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터 빅셀이라는 작가가 쓴 <책상은 책상이다>라는 책이 있다. 이 책에 나오는 주인공 남자는 반복되는 일상에 지루해하다 문득 사물의 이름을 바꿔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침대는 사진으로, 책상은 양탄자로, 의자는 괘종시계로, 신문은 침대로, 거울은 의자로, 옷장은 신문으로, 사진은 책상으로 이름을 바꾸기로 하고 하나하나 공책에 적어놓는다. 그는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들으면 웃음을 참을 수 없어진다. 예를 들면 “나는 사진에 누워 옷장을 읽는다”는 식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결국 공책을 보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할 수 없게 되고, 그것이 불편해서 집에만 있게 돼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책상은 책상이다>는 현대사회에서 의사소통과 소외의 문제를 다룬 우화라고 할 수 있다.
사실에 근거한 소통의 명료성
사람들이 사물과 현상을 규정하고, 이름을 짓고, 개념화하는 이유는 결국 소통하기 위해서다. 소통하지 않으면 개인은 생산활동에 참여할 수 없고, 집단으로부터 소외된다. 따라서 소통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속성이고 욕구다. 서로 소통되지 않는 개인으로 이뤄진 집단은 단순한 무리일 뿐이다. 같은 대상에 대해 서로 다르게 규정하고, 다른 개념을 갖게 되면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
얼마 전 한미 FTA 비준동의안이 번역오류로 인해 철회된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잘못 번역된 내용 때문에 우리 국민이 어떤 상품의 범주에 대해 잘못된 관념을 가질 수 있다. 우리 기업은 계약서에 쓰여진 대로 성실하게 물건을 만들어 수출을 했는데도, 미국기업이 그 물건이 계약서에 쓰여진 것과 다르다는 이유로 대금지급을 거절한다면 엄청난 손실이 생길 것이다. 사람들은 무엇이든 명료하고 구체적이기를 바란다. 애매모호함은 의사소통 과정에서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에 사람들은 가급적 이를 피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대상에 대해 최대한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가급적 좁게 개념화하려고 노력한다.
작가 김훈은 <칼의 노래>를 통해 이순신 장군의 구체적인 사실(Facts)에 의거한 전황 판단과 일기와 상소에 나타난 소통의 명료성을 예찬한 바 있다. 소설에서 이순신 장군은 임금이나 조정의 윗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필요나 독려 때문이 아니라 바람과 물결의 방향, 아군과 적군의 군선 및 무기의 규모, 병사들의 배부름과 휴식, 싸우고자 하는 사기와 훈련의 충분함에 의거해 전투 개시 여부와 전술의 방향을 결정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또 일기와 상소에는 사건이 일어난 날짜와 시간, 인물들의 됨됨이와 행색, 제반 물자와 관련된 구체적인 수치와 상태 등이 생생하게 묘사된다. 그야말로 사실로서 사실을 말하게 하는 냉철함의 표본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고뇌하고, 안타까워하고, 연민의 정을 갖고, 적에 대해서는 복수심을 불태우는, 살아 있는 인간으로서의 양면성을 보여준다. 이순신 장군의 입장에서 애매모호함은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고 임금에게 치욕을 안긴 무능하고 한심하기 이를 데 없는 벼슬아치들의 특질이었다.
사실과 데이터에 근거하지 않은 추상적인 개념을 가지고 하는 논쟁은 결코 생산적인 결론에 이를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은 추상적인 개념을 가지고 논쟁에 임하는 경우가 많다. 무상급식과 관련한 복지논쟁이 한창일 때 이인실 통계청장은 “복지논쟁 수준이 10년째 똑같다”며 “무상이냐, 아니냐 문제에만 국한하면 안 되고 연령대별로 얼마를 세금으로 내고 얼마만큼 복지로 받는지 계산을 해줘야 한다”는 얘기를 했다. 무조건적인 복지지출의 확대를 주장하면 진보가 되고 복지의 문제점만 줄기차게 지적하면 보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국민 계층별로 세금으로 내는 돈과 반대급부로 받는 혜택, 거기에 따른 만족도, 각각의 복지수단이 갖는 효율성 등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지적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는 여전히 보수와 진보, 좌익과 우익, 서울과 지방, 일류대와 삼류대처럼 서로 대립되는 개념을 만들어놓고 명확한 정의도 하지 않은 채 상대방을 거칠게 한쪽으로 몰아붙이는 식의 논쟁이 활개를 친다. 그래서 내가 속하지 않은 범주에 상대방이 속한다고 얘기하는 것 자체가 욕설처럼 들린다.
우리가 좀 더 생산적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대상에 대해 개념을 정의하고 규정할 때 절대로 아무렇게나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을 정도로 명확하게 해야 하고, 그것에 기반해서 소통을 해야 하며, 구체적인 사실과 사물, 현상이 아니라서 명확히 규정하기 힘들고, 애매모호한 용어는 가급적 쓰지 않아야 한다. 그것이 불필요한 대립과 힘의 낭비를 줄이는 방법이며, 소통을 통해 삶의 질을 높이는 방법이다.
창조성의 시작, 애매모호함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각도에서 한 번 생각해보자. 서로 다른 사람이 어떤 대상에 대해 똑같은 개념을 갖는 것이 쉬운 일일까? 우선 다른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이 어떤 대상에 대해 완벽하게 동일한 개념을 갖기는 정말 어렵다. 예를 들어 유럽에 사는 사람에게 소(Cow)는 고기와 우유, 가죽을 갖게 해주는 존재이지만, 인도에 사는 사람에게 소는 숭배의 대상이다. 생물학적으로는 같은 소이지만 전혀 다른 개념이다.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선물(Present)은 좋은 의미로 사용되지만, 어떤 문화권에서 선물은 거의 뇌물과 비슷한 뜻으로 사용돼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따라서 배경이 다른 사람들이 서로 소통을 할 때는 비록 같은 언어를 가지고 같은 대상을 지칭할지라도 서로 다른 개념을 거론하고 있지 않은지 의심해봐야 한다. 개념정의가 애매하고 불분명할 때도 소통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개념정의에 대해 지나치게 굳은 확신을 가지고 있을 때에도 소통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우리의 생각을 가두는 것이다. 소통하기 위해 규정한 개념들로 인해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실제로 그 사물이나 현상으로부터 떨어져서 독자적으로 굳어질 수 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입을 가리켜 “얼굴의 아랫부분에 위치한 음식을 먹고 말을 하는 데 쓰는 기관”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개념정의에 의하면 “키스를 하기 위한 입”이나 “장애인이 손을 대신해서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입”은 빠져 있다. 휘파람을 불 수도 없으며, 긴 막대로 독침을 쏘아 사냥을 할 수도 없고, 이태리의 유리공예가들처럼 뜨거운 유리 재료를 긴 대롱에 매달아 입으로 불어 아름다운 공예품을 만들어낼 수도 없다. 원래 입은 입이었을 뿐인데, 입이 가진 무한한 변용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칫 입은 그저 먹거나 말을 하는 기능만 수행할 뿐, 그 외에는 아무 쓸모가 없는 존재가 돼버릴 수 있다. 이런 문제를 가리켜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는 ‘기관 없는 신체’의 비유로 설명했다. 신체는 유기체가 규정하는 부분기관들의 필연적인 결합으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변용역량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기관과 신체의 관계를 전체와 부분 간의 필연적인 관계로 상정하는 유기체적인 방식의 조직에서는 신체에서 끊임없이 생성되는 새로운 변용능력을 발견할 수 없다. 능동적으로 무한한 변용의 잠재력을 발휘하는 것이 생명의 본질에 더욱 가깝다는 것이다. 어디 신체뿐이겠는가? 사실을 사실대로 들여다보지 않고, 사람을 포함한 어떤 대상을 예단해 규정하고 비난하고 폄하함으로써 잠재적 변용성을 처음부터 차단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