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검색버튼 메뉴버튼

로마 멸망을 초래한 흉노 정벌의 영웅

임용한 | 38호 (2009년 8월 Issue 1)
기원전 2세기 한 무제는 흉노와 총력전을 펼친 끝에 흉노를 고비 사막으로 몰아냈다. 이것은 중국 역사에서도 의미 있는 사건이었지만, 최초의 세계사적 사건이기도 했다. 서쪽으로 이동해간 흉노족(훈족)으로 인해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일어나 로마제국이 멸망하고, 오늘날 유럽 각국의 원형이 탄생했다. 한 무제는 흉노를 협공할 동맹국을 찾기 위해 장건(張騫)을 서역으로 파견했는데, 장건의 모험은 실크로드를 개척하는 계기가 됐다. 지구사적 관점에서 볼 때, 이보다 더 극적인 사건이 있을까?
 
흉노는 중국 북방에 거주하던 유목 민족이다. 단일 민족은 아니고 몽골과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중앙아시아의 유목민까지 포함한 혼성 국가였다. 흉노 정벌은 한나라 입장에서 보면 대단한 모험이었다. 흉노는 유목 민족이고 광범위한 지역에 흩어져 있어 타격을 줄 전략 거점이 적고, 흉노의 왕과 주력을 포착하기도 힘들었다. 풍토병과 낮은 의학 수준 때문에 한나라 군대는 1년 이상 지속적인 작전을 수행할 수 없었다. 말도 버티지 못해 전쟁에 동원한 말의 80%가 죽거나 부상으로 버려졌다. 한군이 진격하면 흉노는 마을을 비우고 도망갔다가 재집결해 한군의 퇴로를 끊거나 소부대를 포위했다. 따라서 한군은 흉노족을 제대로 찾지도 못했으며, 황량한 초원을 헤매고 다니느라 엄청난 전비를 들여야 했다.

 
전형적인 기마 민족인 흉노는 인구가 적어도 강력한 전투력을 갖추고 있었다. 유명한 진시황의 병마용(兵馬俑)을 보면 기병 대신 전차부대가 있다. 기원전 3세기까지만 해도 중국군의 기동 전력은 기병이 아닌 전차였다. 병마용을 만들 때쯤부터 기병이 크게 육성되지만, 태어날 때부터 말과 함께 자라는 유목 기병의 기마술과 활 솜씨에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밭을 갈고 전차를 끌던 투박한 말들은 오늘날까지도 세계 최고의 전마로 명성을 날리는 날렵한 아랍종과 몽골 말을 당할 수 없었다. 흉노 정벌 후반기, 한 무제는 하루에 천 리를 달리고, 달릴 때는 피땀을 흘린다는 한혈마(汗血馬)를 구하기 위해 중앙아시아 원정을 감행했다. 이 전쟁은 가끔 ‘말 몇 마리 때문에 일어났다’고 희화화되기도 하는데, 그것은 한군의 말로 인한 스트레스를 모르고 하는 소리다. 한군의 정예 기병 100명이 3명의 흉노 기병에게 몰살당한 적도 있었다.
 
진정한 영웅으로 부상한 곽거병
 
힘들고 무모했던 전쟁은 많은 영웅을 탄생시켰다. 최초의 영웅인 위청(衛靑)은 노예 출신의 양치기였다. 기녀였던 이복누이 위자부(衛子夫)가 잔치에서 한 무제의 눈에 띄어 후궁이 되자, 이 인연으로 장군이 됐다. 기원전 129년부터 기원전 119년까지 위청은 일곱 번이나 출정해 큰 성공을 거뒀다. 오르도스로 출정했던 기원전 124년의 네 번째 원정에서 그는 흉노왕의 막사를 기습적으로 포위해 왕족 10명과 남녀 1만5000명을 포로로 잡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이 전쟁의 진정한 주인공은 따로 있었다. 기원전 123년 위청의 여섯 번째 출동에 18세였던 조카 곽거병(去病)이 따라갔다. 800명의 기병을 배당받은 그는 대부대로 움직이는 한군의 약점을 깨닫고, 주력부대를 이탈해 단독으로 흉노 땅 깊숙이 들어갔다. 대담하고 능력 있는 기병 지휘관만이 할 수 있는 전형적인 습격 작전이었다. 이 공격에 흉노의 부족장급 인물까지 포로가 됐다. 기원전 121년, 곽거병은 지금의 감숙성(甘肅省) 지역으로 출동해 흉노의 주력부대를 격파하고 이 지역을 평정했다. 그의 부대는 기련산(祁連山)이라는 곳까지 진출했다. 지금 남아 있는 곽거병의 봉분은 이 전투를 기념해 기련산을 본떠 만들었다고 한다.
 
이 전투로 흉노는 전력의 30%를 잃고, 서쪽 방어 체제가 무너졌다. 화가 난 선우(單于·흉노의 총 수령)가 이 지역을 다스리던 혼야왕을 비난하자, 혼야왕은 한나라로 투항했다. 투항한 흉노군만 10만 명에 달했다. 여담이지만 이때 투항한 흉노 왕자에게 한 무제가 ‘김일제’라는 이름을 내렸는데, 나중에 신라 왕가는 자신들이 이 김일제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이 성공으로 한나라는 감숙성과 돈황(敦煌)을 손에 넣어 실크로드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했다. 수도인 장안(長安·서안)과 섬서성(陝西省) 지역이 흉노의 약탈 위협에서 벗어났고, 한군은 선우가 있는 몽골 지역으로 군사력을 집중할 수 있었다.
 
기원전 119년 위청과 곽거병은 각각 5만 명의 군대로 흉노의 본거지를 향해 출병했다. 선우는 더 이상 피하지 않고 주력군을 이끌고 맞섰는데, 위청 군에게 대패해 겨우 수백 명만 데리고 간신히 탈출했다. 다른 쪽의 세력은 곽거병에게 격파됐다. 곽거병이 잡은 포로만 7만 명에 달했다. 충격을 받은 흉노는 중국 침공을 중단하고 고비 사막으로 이주했다. 돌아온 곽거병은 최고 관원이 되고, 그의 일족은 한나라 정치를 좌우하는 최고 권력자가 됐다. 이때 그의 나이 22세였다. 그러나 곽거병은 자신의 권력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24세라는 젊은 나이로 사망한다. 아들도 없어 그가 이룩한 권력을 향유한 사람은 그의 동생 곽광(光)과 곽광의 후손이었다.
 
위청과 곽거병은 대조적인 성품을 가졌다. 위청은 인자하고 신중하며 조심스러웠다. 이 성품은 전쟁에서도 그대로 나타나 그의 원정은 항상 성공을 거두었지만,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지는 못했다. 유독 119년의 원정에서 흉노의 선우와 격전을 치르고 사로잡기 직전까지 갔지만, 이는 곽거병을 두려워한 선우가 위청을 찾아와 공격해준 덕분이었다.
반면에 곽거병은 오만하고 자유분방하며 제멋대로인 면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성품이 전장에서는 대담하고 공격적인 지휘로 나타났다. 처음 원정 때도 그랬지만, 곽거병은 언제나 어떤 장수도 가보지 못한 지역까지 깊숙이 진군했다. 부대가 고립되고 측면 부대와 연락이 끊겨도 개의치 않고 진군했다. 그런 모습은 20세기에 말 대신 탱크를 타고 전격전을 수행한 롬멜이나 패턴 장군의 면모와도 비슷하다. 패턴은 이런 말을 남긴 적이 있다. “어느 멍청이들이 측면 방어라는 개념을 생각해내 측면에 치중하느라 전쟁을 하지를 못한다.” 롬멜의 저돌적인 진격 역시 대단했다. 너무 깊이 들어와 적진에서 고립되면 이런 논리로 부하들을 설득했다. “적진에서 고립됐다. 후퇴하면 전멸이다. 남은 방법은 앞으로 전진하는 것뿐이다.” 프랑스 침공 때는 한밤중에 영국군 주둔지를 그냥 통과한 적도 있었다. 영국군 보초는 그들이 연합군인 줄 알고 긴 탱크 부대의 대열을 향해 오랫동안 경례를 붙였다. 당연히 롬멜도 답례를 했다고 한다.
 
대담한 공격전과 보급의 중요성
 
이런 장군들의 일화는 1970년대 한국 기업들의 성공 신화와도 비슷하다. 경영 현장에서 조직 생활을 하는 분들에게는 아무래도 이런 이야기가 카타르시스와 용기가 되는 듯하다. 그런데 이런 성공 신화를 드러난 그대로 해석해 ‘무모하고 공격적인 자세’가 성공의 비결이었다고 결론을 내린다면 큰 실수다. 곽거병과 롬멜이 고립과 보급의 단절에도 두려움 없이 뒤돌아보지 않고 진격하며, 패턴이 “연료가 떨어지면 걸어서 전진하라”는 명언을 남겼다고 해서 그들이 진짜 보급이 떨어진 부대로 승리하고, 손으로 탱크를 밀며 전진하지는 않았다. 롬멜과 패턴의 장기는 보급 장교 자신들도 모르는 숨은 능력을 극한으로 끌어내는 점이었다.
 
패턴이 신뢰하던 보급 담당 참모는 사석에서 이런 불평을 했다고 한다. “장군은 내게 지시만 하지, 그것을 실현할 방법은 말해주지(고려하지) 않는다. 한번은 하룻밤 새 와인 수백 병을 조달하라는 명령을 내린 적도 있다.” 그러나 그 참모는 언제나 명령을 멋지게 수행했다. 패턴이 조달 방법을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그 방법은 참모 자신의 능력에 있었다. 패턴과 롬멜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능력을 지닌 장교를 알아보고, 그의 능력의 한계선과 가용성을 가늠할 수 있는 직감이었다. 이것이 전격전의 성공을 좌우하는 진짜 관건이었다. 겉으로는 무모해 보였지만, 사실 그들은 냉철한 관찰자이자 경영자였다.
 
곽거병의 성공에도 이런 비밀이 숨어 있다. 그의 전격전은 가혹한 현지 조달과 우수한 장병들 덕에 이뤄졌다. 한 무제는 곽거병이라는 소년 장수의 대담한 습격 작전을 보고받자, 바로 그가 흉노 정벌에서 진정으로 필요한 인재임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보급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그의 빛나는 자질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전격전의 성공 비결은 보급의 무시가 아니라 보급 능력의 극대화라는 사실 역시 알고 있었던 한 무제는 중요한 결단을 내렸다. 우수한 장병과 군마를 모조리 곽거병에게 몰아준 것이다.
 
한 무제의 배려로 곽거병에게는 최고의 전투부대와 겁을 모르는 수송부대가 주어졌다. 여기서 겁이 없는 수송부대란 곽거병의 진격 속도에 목숨을 걸고 보조를 맞추며, 흉노군의 게릴라 전술과 수레를 미는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재들을 말한다. 엘리트 부대 형성에는 흉노의 투항군도 한몫을 했다. 혼야왕의 투항군 중 정예 궁수 1만 명이 곽거병 군에 편입됐다. 말의 사육과 조련도 그들의 몫이었다. 흉노는 여러 민족의 혼성군이라 이런 투항군은 한 무제 이전부터 있었는데, 한군의 기병 전력에 이들은 대단히 큰 공헌을 했다. 곽거병의 묘 뒤쪽에는 위청의 묘가 있고, 오른쪽에 위치한 약간 작은 고분이 군대와 말을 지원한 흉노 왕자의 무덤이라고 전해진다. 곽거병의 성공은 기병 장군으로서의 그의 리더십과 그의 능력을 구현할 수 있는 장병들의 능력이 합쳐진 결과였다.
  • 임용한 임용한 | - (현)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의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저술
    yhkmyy@hanmail.net
    이 필자의 다른 기사 보기
관련기사