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가 페르시아 제국과 맞붙은 페르시아 전쟁은 전설적인 전투를 여럿 탄생시켰다.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마라톤 전투다. 기원전 490년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는 지금의 소아시아(터키) 연안에 있는 그리스 식민지의 반란을 제압하고, 그리스 본토를 공략하기로 결심한다. 그리스로 향하는 페르시아 함대의 선봉은 유명한 아테네의 참주였던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아들 히피아스였다. 부친이 실각한 후 그는 페르시아로 망명했다가 페르시아 군을 끌고 돌아왔다.
히피아스가 안내한 페르시아 함대의 상륙 지점은 아테네 북동쪽 40km쯤 되는 지점에 있는 마라톤 평야였다. 마라톤 평야는 길고 평평한 해안선을 지니고 있었다. 평야 북쪽에는 현지 주민들이 ‘개꼬리’라고 부르는 가늘고 기다란 석호가 있어서 더 이상 나무랄 데 없는 방파제를 만들어주었다.
공포에 휩싸인 아테네
페르시아 군이 접근하자 아테네는 공포에 휩싸였다. 이 전쟁의 결과를 이미 알고 있는 우리들은 아테네의 공포를 이해하기 힘들다.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차이는 흔히 말하는 거인과 어린아이보다도 더욱 극심했다. 우리들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 대한 경외심 덕분에 그리스의 이성과 시민정신 역시 과도하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좁은 산곡을 따라 수백 개의 도시국가(폴리스)로 쪼개져 있던 나라인 만큼 그리스 인의 사고와 세계관은 지극히 편협하고, 한심했다. 그리스 인들이 처음 페르시아 제국과 접촉했을 때 그들은 페르시아 제국의 크기를 이해할 수 없었다. 페르시아에 대한 그리스 인의 당당함은 에게 해 밖의 세계에 대한 무지의 소산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리스 군의 무장과 전술은 그리스의 산악지대에서 폴리스 간의 힘겨루기에만 적합했다. 그들은 1000명 이상의 군대를 동원하기도 힘들었다. 청동갑옷과 방패로 무장하고 방진을 이룬 보병대는 고대 세계에서 최강의 수비력과 전투력을 자랑했지만, 기병도, 제대로 된 궁수도 없었다. 그들의 요새도 담장 수준에 불과했다. 청동보병은 적이 앞에 있을 때만 제대로 싸울 수 있다. 측면과 후면은 무방비 상태였고, 기동력은 최악이었다. 평원에서 페르시아 기병이 측면과 후면으로 공격해 들어오면 손을 쓸 수가 없고, 궁병대가 화살 공격을 하면 비 맞듯이 서서 맞아야 했다.
후대 사람들은 그리스가 페르시아를 이긴 힘은 개개인의 자발적 의지와 참여, 희생을 끌어낸 그리스의 시민정신과 민주주의라고 포장했다. 하지만 이는 과장된 이야기다. 페르시아 전쟁 내내 아테네의 민주주의와 시민정신이 보여준 이기주의와 야비함이란 ‘민주주의’에 회의를 불어넣기에 충분했다. 아테네의 위대한 지도자의 아들이 페르시아 군을 끌고 쳐들어온 것도 그렇지만, 마라톤 전투의 영웅 밀티아데스와 살라미스 해전을 이끈 테미스토클레스도 전쟁이 끝나자마자 시민들에게 배신당해 몰락하거나 페르시아로 망명해야 했다.
핵분열 상태의 그리스
그리스 인은 모래알 같았다. 그리스의 폴리스는 항복하자는 도시와 싸우자는 도시로 분열됐다. 엄밀히 말하면 핵분열 상태였다. 싸우자는 도시들도 연합전선이나 동맹 체제를 전혀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테네를 도와 이 싸움에 참전한 도시는 ‘플라타이아이’라는 작은 소도시뿐이었다. 그들이 톡톡 털어서 보낸 병력은 겨우 800명이었다. 마라톤 전투 후 현장에서 전사자들의 무덤을 만들었는데, 아테네 인들은 플라타이아이 전사자 11명을 위한 별도의 작은 무덤을 따로 만들었다. 이것이 플라타이아이 인에 대한 감사의 표시인지 뿌리 깊은 지역주의의 소산인지는 모를 일이다. 이 정도 지역주의는 그나마 낫다. 아테네는 10개의 부족으로 구성된 국가여서 군대 지휘도 10명의 지휘관이 하루씩 돌아가면서 맡았다.
아테네 군이 마라톤으로 출발한 날, 필리피데스라는 아테네의 유명한 달리기 선수가 그리스 반도 반대편의 도시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이틀 만에 225km를 주파한 그는 스파르타에 도착해서 원군을 요청했다(이 필리피데스의 이야기가 변형되어서 마라톤의 기원이 되었다). 하지만 필리피데스는 눈을 의심해야 했다. 스파르타 사람들은 신나게 놀고 있었다. 그때가 축제 기간이었기 때문이다. 스파르타는 원군 파병에 동의했지만 출발은 1주일 후로 미루어졌다. 하필 축제기간 동안 전쟁을 금지하는, 평화의 축제가 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테네 군이 페르시아 군과 대치한 곳은 마라톤 평야 남쪽, 산과 평야와 바다가 만나는 협로였다. 마라톤에서 아테네로 가는 길은 두 곳이 있었다. 하나는 해안을 따라 남하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 길을 따라오다가 서쪽으로 우회전해서 계곡을 넘어가는 길이었다. 이 두 길이 나뉘는 계곡 입구 또는 이 교차로를 내려다보는 비탈 위에 아테네 군이 포진하고 있었다. 어느 길로 진행하든 페르시아 군은 좁은 산곡의 유리한 위치에 자리한 그리스 군을 먼저 격파해야 했다.
그리스 군은 산비탈에 참호를 파고, 좌우에 장애물을 설치해서 기병의 접근을 막았다. 페르시아 군은 아테네 군의 정면을 공격할 방법이 없었다. 페르시아는 용맹과 야성을 자랑하는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보병을 보유했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경무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