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2세기 한 무제는 흉노와 총력전을 펼친 끝에 흉노를 고비 사막으로 몰아냈다. 이것은 중국 역사에서도 의미 있는 사건이었지만, 최초의 세계사적 사건이기도 했다. 서쪽으로 이동해간 흉노족(훈족)으로 인해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일어나 로마제국이 멸망하고, 오늘날 유럽 각국의 원형이 탄생했다. 한 무제는 흉노를 협공할 동맹국을 찾기 위해 장건(張騫)을 서역으로 파견했는데, 장건의 모험은 실크로드를 개척하는 계기가 됐다. 지구사적 관점에서 볼 때, 이보다 더 극적인 사건이 있을까?
흉노는 중국 북방에 거주하던 유목 민족이다. 단일 민족은 아니고 몽골과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중앙아시아의 유목민까지 포함한 혼성 국가였다. 흉노 정벌은 한나라 입장에서 보면 대단한 모험이었다. 흉노는 유목 민족이고 광범위한 지역에 흩어져 있어 타격을 줄 전략 거점이 적고, 흉노의 왕과 주력을 포착하기도 힘들었다. 풍토병과 낮은 의학 수준 때문에 한나라 군대는 1년 이상 지속적인 작전을 수행할 수 없었다. 말도 버티지 못해 전쟁에 동원한 말의 80%가 죽거나 부상으로 버려졌다. 한군이 진격하면 흉노는 마을을 비우고 도망갔다가 재집결해 한군의 퇴로를 끊거나 소부대를 포위했다. 따라서 한군은 흉노족을 제대로 찾지도 못했으며, 황량한 초원을 헤매고 다니느라 엄청난 전비를 들여야 했다.
전형적인 기마 민족인 흉노는 인구가 적어도 강력한 전투력을 갖추고 있었다. 유명한 진시황의 병마용(兵馬俑)을 보면 기병 대신 전차부대가 있다. 기원전 3세기까지만 해도 중국군의 기동 전력은 기병이 아닌 전차였다. 병마용을 만들 때쯤부터 기병이 크게 육성되지만, 태어날 때부터 말과 함께 자라는 유목 기병의 기마술과 활 솜씨에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밭을 갈고 전차를 끌던 투박한 말들은 오늘날까지도 세계 최고의 전마로 명성을 날리는 날렵한 아랍종과 몽골 말을 당할 수 없었다. 흉노 정벌 후반기, 한 무제는 하루에 천 리를 달리고, 달릴 때는 피땀을 흘린다는 한혈마(汗血馬)를 구하기 위해 중앙아시아 원정을 감행했다. 이 전쟁은 가끔 ‘말 몇 마리 때문에 일어났다’고 희화화되기도 하는데, 그것은 한군의 말로 인한 스트레스를 모르고 하는 소리다. 한군의 정예 기병 100명이 3명의 흉노 기병에게 몰살당한 적도 있었다.
진정한 영웅으로 부상한 곽거병
힘들고 무모했던 전쟁은 많은 영웅을 탄생시켰다. 최초의 영웅인 위청(衛靑)은 노예 출신의 양치기였다. 기녀였던 이복누이 위자부(衛子夫)가 잔치에서 한 무제의 눈에 띄어 후궁이 되자, 이 인연으로 장군이 됐다. 기원전 129년부터 기원전 119년까지 위청은 일곱 번이나 출정해 큰 성공을 거뒀다. 오르도스로 출정했던 기원전 124년의 네 번째 원정에서 그는 흉노왕의 막사를 기습적으로 포위해 왕족 10명과 남녀 1만5000명을 포로로 잡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이 전쟁의 진정한 주인공은 따로 있었다. 기원전 123년 위청의 여섯 번째 출동에 18세였던 조카 곽거병(去病)이 따라갔다. 800명의 기병을 배당받은 그는 대부대로 움직이는 한군의 약점을 깨닫고, 주력부대를 이탈해 단독으로 흉노 땅 깊숙이 들어갔다. 대담하고 능력 있는 기병 지휘관만이 할 수 있는 전형적인 습격 작전이었다. 이 공격에 흉노의 부족장급 인물까지 포로가 됐다. 기원전 121년, 곽거병은 지금의 감숙성(甘肅省) 지역으로 출동해 흉노의 주력부대를 격파하고 이 지역을 평정했다. 그의 부대는 기련산(祁連山)이라는 곳까지 진출했다. 지금 남아 있는 곽거병의 봉분은 이 전투를 기념해 기련산을 본떠 만들었다고 한다.
이 전투로 흉노는 전력의 30%를 잃고, 서쪽 방어 체제가 무너졌다. 화가 난 선우(單于·흉노의 총 수령)가 이 지역을 다스리던 혼야왕을 비난하자, 혼야왕은 한나라로 투항했다. 투항한 흉노군만 10만 명에 달했다. 여담이지만 이때 투항한 흉노 왕자에게 한 무제가 ‘김일제’라는 이름을 내렸는데, 나중에 신라 왕가는 자신들이 이 김일제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이 성공으로 한나라는 감숙성과 돈황(敦煌)을 손에 넣어 실크로드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했다. 수도인 장안(長安·서안)과 섬서성(陝西省) 지역이 흉노의 약탈 위협에서 벗어났고, 한군은 선우가 있는 몽골 지역으로 군사력을 집중할 수 있었다.
기원전 119년 위청과 곽거병은 각각 5만 명의 군대로 흉노의 본거지를 향해 출병했다. 선우는 더 이상 피하지 않고 주력군을 이끌고 맞섰는데, 위청 군에게 대패해 겨우 수백 명만 데리고 간신히 탈출했다. 다른 쪽의 세력은 곽거병에게 격파됐다. 곽거병이 잡은 포로만 7만 명에 달했다. 충격을 받은 흉노는 중국 침공을 중단하고 고비 사막으로 이주했다. 돌아온 곽거병은 최고 관원이 되고, 그의 일족은 한나라 정치를 좌우하는 최고 권력자가 됐다. 이때 그의 나이 22세였다. 그러나 곽거병은 자신의 권력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24세라는 젊은 나이로 사망한다. 아들도 없어 그가 이룩한 권력을 향유한 사람은 그의 동생 곽광(光)과 곽광의 후손이었다.
위청과 곽거병은 대조적인 성품을 가졌다. 위청은 인자하고 신중하며 조심스러웠다. 이 성품은 전쟁에서도 그대로 나타나 그의 원정은 항상 성공을 거두었지만,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지는 못했다. 유독 119년의 원정에서 흉노의 선우와 격전을 치르고 사로잡기 직전까지 갔지만, 이는 곽거병을 두려워한 선우가 위청을 찾아와 공격해준 덕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