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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그린(Paris green)' 의 그늘

박용 | 56호 (2010년 5월 Issue 1)
녹색은 자연, 조화, 공감을 상징하는 색입니다. 색채심리학자들은 녹색이 감정을 진정시키고 스트레스도 해소시켜준다고 합니다. 이슬람 세계에서 예언자 마호메트를 상징하는 색이 바로 녹색입니다.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UAE), 리비아 등의 국기에는 어김없이 녹색이 쓰입니다.
 
자연과 생명의 색인 녹색은 한때 ‘죽음의 색’으로 불렸습니다. 1814년 독일 슈바인푸르트의 한 염료 공장에서 구리를 비소에 용해시켜 밝은 빛의 ‘구리 녹색’을 합성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자연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 녹색은 ‘슈바인푸르트 그린(Schweinfurt green)’, ‘에머랄드 그린(emerald green)’으로 불렸고 옷감, 벽지, 그림 안료로 널리 쓰였습니다.
 
이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색에는 치명적인 독성이 숨어 있었습니다. 강력한 독약인 비소가 습기에 노출되면서 용해돼 대기 중으로 흘러나왔습니다. 사람들은 이유도 모른 채 쓰러졌습니다. ‘녹색 옷을 입으면 단명(短命)한다’는 막연한 추측이 나돌았지만, 안료의 독성을 의심하지는 못했습니다.
 
아름다운 색감에 매료돼 사람에 미치는 영향과 고민을 도외시한 결과는 치명적이었습니다. 이 안료를 즐겨 사용했던 19세기 인상파 화가인 세잔은 만성 비소 중독으로 당뇨병을 앓았고, 눈이 먼 모네와 정신병을 앓던 반 고흐도 당시 물감에 쓰였던 수은, 납 외에도 비소 중독에 희생됐다고 합니다. 이 물질의 독성이 얼마나 강했으면, 파리의 지저분한 하수구에 서식하는 쥐를 잡는 데 쓰여 ‘파리 그린(Paris green)’이라는 오명까지 얻었습니다.
 
시대가 바뀌어 환경오염과 기후변화에 시달리는 21세기에 녹색이 다시 전성기를 맞이한 듯 보입니다. 녹색은 인류의 미래와 희망을 상징하는 색이 됐습니다. ‘녹색’ ‘그린’이라는 말이 붙지 않으면 구닥다리 아이디어 취급을 받을 정도로 요즘 세상은 온통 ‘녹색 물결’입니다.
 
녹색이 흔해져버린 ‘그린 인플레’의 시대에 문득 ‘파리 그린’의 덫이 떠오릅니다. 기업들이 쏟아내는 화려한 구호 속에서 정작 ‘그린 경영’의 필수 자원인 ‘사람’에 대한 배려와 전략이 많지 않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슬론 매니지먼트 리뷰와 보스턴컨설팅그룹이 최근 세계 각국 기업의 임원과 관리자급 간부 156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90% 이상이 회사가 지속가능 경영을 추구하고 있다고 답했습니다. 하지만 ‘회사가 지속가능 경영을 보여주는 명확한 비즈니스 사례를 개발했다’는 응답은 전체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회사가 이산화탄소나 유독 화학물질 배출 절감, 재활용을 위한 상품이나 프로세스 디자인과 같은 기본적인 지속가능 경영 전략을 실행에 옮기고 있다는 응답도 절반 이하였습니다. 이는 겉으로는 ‘그린’을 외치면서 실제로는 이를 실행에 옮기지 못했거나, 조직원들의 인식과 태도를 바꾸는 데 실패했다는 뜻입니다.
 
조직 구성원에게 ‘그린 경영’이 주는 비즈니스의 편익을 제시하고, ‘녹색 인재’와 ‘그린 팀’을 키우기 위한 체계적인 교육 훈련 프로그램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그린 경영’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합니다. 이는 ‘무늬만 그린’이라는 인식으로 이어져 브랜드 신뢰도를 갉아먹는 ‘녹색괴물’이 되고, 조직 내부에 불필요한 비용과 전략적 혼선만 초래하는 ‘독’이 되지 않을까요. 사람이 빠진 ‘그린 경영’은 ‘파리 그린’의 그늘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 박용 박용 | - 동아일보 기자
    -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부설 국가보안기술연구소(NSRI) 연구원
    - 한국정보보호진흥원(KISA) 정책연구팀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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