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은 테스코와 세인즈버리 등 세계적인 유통기업을 배출한 나라다. 런던시내 곳곳에 대기업 슈퍼가 있고 외곽에는 대형 할인점이 성업 중이다. 대형 체인점과 대기업 브랜드 상점들이 득세하면서 도심거리가 ‘붕어빵’ 거리로 변한다는 비판도 나오지만 판박이 기업형 유통망이 따라할 수 없는 멋과 매력으로 여전히 번성하는 재래시장도 곳곳에 있다.
런던을 가로지르는 템스강 남쪽 서더크 지역엔 ‘런던의 부엌’으로 불리는 버러마켓이 있다. 주빌리마켓, 그린마켓, 미들마켓 등 크게 3개 구역에 130여개 상점이 들어선 식료품 전문시장이다. 11세기 이전부터 런던브리지 밑에서 거래를 하던 상인들이 13세기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상권이 형성되고 시장이 열렸다. 18세기 의회가 시장을 폐쇄했지만 지역 주민들이 기금을 모아 땅을 구입해 시장을 다시 열었다. 이곳은 목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딱 3일간 열리는데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관광객과 장보러 나온 시민들로 늘 북적인다. 영국의 잘나가는 재래시장, 버러마켓은 한국의 시장과 어떻게 다를까.
첫째, 시장의 상인들은 재료를 직접 생산하는 농부들이거나 도매상들이다. 한국과 달리 젊은 상인들이 많다. 유기농 생산자조합이 쓰인 앞치마를 두른 농부 출신 상인들이 직접 채소를 판매하거나 자신들이 만든 잼, 소시지, 치즈가 왜 맛있는지,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친절하게 설명하는 상인들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직접 재배하거나 사오는 재료들이기 때문에 고객들에게 들려줄 이야깃거리도 풍성하다. 대형마트에서 판매하는 대기업 브랜드 식품을 이곳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둘째, 시장 내에 집객(集客) 효과가 큰 음식과 음료가 풍부하다. 식재료 시장이지만 각 국의 다양한 먹을거리를 즉석에서 만들어 파는 상인들이 많다. 영국 전통 음식인 피시앤칩스는 물론 스페인 음식인 파에야, 독일 소시지, 태국 커리 등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다양한 테이크아웃 음식을 판매한다. 시내 유명 레스토랑과 커피 전문점인 몬마쓰 등이 들어서 있다. 장을 보고 떠나는 게 아니라 먹고 마시며 잠시 머무르는 곳이 된 것이다. 셋째, 고객층이 다르다. 한국은 중장년 주부들이 시장의 주류 고객이다. 하지만 버러마켓은 음료와 음식 메뉴가 풍부해 지역주민 이외에도 관광객과 주변 사무실의 직장인 등 외부 고객들이 많다. 점심시간에는 주변 회사에서 몰려나온 직장인들이 시장에서 판매하는 테이크아웃 음식을 사서 거리에 서서 먹거나 시장 옆 성당 마당의 벤치에서 삼삼오오 모여 끼니를 때우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넷째, 디자인과 예술이 있다. 버러마켓은 강변의 철로 밑에 들어서 태생부터 깔끔한 곳이 아니다. 대형 주차시설도 없다. 하지만 독특한 공공 디자인으로 시장의 우중충한 모습을 털어냈다. 녹색으로 통일한 시장 시설은 19세기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골목 벽은 거리 예술가의 공공예술로 치장했다. 시장에서는 거리음악가들의 공연도 종종 열린다. 다섯째, 공개 경쟁한다. 버러마켓은 시장의 일부 가판을 새로운 상인들을 위해 제공한다. 시장 측에 상인이나 판매하려는 상품이 기존 상인들과 어떻게 다르며 독특한 경쟁력이 있는지를 설명하는 신청서를 접수하면 된다. 시장 측은 심사를 거쳐 새로운 피를 수혈하고 시장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여섯째, 엄격한 품질관리다. 시장 자체적으로 전문가 패널을 구성해 상인들이 판매하는 식재료를 정기적으로 검사하고 맛까지 평가한다. 표준을 지키기 어려운 영세 상인에게는 노하우를 전수해준다. 시내 유명 레스토랑 주방장도 이곳에서 식재료를 구입하는 이유다. 일곱째, 자원봉사자가 이끄는 시장 거버넌스다. 버러마켓은 비영리자선조직이 운영하는 독립시장이다. 시장조직의 회장은 기업금융 분야 석사학위를 가진 사업가이며 이사들은 식품 관련 대학교수, 공인회계사, 국제금융 전문가, 의료인, 작가 등 사회 각 분야의 전문가들로 구성돼 있다. 모두 자원봉사자다. 실제 시장 운영은 전략, 재무 회계, 운영, 마케팅 및 홍보 등의 각 분야의 전문 스태프들이 맡는다. 여덟째, 적극적인 커뮤니케이션이다. 시장 홈페이지에는 시장에 찾아오는 방법과 지도, 요일별로 문을 여는 가게, 시장의 역사와 상인들이 공개하는 음식 레서피, 시장의 이벤트 일정 등이 자세하게 소개돼 있다. 시장과 상인들의 이야기를 소개하는 무료 계간지인 ‘마켓라이프’도 발행해 배포한다. 아홉째, 시장 자체도 상품이다. 버러마켓은 시장 자체를 마케팅한다. 시장 로고가 들어간 장바구니, 앞치마 등 각종 시장 기념품을 판매한다. 최근에는 지역 농산물과 유기농 채소 등 로컬 푸드 판매를 통한 지속가능한 성장을 전략 방향으로 제시하고 있다. 열째, 명확한 시장의 비전이 있다. 버러마켓의 비전은 지역 주민의 삶의 질을 높이고 고품질 식재료 판매의 명성을 쌓는 것이다. 매년 시장의 잉여 수익을 지역 주민을 위해 환원한다.
재래시장이 가장 두려워해야 할 적은 외부의 공격이 아니고 지역 주민과 소비자의 외면이다. 버러마켓은 대기업이 따라올 수 없는 독특한 경험과 상품을 고객들에게 제공하는 서비스시스템을 구축해 그들만의 시장을 만들어냈다. 위기의 한국 재래시장들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
런던=박 용 기자 par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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