이고, 왜군이고 아무리 뛰어난 장수라도 잘 훈련되고 진영을 갖춘 정예부대를 만나서는 이런 활약을 펼치기 어렵다. 분명 왜군이 후방의 수송부대거나 약한 부대였을 것이다. 정기룡의 능력을 폄하하려는 게 아니다. 처음 조경을 찾아왔을 때 정기룡은 조경에게 왜구와 정면대결을 피하고 게릴라전을 벌여야 한다고 건의했다. 세력이 약한 군대가 게릴라 전술을 선택하는 건 당연하다. 게릴라의 주 공격목표는 수송부대처럼 후방의 약한 부대다. 이 정도로는 아이디어가 뛰어난 전술이라고 보기 어렵다. 병법에서도 약한 적을 먼저 치라고 했다.

 

하지만 뛰어난 전술가는 약한 적을 먼저 치라는 경구를 외우는 사람이 아니라 그 의미를 찾아내는 사람이다. 이런 말을 하면 그 의미가 뭐냐고 묻는다. 그리고 다시 외우려고 한다. 그래서 찾아낸다고 표현한 것이다. 그 의미는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적절한 의미를 발견하고 적절한 전술을 찾아내는 것. 그것이 뛰어난 전술가의 조건이다.

 

정기룡이 게릴라전을 선택한 이유는 단지 약해서가 아니다. 왜군은 수백 년간 전쟁으로 다져졌고 조선군은 전투를 모르고 살아왔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감과 실전훈련이다. 적의 아주 약한 고리를 찾고, 절대적으로 유리한 지형, 유리한 틈을 타서 기습을 가해 승리를 거둔다. 정기룡은 이렇게 말한다. “한 번 승리를 얻는다면 적은 두려운 마음이 생겨 주춤거리게 될 것이고, 아군은 적의 장단점을 알게 되고, 따라서 예기(銳氣)가 생겨날 것입니다(출처: 해동명장전).” 알고 보면 유치한 승리라고 해도 진정한 명장들은 유치한 승리가 얼마나 큰 효과를 주는지를 깨닫고 이용할 줄 안다. 나아가 이런 게릴라 전술은 그렇게 하면 자신감과 실전훈련이라는 두 가지 성과를 동시에 이룰 수 있다. 아울러 아군의 전술과 적군의 전술을 체험하고 서로 간의 장단점도 알 수 있다. 이것이 진정한 탐색전이자 실전 만한 훈련은 없다는 경구의 중요한 의미이기도 하다.

 

감성을 따르지 말고 감성을 지배하라

 

강한 적이 침공해 오고 아군이 패전하면 자연발생적으로 여기저기서 의병, 게릴라 부대가 생겨난다. 하지만 세계전사에 비춰 볼 때 성공하는 게릴라 부대는 의외로 많지 않다. 아마추어 리더, 무기와 군수의 열악, 훈련 부족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가족, 측근, 동네사람과 같이 자신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과 시작하기 때문이다.

 

게릴라전을 시작하면 자신들이 가진 무기는 열정과 단결력뿐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보안도 중요하다. 그러니 서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혹은 한 마을이나 지역 주민 같은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사람들로 모인다. 아주 합리적 대책 같지만 대부분의 게릴라 부대가 실패하는 이유다.

 

이런 부대는 인정에 구속돼 냉정한 작전, 적절한 인재 선발, 엄격한 군기를 적용하기 어렵다. 마을 주민같이 이해공유자들이 모이면 그들은 마을 주민의 이해와 세계관에 어긋나는 전술, 예를 들어 마을 전체에 불을 지른다거나 타 지역에 가서 전투를 한다거나 다른 부대와 공조하는 전술을 채택하지 못한다. 대게릴라전에 경험이 있는 군대가 이런 약점을 파고 들면 게릴라 부대는 쉽게 함정에 빠지고 분쇄된다. 한마디로 감성에 매몰돼 자멸하는 것이다.

 

정기룡의 탁월한 점은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기룡은 게릴라전을 택하면서 가족, 친지, 주민, 학연으로 구성하는 다른 의병부대와 달리 기마술이 뛰어난 소수의 엘리트 병사들을 모았다. 그리고 기병의 속도를 이용한 치고 빠지는 작전으로 작고 상대적으로 쉬운 전술적 승리를 축적해갔다. 이 과정에서 병사들의 사기와 전투능력은 향상돼 갔다. 정기룡 부대의 명성이 높아지자 지원자도 늘었다. 정기룡은 엘리트주의를 고수하지 않았다. 문호를 조금씩 개방해 규모를 키워 전투력이 향상돼 가는 수준에 맞춰 게릴라전에서 정규전으로 발전시켜갔다. 당시 일본군은 후방에 배치할 병력이 부족했다. 각지에서 조선의 의병에 의한 게릴라전도 발생하자 그들은 가능한 큰 도시에 병력을 집중시켜 거점을 마련하고 가끔씩 소규모 부대를 내보내 주변 지역을 약탈했다.

 

게릴라전에서의 경험으로 정규군 양성

 

1592 11월 정기룡은 상주 용화역에서 막 마을을 약탈하러 들어가고 있는 약탈부대 하나를 포착했다. 기록에는 왜군이 이미 마을에 근접했기 때문에 정기룡이 주민을 보호하기 위해 게릴라전을 포기하고 왜군을 야전으로 유인해 냈다고 한다. 그러나 정기룡은 이미 상주 탈환이라는 목표를 마음속에 세워놓고 있었을 것이다. 상주 탈환을 위해서는 이제 게릴라 부대를 야전군으로 전환시켜야 했다. 그래서 다시 약한 적을 찾았다. 그냥 약한 적이 아니라 정규전을 연습할 수 있는 스파링 파트너였다. 용화역 벌판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정기룡 부대는 승리를 거뒀다.

 

다음 달 드디어 정기룡은 상주성을 탈환하고 상주 목사가 된다. 경상도라는 명칭은 경주와 상주의 첫 글자를 합친 것이다. 그만큼 당시의 상주는 크고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시였다. 상주 목사가 된 정기룡은 이제 게릴라전을 버리고 본격적인 정규군 양성 작업을 시작했다.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게릴라전을 통해 발굴하고 훈련시킨 정예병들을 기간요원으로 배치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어떤 부대보다도 강한 군대를 육성할 수 있었다.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정기룡에게 경상도 28개 지역의 군대를 모두 통솔해 경상도로 진출하는 왜군을 저지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1597년 정기룡은 고령에서 12000의 왜군과 맞붙어 대승리를 거둔다. 이 전투는 임진왜란사에서 기념할 만한 전투였다. 조선 정규군이 전투력과 전술력, 조직력으로 맞대결을 벌여 승리를 거뒀기 때문이다.

 

임용한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yhkmyy@hanmail.net

필자는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에서 한국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과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 등 다수의 책과 논문을 저술했다.

 

 

 

 

 

 

동아비즈니스리뷰 334호 세계관의 세계 2021년 12월 Issue 1 목차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