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조사업체 아이서플라이는 2009년 미국에서 LCD TV를 가장 많이 판매한 업체를 발표했다. 세계 최대 가전시장인 미국 LCD TV 시장 1위는 누구였을까? 바로 비지오라는 낯설기까지 한 신생 대만 기업이다. 비지오는 2009년에 무려 592만대를 팔아 미국시장에서 판매량 기준 1위를 차지했다. 2002년 설립된 비지오는 2003년부터 제품을 내놓기 시작했다. 2003년 1700만 달러였던 매출은 2009년에 25억 달러로 증가해 6년 새 150배 가까이 성장하는 놀라운 성과를 기록했다. 어떻게 이런 성공이 가능했을까?
비지오는 대단위 자체 생산 공장이 없고 혁신 기술을 개발하지도 않는다. 직원 수도 168 명에 불과하며 기획, 디자인, 마케팅 부서에만 몰려있다. 부품은 외부에서, 조립은 생산 전문업체가 담당하는 형식이다. 비즈니스 구조가 이렇다 보니 제조원가를 낮추는 일이 용이해서 경쟁사보다 평균 20∼30%, 최고 50%까지 LCD TV를 싸게 판매할 수 있다. 이를 경영학 용어로 풀이하면 ‘아웃소싱을 통해 네트워크형 비즈니스 모델을 성공적으로 구축했다’고 할 수 있다.
비지오만의 성공 비결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첫째, 평판 TV 산업의 특징을 이용해 최고의 업체들과 네트워킹을 구성했다.평판 TV 산업은 이미 기술 표준화와 모듈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규격과 사양만 정확히 요구하면 그에 따른 기능과 품질을 확보할 수 있다. 비지오는 바로 이 점에 올인했다. 비지오는 LCD 패널과 전자부품은 한국과 대만에서 조달하고 조립은 중국 등 경험 많은 생산전문 기업들에 위탁하고 있다. 아웃소싱의 가장 큰 문제인 품질 저하를 예방하기 위해서다. 부품이면 부품, 조립이면 조립 등 각 가치사슬에서 최고의 기업과만 협력함으로써 품질을 유지하고 있다는 뜻이다.
둘째, 기존 업체들과 다른 판매 채널을 잡았다.보통 평판 TV 제조업체들은 한국의 하이마트나 디지털플라자, 미국의 베스트바이처럼 전자제품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유통채널을 주로 사용한다. 하지만 이런 유통업체들은 생산업체에 상당히 높은 마진을 요구한다. 이에 비지오는 베스트바이 등을 포기하고 코스트코와 같은 창고형 할인매장을 판매 거점으로 잡았다. 유통업체에 들어가는 비용이 줄어드니 판매 가격을 더 낮출 수 있었고, 소비자들에게 싼 가격으로 어필하는 일이 더욱 쉬워졌다. 나아가 비지오는 유통업체에 자사 제품의 패키징과 마케팅 전략까지 과감하게 맡겼다. 생산업체인 자신보다 소비자와 직접 대면하는 유통업체들이 소비자를 더 잘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셋째, 혁신제품을 내놓지 않았다.첨단 제조업 분야에서 후발기업이 선두기업을 따라잡는 방법은 한 가지다. 선두기업이 기술을 개발하고 시장을 창조하면 후발기업은 범용화된 기술 덕택에 낮은 가격의 제품으로 해당 시장에 진입할 수 있다. 이후 점차 브랜드 파워를 쌓아가면 선두기업과 맞먹을 수 있다. 후발기업이자 신생기업인 비지오 역시 이 방식을 충실히 따랐다. 비지오는 단 한 번도 시장을 선도하는 신제품을 내놓은 적이 없다. TV 화면 크기를 키우는 경쟁을 하거나, LED-TV 등을 빨리 출시한 적도 없다. 혁신 제품이 아니라 오직 가격과 품질에서만 우위를 지키며 시장에서 인지도를 쌓는 데 주력했다.
중요한 사실은 비지오가 싼 노동력이 아니라 네트워크로 가격을 낮췄다는 점이다. 자체 핵심 역량은 전혀 없고, 오직 싼 가격만을 무기로 가진 기업은 오래 존속할 수 없다. 유사한 방식의 경쟁자가 나타나면 당해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비지오의 사례는 생산, 기술, 유통 분야의 특정 기술만이 핵심 역량이 아니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우리 회사에 필요한 점을 그때그때 조달할 수 있는 최적의 네트워크를 만드는 능력이야말로 21세기가 요구하는 진정한 핵심 역량이다. 특히 표준화된 모듈 생산단위가 있고 시장이 급변하는 산업이라면, 비지오의 네트워크 비즈니스 모델이 더욱 위력적이다.
21세기에는 그 어떤 기업도 혼자서 모든 일을 다 할 수 없다. 그러기에는 변화 속도가 너무 빠르고 경쟁자도 너무 많다. TV 시장에서 독창적인 네트워크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한 비지오는 성공의 핵심 요인을 제대로 파악한 대표적인 기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