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경영

‘남군 최고의 사령관’ 포레스트를 아시나요?

92호 (2011년 11월 Issue 1)

 
 
 
 
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기 바랍니다.
 
 
미국 남북전쟁(1861∼1865) 당시 남군 총사령관이었던 로버트 에드워드 리(Robert Edward Lee) 장군은 오늘날까지도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장군 중 한 명이다. 그 이유는 그가 탁월한 전술가인 동시에 평생 부하들에게 소리 한번 지른 적이 없다고 할 정도로 고결한 인격자였기 때문이다.
 
만년에 한 기자가 리 장군에게 남군 장군 중 최고의 지휘관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이 존경받는 노신사는 네이든 베드포트 포레스트(Nathan Bedford Forrest)라고 답했다. 그것은 정말 의외의 대답이었다. 포레스트는 나중에 정규군 지휘관이 되기는 하지만 원래 게릴라전으로 유명해진 장군으로 전쟁 전에는 살인자에 노예상인이었고 훗날 KKK단의 초대 회장을 지내기까지 했다.
 
남북전쟁 중 가장 비극적 사건 중 하나로 꼽히곤 하는 1864년 포트 필로(Fort Pillow) 학살은 포레스트의 명성에 특히 치명적인 사건으로 꼽힌다. 당시 정규군 소장으로 진급한 포레스트는 북군이 항복 권유를 거부하자 한 놈도 살려두지 말고 모조리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전투 중에는 여러 가지 비인간적인 일이 발생하지만 같은 미국 시민끼리의 전쟁이었던 남북전쟁에서 이런 식의 학살극은 매우 드문 사례에 속한다. 게다가 그중 상당수는 흑인병사들이었다. 만년에 포레스트는 과거를 참회하고 흑인인권운동에 헌신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오점이 있는 인물을 리 장군이 최고의 지휘관으로 꼽았다는 자체가 신기한 일이다.
 
극단적 평가를 받는 남군 지휘관 N.B. 포레스트
때로는 악명 높은 KKK단의 상징으로, 때로는 혁신적인 전략가로 극단적 칭송과 비난을 동시에 받는 포레스트는 원래 자수성가형 사업가였다. 테네시주에서 가난한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30대에 벌써 남부에서 손꼽히는 부호가 됐다. 그를 부자로 만들어준 사업은 바로 노예 매매였다. 남북전쟁이 터지자 그는 남군에 입대했다. 정규 군사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그였지만 그는 천부적으로 탁월한 전술가였다. 그리고 그의 전술에는 대부분 귀족 출신이었던 군 장교들에게는 없는 독특한 현실감각이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정규전을 시도하지 않았다. 당시 정규전은 그야말로 살육전으로 노예 매매와도 비길 수 없는 잔혹한 살인극이었다. 그는 자신의 사재를 털어 말을 구입하고 병사를 모아 기병대를 창설했다.
 
초기 포레스트의 활동은 500명 미만의 부대를 인솔한 전형적인 게릴라전이었다. 그는 테네시와 미시시피강 연안을 오르내리며 게리라전을 폈다. 초기에 그가 북군에 입힌 피해가 크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성공사례와 영웅담은 북군에게는 짜증나는 일이었다. 북군은 포레스트에게 현상금을 걸었고 북군 기병대는 포레스트를 사냥하기 위해 골몰했다. 포레스트는 몇 번의 위기를 맞았지만 그때마다 멋지게 빠져나가며 영웅담을 추가해갔다.
 
포레스트는 언제나 열세인 병력으로 다수의 적을 격파해 명성을 얻었다. 다만 그의 이야기는 언제나 영웅담 위주의 기사여서 전투의 전황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대개의 이야기는 병력이 열세인 상황에서 대담하게 적군의 중심을 파고들어가 적을 궤멸시키거나 절묘한 계략으로 승리하는 것으로 돼 있다.
 
탁월한 기병대장이자 전략가
포레스트의 대담한 공격과 성공에는 배경이 있다. 첫째, 남부와 북부의 사회적 환경 차이로 포레스트 부대만이 아니라 전반적인 기병의 자질은 북군보다 남군이 높았다. 북군 기병대가 남군을 압박할 수준으로 올라오게 되는 시점은 서부 출신의 기병대가 대거 투입되고 북군이 연발사격이 가능한 스펜서 기병총을 확보하면서부터다. 그러나 그 사이에 남부 기병대는 수많은 전투 경험을 쌓았다. 특히 기마술과 기병전술은 병사의 숙련도가 큰 영향을 미쳤다. 포레스트의 대담한 전술은 이런 바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지휘관으로서 그는 단순한 게릴라 지도자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전쟁 발발 1년 만에 장군으로 진급해 정규군을 지휘했다. 전술적 안목도 뛰어났다. 그가 게릴라전에 주목한 이유는 현대전에서 기동과 보급의 가치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이 전력을 평가할 때는 병력, 무기 등을 본다. 이것은 고정된 평면에서 비교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군이 적보다 빠르게 움직인다면 평면에 놓여져 있는 적의 병력과 아군이 실제 접촉하는 병력은 다르다.
 
기동의 개념을 전술과 작전에까지 확대하면 적의 후방도 거리낌 없이 침투·횡단하고, 수송선, 수송부대, 전신, 철도를 공격해 적의 결정적인 공세를 좌절시키거나 연기할 수 있다. 특히 이런 요소들은 현대전에서 더욱 중요해졌다. 과거 전쟁에서는 식량만 보급하면 전투를 진행할 수 있었고 식량은 현지조달도 가능했다. 그러나 현대전은 탄약, 의약품의 보급 없이는 전투가 불가능하다. 탄약은 금세 소진되고 현지조달도 불가능했다.
 
포레스트의 성공은 남군 기병대에 전쟁을 수행하는 방법을 가르쳐 줬다. 1862년 북군 총사령관인 그랜트 장군이 야심 차게 기획했던 빅스버그(Vicksburg) 공격은 시작도 하지 못하고 좌절됐다. 포레스트와 남부 기병대가 공세를 위해 비축한 물자를 모조리 탈취해 버렸기 때문이다.
 
전쟁이 지속되면서 포레스트는 점점 더 유명해졌다. 그의 활약에 골머리를 썩던 북군은 포레스트를 잡기 위해 특별부대를 편성해 추격하기도 했다. 또 그의 전술을 배워 똑같은 후방기습과 파괴를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포레스트의 명성을 더 올려 주었다.
 
 
귀족 장교들의 판에 박힌 ‘상식’을 벗어난 전략 구사
포레스트는 삼국지에나 나올 듯한 기발한 계략으로 추격대를 격파했고 북군 습격부대를 패퇴시켰다. 한번은 포레스트 부대가 북군 부대 전면에 나타났다. 북군은 지형상 유리한 곳에 자리 잡고 있어서 자신만만했다. 이런 경우 공식처럼 상대는 정면에서 공격해왔다. 하지만 포레스트는 정면 공격을 하는 척하면서 측면과 뒤에서 기습했다.
 
 
이 기습의 성공비결은 표면적으로는 속도였다. 일단 표준적인 전투형태를 갖추고 그 다음에 다시 판단하는 지휘관의 판단방식을 역이용한 것이다. 하지만 이 전투를 속도만으로 이해하기는 힘들다. 사실 포레스트의 전투담을 보면 포레스트가 영리한 것인지 상대방이 멍청한 것인지 판단이 안서는 경우가 있다. 1863년 북군의 스트레이트 대령은 3000명의 병력을 가지고 1000명인 포레스트군에 패배해 포로가 됐다. 포레스트군은 파상적이고 겁 없는 공세로 북군을 겁먹게 했다. 적군이 다수라고 믿은 스트레이트는 도주했다. 마지막 전투에서 포레스트는 두 대밖에 없는 대포를 여기저기 출몰시켜 훨씬 많은 것처럼 보이게 했는데 스트레이트는 여기에 감쪽같이 속아 넘어가 항복했다.
 
북군 지휘관의 아둔함을 비웃을 게 아니라 그들이 왜 이렇게 쉽게 속아 넘어 갔는지를 분석할 필요가 있다. 남북전쟁 당시 정규군 장교들은 귀족 교육을 받은 장교이거나 세상 물정을 모르는 상류층 인사였다. 그들은 판에 박힌 사고를 따르고 관습을 존중했다. 정규군 장교들은 지형과 병력으로 전황을 판단하고 전투장면을 예상했다. 그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기에 이 능력은 군 지휘관의 능력이자 자부심이었다. 하지만 그 덕에 전투방식, 판단방식도 언제나 뻔했다. 귀족 장교들끼리 만났을 때는 스포츠 경기를 하듯 적들 간에도 서로 존중하며 자신들의 방식대로 싸웠다. 하지만 포레스트는 그것을 알고 적을 이용하고 조롱했다.
 
포레스트의 대담함과 상식 파괴의 전형을 보여준 전투가 1862년에 벌어진 파커스 크로스로즈(Parker’s Crossroads) 전투다. 그는 그랜트 장군의 특명을 받고 자신을 추격해온 북군 2개 연대에 앞뒤로 포위당했다. 이들은 북군 기병대 중 최강 부대로 남군 스튜어트 기병대마저 격파해 북군의 자존심을 회복시켜준 설리번 장군의 휘하 부대였다. 우연이었는지 계획적이었는지 모르지만 처음에는 1개 연대가 포레스트 기병 여단의 진로를 막았다. 이번에는 포레스트도 정규전을 답습해 양쪽은 평원에서 전통적인 전투를 벌였다. 동일한 지형 조건에서 비슷한 병력끼리 맞붙었을 때는 대체로 전투 경험이 앞서는 남군이 유리했다.
 
북군이 밀리기 시작하자 남군은 최후의 일격을 준비했다. 기병 돌격이었다. 그때 북군의 다른 연대가 뒤에서 나타났다. 노련한 포레스트의 병사들도 당황했다. 그러나 포레스트는 서슴지 않고 명령을 내렸다. “양쪽으로 돌격!” 남군 기병이 역으로 돌격해 오자 놀란 북군은 당황했다. 그들이 주춤거리는 사이에 포레스트는 병력을 추슬러 옆으로 탈출했다. 이 전투는 전쟁사에 유래가 없는 전·후방 동시 돌격이라는 기사로 매스컴을 탔다.
 
최선의 방책은 교본에 있지 않다
하지만 이 역시 포레스트의 빠르고 현실적인 판단력과 북군 지휘관의 뻔하고 빈약한 상상력의 결과였다. 포레스트의 장점은 항상 주어진 상황에서 교본에 적힌 공식을 찾는 게 아니라 최선의 방책을 찾는 것이었다. 포레스트는 완전히 허를 찔려 앞뒤로 포위됐던 상황이었다. 교과서대로라면 항복하거나 병력을 분할해 양쪽을 상대한다. 이때 전면을 향해 배치돼 있는 여단을 뒤로 돌려 적을 상대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단순히 총구와 대포를 뒤로 돌린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고 병사와 대포 하나하나를 모두 재배치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 이 과정에서 혼란이 발생하고 심하면 자멸한다.
 
재배치는 불가능하다. 당장 활용할 수 있는 부대는? 바로 기병이었다. 기병이 적을 무너뜨릴 수는 없지만 시간은 벌 수 있다. 이것이 포레스트의 사고방식이다. 하지만 판에 박힌 지휘관들은 재배치의 속도에 사활을 걸 것이다. 북군 지휘관도 그 순간을 상상하면서 접근했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북군 지휘관은 포레스트의 뒤를 물었을 때부터 승리를 확신했을 게 뻔하다. 하지만 포레스트가 북군 지휘관의 입장이었다면 전 부대를 적군의 뒤로 천천히 전진시키는 대신 기병으로 포대를 습격해서 파괴하고 적을 동요시켰을 것이다. 후대에 롬멜과 패튼은 이런 작전으로 전설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리 장군이 만년에 굳이 포레스트를 최고의 지휘관을 치켜세운 이유는 귀족 장교들의 경직된 사고가 전쟁의 제일 큰 적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전쟁이든 경영이든 최고의 효율과 기능성은 최고의 이론과 방법을 채용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현실에서 가장 적합한 방법을 창출하는 데서 나온다. 이론과 성공사례란 이 창조를 위한 훈련과정에 불과하다. 그러나 적어도 남북전쟁기에 교육과 관습, 장교집단의 신분적 특수성은 이 목적을 오히려 방해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런 위험에 빠져 있지 않은지 언제나 경계하고 점검해야 한다.
 
 
임용한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yhkmyy@hanmail.net
필자는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에서 한국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과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 등 다수의 책과 논문을 저술했다.
 
동아비즈니스리뷰 334호 세계관의 세계 2021년 12월 Issue 1 목차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