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무제가 다스리던 시절, 한나라 북쪽 최북단 국경 지역. 한나라 기병 수십 기가 한 명의 고관 행차를 호위하고 있었다. 궁전 환관이던 그가 황량한 이 지방까지 온 이유는 예전에 사회주의 국가의 정치장교 같은 임무를 맡았기 때문이었다.
그때 흉노 기병 3명이 나타나 행차를 막았다. 고관은 호기를 부려 그 3명을 잡으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전투가 벌어지자 엉뚱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한나라 기병들은 그 흉노 기병의 근처도 따라붙지 못했고, 흉노 기병은 월등한 기동력과 활 솜씨로 행차 주변을 맴돌면서 한나라 기병들을 닥치는 대로 해치웠다. 나중에는 그 고관마저 화살에 맞았다. 한군은 거의 전멸했고, 혼비백산한 고관은 간신히 목적지였던 한군 진지로 도주했다.
고관의 사정을 들은 기지 사령관 이광(李廣)은 당장 기병 100기를 차출해서 출동했다. 이 기병들은 남다른 실력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흉노 용사 3명을 끝까지 추격했다. 이광은 기병들과 함께 그들을 포위하고 자신이 직접 활을 쏘아 2명을 사살하고 1명을 포로로 잡았다.
이광은 진시황의 용장 이신(李信)의 후예였다. 키가 크고 팔이 길어 활의 대가였다. 맹수를 때려잡아 죽인 적도 있다. 한무제가 흉노 정벌을 시작하자 최전선에 나가 흉노와 싸웠다. 그의 부대는 금세 탁월한 명성을 얻었다. 이광은 판단력이 뛰어나고 대담한 지장이자 용장이었다.
야전형 사령관답게 그는 쓸데없이 병사를 괴롭히지 않았다. 흉노가 사는 사막으로 쳐들어가면 물과 군량이 늘 부족했다. 물을 발견하면 모든 병사가 마신 후에 자신이 마셨고, 병사들이 식사를 끝낸 후에야 자신도 식사를 했다. 그의 군대는 요란하게 대형을 짜서 움직이는 법도 없었다. 그는 이동하거나 야영할 때도 야전 규범을 들이대면서 막사 간격을 맞춰라, 경계수칙을 지켜라 하며 병사들을 들볶지 않았다. 야영지에서 병사들은 자유롭게 쉬고 편하게 잤다.
그렇게 하면 병사들에게 인기는 좋겠지만, 언제고 흉노의 기습을 당해 낭패를 볼 거라고 장담하는 장군들도 있었지만, 그의 군대는 단 한 번도 기습을 당하지 않았다. 그 비결은 철저한 수색과 정찰이었다. 그의 병사들은 뛰어난 능력을 지녔고, 원거리 정찰을 효과적으로 수행했다. 이광이 야전 규범과 행정 절차를 우습게 본 이유는 전쟁터에서 진정으로 필요한 것과 효과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탁월한 사격 군기를 가진 이광의 부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군대 수준을 결정하는 절대적 기준 중 하나가 사격 군기다. 한국전쟁 때 미군 해병대는 야간 전투가 끝나고 날이 밝으면 반드시 적이 얼마나 접근한 뒤에 자신들이 사격을 시작했는가를 확인하고, 자랑스럽게 그 거리를 기록하곤 했다. 이광의 군대도 사격 군기가 대단하기로 유명했다. 그리고 이광은 언제나 스스로 솔선수범해서 적과 싸울 때나 호랑이가 달려들 때도 최대한 끌어들인 후에 발사를 했다. 덕분에 적과 호랑이로부터 여러 번 부상을 당했지만, 그는 이 방식을 중단하지 않았다.
흔히 용장 밑에 약졸이 없다고 하지만, 지휘관이 거칠고 용맹하다고 부하들이 저절로 강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광처럼 자신을 절제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전투 시범과 모범을 스스로 보여주는 장군이 진짜 용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병사들은 그를 신뢰했고, 흉노는 이광을 두려워했다. 신뢰하는 지휘관을 둔 병사들이 쓸데없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필요한 훈련에 집중하니 이들의 역량 수준은 매우 높아졌다. 그 수준을 보여준 사건이 바로 위에 든 일화이다.
이광은 이런 능력과 공적으로 40년간 고위 관료로 재직하며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이상하게 모든 관료의 로망인 제후로 승진하지 못했다. 평화 시에는 그의 명성을 두려워한 흉노가 감히 접근하지 않았다. 흉노 정벌을 떠나 한군이 대승을 거둘 때면 이상하게도 이광의 부대는 특별한 공적을 세우지 못했다. 어쩌면 그의 탁월한 능력 때문에 여러 사람의 시기를 받고, 뇌물도 바치지 않고 청렴 강직해서 포상을 제대로 받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런 억울한 상황을 타개하려면 대단한 위험을 감수하고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공을 세우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의 부대가 적진 깊이 들어가면 본대가 늦거나 적의 대군에게 포위되어 전멸을 당하는 불운이 2번이나 발생했다. 한번은 4000명의 군대로 4만 명의 적군에게 포위되었다. 이광은 결사대 수십 기를 돌격시켜 적진을 휘젓고 적을 반으로 갈라놓았다. 이 돌격대의 지휘관은 그의 아들 이감(李敢)이었다. 이감은 돌아와 이렇게 말했다. “흉노도 별거 아니군.” 기병 전력에서 언제나 열세였던 한나라 기병이 감히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이광과 그의 기병은 사격과 기마술에서 흉노에게 뒤지지 않았다. 이감의 활약에 자신감을 얻은 병사들은 원진을 치고, 결사적으로 대항하기 시작했다. 화살이 떨어지고, 전사자가 절반이 넘었지만 그들은 굴복하지 않았다. 다음 날 늦게 한군의 본대가 도착할 때까지 그들은 격전을 벌이며 진을 사수했다. 그러나 살아남은 병사는 극소수였다.
오늘날 같으면 영웅이 되었을 전투였지만, 그는 병사들을 전멸시킨 죄로 포상을 받지 못했다. 늘 이런 식이었다. 능력이 그보다 못하고, 어쩌다 한 번 흉노 정벌에 참가한 사람은 공을 세워 제후가 되었지만, 원정마다 빠지지 않고 참여했고, 누가 보아도 최고 장군인 그는 제후가 되지 못했다. 하물며 그의 부하들 중에서도 수십 명이 제후가 되었지만, 정작 자신은 제후가 되지 못했다.
BC 119년 한나라는 최대 규모의 흉노 정벌을 기획했다. 흉노 정벌의 영웅인 위청(衛靑)과 곽거병(去病)이 지휘를 맡았다. 흉노 정벌의 개척자이면서도 곽거병에게 밀리고 있던 위청은 이번 원정이 자신의 명예를 만회할 최대이자 최후의 기회임을 알았다. 흉노의 황제격인 선우가 곽거병을 피해 위청군을 노리고 있다는 정보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선우 위치까지 확보한 위청은 군대를 나누어 진격을 구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